가능성의 짐승 (1)
“죄송합니다. 아버지.”
깊게 고개를 숙인 사내의 뒤로 오늘의 황혼이 지고 있었다.
붉은 황혼, 고개 숙인 빨간 머리, 그리고 사내의 손에 둘둘 감겨 있는 핏빛 붕대까지.
북부에서 보내온 강렬한 경고를 몸에 새기고 와버린 라두는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쩔······수 없었겠지. 이해한다.
황혼이 만드는 짙은 그림자 사이로 들려오는 힘겨운 목소리.
마치 신음과도 같은 숨소리를 들으며 라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 대의 강철공도······. 그렇게 호락하지만은 않은 인물이었었지.”
라두의 시선 끝에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힘겹게 일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시들어가는 오늘의 태양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노인.
비틀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라두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좀 아쉽구나. 아들아.”
“······!”
비틀거리는 발걸음과는 다르게 어느새 성큼 내려온 노인은 위로하듯 자신의 아들을 감싸 안았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라두는 바짝 긴장할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북부에서 환대를 받고 왔는데 조금은 돌려주고 왔어야지.”
“죄송, 죄송합니다.”
방금의 힘겨운 목소리와는 다른 명료한 목소리.
중년인은 붉게 물들어버린 라두의 왼손을 보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까끌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용의 피를 이은 자에게는 맞지 않는 초라함이구나.”
패배와 불명예,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강렬한 도전까지.
온갖 불결한 것들을 덕지덕지 달고 이곳까지 온 자신의 아들을 보며 용혈공 사르누스 공작은 입술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오느라 수고했다. 그만 쉬거라.”
“······네. 아버지.”
오직 둘만 있는 어두운 홀에는 누가 밝히지도 않았음에도 어느새 촛불들이 내뿜는 빛이 가득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빛 속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젊은 얼굴.
라두는 그림자가 가려버린 용혈공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미르셰아.”
“네. 아버지.”
그렇게 라두가 고개 숙이며 떠나간 자리.
사르누스의 부름에 둘만 있다 믿었던 그 공간에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아버지와 꼭 닮은 색을 가지고 있던 미르셰아는 사르누스 공작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영글지 못하는 열매는 더 매달아봤자 썩어갈 뿐이겠지.”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을 썩어가는 열매에 비유하는 남자.
라두와는 달리 어둠을 꿰뚫어 볼 줄 알았던 미르셰아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아들 녀석은 어디까지 커나갈지가 궁금하구나.”
어느새 주름 하나 없이 미끈해져 버린 용혈공의 손이 이제는 필요 없어진 지팡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진창에다 뿌린 가능성은 나도 처음이니 말이다.”
어두운 홀 곳곳,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밝혀지는 촛불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 가장 오래된 용의 푸른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
전쟁이 끝난 데어마르의 성벽에는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새까만 그을음이 가득했다.
타다만 잿더미와 함께 아직도 데어마르 곳곳에 튀어있는 핏자국들.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데어마르가 아직도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쿨럭, 쿨럭.”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음울함일 뿐.
죽은 자들의 시체와 상처 입은 자들의 신음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요제프는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군.”
요제프의 허약한 몸은 결국 격렬했던 공성전의 여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도 주어진 의무만큼은 다 마치고 쓰러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할 법도 했지만, 서쪽을 바라보는 요체프의 눈빛에는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울분이 서려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요제프의 저주받을 몸뚱이는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나사우에는 다다랐겠나?”
“아마 그럴 겁니다. 근방의 영주들은 저희를 막을만한 여력이 없을 테니까요.”
옆에 있던 자야르도 요제프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안대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야르의 말처럼 바예지드 군은 지금도 거침없이 서쪽을 향해 진군하는 중일 것이다.
전투는 끝났으나 전쟁은 시작이었고 바예지드는 감히 먼저 칼을 들이댄 서부의 영주들을 향해 그 대가를 받아낼 자격이 있었다.
“······그래. 블라드는 여전히 힘이 빠져있었나?”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과 달리 이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여태껏 쌓아 왔던 상처를 마주해야만 했다.
격렬한 맞부딪힘 간에는 어찌할 수 없는 생채기가 생기는 법이었고 본의 아니게 남아버린 요제프에게는 그런 상처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처음으로 진 건가?”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요제프는 들려오는 자야르의 말을 들으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첫 패배의 상대가 가이다르의 고딘이라니······.”
지금의 처지가 우울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이 우울해 보이는 데어마르였으나 그래도 자그마한 영광의 잔재 하나가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이걸 잘 졌다고 표현해야 하나? 고딘이라는 이름값이면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는 않을 테니.”
“죽지는 않았으니 분명 다행이겠지요.”
자야르는 요제프의 말에 무언가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술을 찌푸릴 뿐이었지만 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요제프의 말대로 세상에는 오르는 것만으로 높게 평가받는 산이 있었으니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수 있는 그런 험준한 산들.
그리고 블라드가 시도했던 가이다르의 고딘 또한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이제 블라드도 본격적인 기사의 세계에 진입하겠군.”
떨어지는 별이 있다면 떠오르는 별도 있는 법.
아마 이번 전쟁의 결과가 널리 퍼지게 될 때쯤이면 제국에 있는 모든 호사가들은 새로이 떠오른 이름 하나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이다르의 진형을 꿰뚫고 달렸으며 고딘이라는 강대한 적과 대적했음에도 살아남은 신인.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는 내가 먼저 외치지 않아도 남이 먼저 알아주는 그런 이름.
그래도 아직은 멀었다며 애써 부정하는 자야르를 보며 요제프는 가는 기침을 쿨럭거리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
성벽 타고 올라온 저 새끼! 저거 도대체 뭐야!
블라드다! 파란 눈깔의 블라드!
이즈니크 남작령의 도시 나사우.
이미 루트거에 의해 한번 불탄 적 있던 도시는 바예지드 군을 향해 창을 들이댔지만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문 열 거야 말 거야?”
“······크으으.”
걸어온 길은 핏물로 넘쳤으며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과연 서부에 퍼진 악명만큼이나 바예지드의 어린 기사는 검 끝에 자비를 매달아두지 않았다.
“이번에도 대답 안 하면 너는 죽는 거야. 지금 여기에 문 열어본 놈이 너밖에 없었겠어?”
“열겠, 열겠습니다.”
육상 병력이라고는 애초에 몇백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던 도시 나사우.
이미 한 번 파괴되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성벽과 가이다르에 동조하기 위해 무리해서 보낸 지원 때문에 나사우의 전력은 더욱 약화된 상황이었고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페테르는 그런 약점을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너. 아까 나보고 뭐라 그랬지?”
“네, 네?”
고작 열 명 정도의 기사들일 뿐이었으나 그들은 페테르의 예상대로 훌륭히 성벽을 장악했다.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사들의 이름값만큼은 수백의 병사들보다 무거운 것이었으니까.
“파란 눈깔이라잖아. 파란 눈깔의 블라드.”
블라드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지나가는 루트거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파란 눈깔이라니.
기사 앞에 쓰일 칭호치고는 너무 무게감이 없는 거 아닌가?
두드드드득-!
블라드의 불만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나사우의 도개교는 육중한 쇠사슬과 함께 해자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사뿐.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사우에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각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확실히 전해라.”
눈앞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도개교를 보며 페테르는 다시 한번 차가운 경고를 내렸다.
“나사우에서만큼은 그 어떤 약탈 행위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겠다.”
서슬 퍼런 페테르의 명령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리 군율이 엄중한 군대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일어나는 약탈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페테르 바예지드는 북풍의 설한보다도 매서운 존재감을 통해 군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
“진입해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도시 나사우.
얼어붙지 않는 최북단의 항구도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아무리 각 영주의 통치권만은 보장해주는 것이 영지전의 관례였지만 페테르는 나사우에서만큼은 그 관례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별 손해 없이 손에 넣고 싶군.”
처음부터 이 도시만큼은 가져가겠다 생각했었다.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굳이 어린 소년만이 가지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바예지드 또한 더는 북부 안에만 갇혀있고 싶지 않았다.
“항구로 뛰어라! 어딘지 알지?”
“들어왔던 길이 전혀 다르거든요!”
도개교가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기사들은 서둘러 성벽을 뛰어 내려가 나사우의 항구를 향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끝에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거대한 배 한 척이 돛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 튀려고 준비 중이었네!”
블라드의 외침처럼 아마 이즈니크 남작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올라탔던 가이다르는 고꾸라지고 말았고, 기세등등이 서부로 내려온 북부의 군세를 자신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뛰어!”
각자의 세계를 갖춘 루트거의 기사들이 서둘러 항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항구에 닿는 자에게는······.”
“누아르-!”
루트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블라드가 큰 소리로 성문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이즈니크 남작을 놓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가 챙겨놓은 재산이 탐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전쟁이란 금화를 먹는 괴물이었고 그 금화는 엄연히 패자가 지불해야 하는 재물이었다.
“먼저 닿는 자에게는 뭐요?”
“······하여튼 많이 챙겨주마.”
그저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어느새 바짝 붙어있는 검은 말을 보며 루트거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산금이 나올 올해 겨울이 기대되네요.”
“그것도 지금 저 배를 출항시키면 말짱 헛기대가 되겠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루트거는 누아르와 함께하는 블라드라면 그 누구보다 빨리 항구에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이다르의 진형을 헤집고 다녔던 그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할 지경이었으니까.
“가자!”
히이이힝-!
블라드의 외침과 함께 항구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검은 말이 있었다.
여름의 태양 아래서 반짝이는 푸른 바다.
그 빛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자신의 세계에 매달아 놓은 푸른 달빛이 머물러 있었다.
“항구로 가게 하면 안 된다!”
“저 자식 막아! 막으라고!”
자신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보며 블라드는 달리는 누아르의 위에서 가만히 왼쪽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제 색을 찾은 블라드의 세계.
“저리 비켜 새끼들아!”
이제는 닿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고딘의 달은 더는 높디높은 밤하늘에 매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빛나는 달이었다.
하얀색도, 초록색도 그렇다고 푸른색도 아닌 온전한 블라드만의 색깔이 검 끝에서 파도처럼 물결치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물든 그 세계의 시작은 아마도 모닥불 옆에서 피어올랐던 푸른 달빛에서 시작된 것일 테다.
가능성의 짐승 (2)
색유리들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하얀 복도를 색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을의 기운을 품은 바람이 청량했지만, 정작 그 선선함을 마주하는 두 사내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을 뿐.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
그 영광된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 새하얀 건물 안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네. 피에르 주교.”
붉은 법복을 입고 있는 두 명의 남자.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목 언저리에 두르고 있는 칼라의 색깔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열리는 추기경 회의는 자네가 말하는 그런 안건을 올릴 수 있는 그런 회의가 아니야.”
“하지만 추기경 님.”
피에르는 자신을 보지도 않은 채 단호히 말하는 에두아르드 추기경을 보며 일이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북부연합이 내미는 이교(異敎) 때문에 이번 회의가 열렸다는 것을요. 그러나······.”
그러나 이 말 만큼은 전해야 한다.
북부에 감돌았던 사특한 기운을 쫓아 우트만 남작령에 다다랐던 피에르 주교.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명예로운 성전이 아닌 온갖 의혹으로 덧칠된 수상한 전투였을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에서의 일은 분명 여태껏 보아왔던 성전과는 달랐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 군세였으나 정작 어둠 앞에 다다랐을 때도 느긋했을 뿐.
자신의 협박과 간청에도 꿈적 않던 중앙의 군세는 북부의 강철공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북부가 참지 못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분명 피에르에게 의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드라굴리아가 수상합니다. 추기경 님.”
“쉬잇!”
에두아르드는 피에르의 말에 기겁을 하며 그를 재빨리 벽으로 밀어붙였다.
피에르 또한 껑충한 키를 가지고 있던 자였으나 풍채 좋은 에두아르드의 다급한 밀침에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신의 뜻을 좇을 때도 항상 눈과 귀는 주변에 두어야 한다고.”
속삭이듯 외치는 추기경의 말에 피에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국에서 넷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드라굴리아.
그런 드라굴리아를 대놓고 수상하다 말하고 있었으니 추기경인 에두아르드로서도 낭패감에 식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네의 신실함을 높게 사지만 제발 주위에 돌아가는 일도 좀 생각하시게.”
“······죄송합니다 추기경 님.”
신의 뜻을 따르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는 교황청으로서는 완전히 속세와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추기경들 가운데도 드라굴리아의 지원을 받는 자들이 있을 테니 피에르 주교의 직설적인 발언은 분명 위험한 것이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일단 북부의 일부터 마치고 생각을 해보지. 북부정교회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에두아르드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피에르의 보고는 분명 수상한 것이었지만 지금 교황청 앞에는 당장 대처해야만 하는 확실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이 끝나기 전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으시게나. 이제는 쇼아라로 돌아가지도 못할 테니.”
“······알겠습니다.”
피에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떠나는 에두아르드를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역시 숨어있는 어둠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위협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에두아르드가 떠나고 오직 홀로 남게 된 복도 위.
그곳에서 피에르 주교는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리며 자신을 위안할 뿐이었다.
분명 보았으나 어찌할 수 없는 수상한 어둠.
게다가 그 어둠은 드라굴리아라는 영광된 이름 아래 숨어있었으니.
“제가 어찌하오리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밝았으나 피에르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신의 뜻을 따라왔던 신실한 이단심문관은 이번에도 그의 뜻이 자신의 어깨로 내려앉기를 바랄 뿐이었다.
※※※※
평소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나사우의 항구.
그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바예지드 군으로 인해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해져 버린 항구는 블라드로 하여금 기묘한 감상을 일으키게 했다.
“괜히 나왔네. 이거.”
어찌할 수 없는 허탈함, 그리고 무언가 비어있는 듯한 공허함.
애써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씩 불쑥 튀어 오르고 마는 고딘에 대한 감상은 지금도 블라드를 우울한 푸른색으로 물들이고는 했다.
“어이. 거기 서 있는 쇼아라의 파란 눈깔.”
눈앞에 바다를 보며 천천히 상념 속으로 빠져들던 블라드를 끄집어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루트거 님.”
항구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
바예지드가 자랑하는 후계자인 루트거 바예지드였다.
“괘씸하군. 다들 바삐 움직이는데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푸른 항구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금발과 검은 갈기는 아무래도 쉽게 숨을 수는 없는 색깔들일 것이다.
마치 한 몸처럼 같은 동작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와 누아르를 보며 루트거는 가만히 웃음 짓고 말았다.
“어디 숨고 싶으면 머리부터 가리는 게 좋을 거다.”
일부러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리키는 루트거의 손짓이 익살스러웠다.
분명 루트거가 블라드를 찾아 나선 것은 나름의 위로를 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같은 기사였기에 블라드의 우울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자리에 같이 있었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끝은 맺었으니 된 거다. 훌륭하게 대처했어.”
“······.”
그런 루트거가 블라드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는 분명 너는 잘했다는 말이었다.
비록 허무하게 끝나버린 대결이었으나 어떻게든 스스로 끝을 내려 했던 블라드의 의지만큼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으니까.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교회의 문장이잖냐.”
누아르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가온 루트거는 블라드에게 생소한 목걸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교회의 문장이라기에는······. 뭔가 다르게 생겼는데요.”
루트거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분명 교회의 문양이었으나 그 아래에 걸쳐 있는 가로의 줄이 하나 더 새겨져 있었다.
익숙함 속에 새겨져 있는 생소함.
설명을 요구하듯 고개를 올린 블라드를 보며 루트거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이 탄생한 북부정교회의 문양이다.”
신의 뜻은 하나였으나 그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가지.
교리에 대한 해석은 분명 수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종교계의 골칫거리였지만 북부연합과 북부 교구 산 로지노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온전히 홀로서기 위해서 자신만의 것을 갖춰야 하는 것은 어느 세계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안드레아 사제님의 말씀만 믿거든요.”
“그분도 이제 북부정교회야.”
“그러면 이 문양이 맞겠네요.”
어차피 블라드에게 있어서 문양의 모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블라드에게 있어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입구는 바로 안드레아 사제였을 뿐이니까.
뒷골목에서 굴러다녔을 뿐인 나에게 세상 위에 새길 이름을 만들어 준 사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뒷골목의 소년에게 신의 말씀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나저나 어쩔 거냐. 계속 따라올 테냐?”
“네?”
블라드는 밑도 끝도 없이 따라올 거냐 묻는 루트거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번 진격이 나사우에서 그치지는 않을 거다. 서부를 전부 점령하는 거야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야.”
루트거의 말대로 바예지드 군은 이곳 나사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페테르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취해야 하는 몇몇 지역들을 이미 간추려 놓았고, 그 영역은 서부에 존재하는 세 개의 남작령에 걸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들만큼은 가져가야 계산이 맞겠지.”
시작은 가이다르가 했으나 끝은 바예지드가 낸다.
찬탈자에게 동조하고 있던 서부의 영주들은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따라올 거냐고······.”
“돌아가고 싶다면 돌려보내 주마.”
한 사람의 기사도 아쉬운 시기였지만 페테르와 루트거는 블라드의 상태에 주목하고 있었다.
아직 나이도 차지 않았던데다 충분히 흔들릴만한 계기도 있었으니 그에 대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요제프도 앓아누워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그 녀석을 보좌할 멀쩡한 녀석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루트거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는 좀 쉬는 것이 좋겠다.
지금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니.
“······오랜만에 쇼아라로 돌아가겠네요.”
“그래. 이번 기회에 쉬고 와라.”
강제적인 휴가에 뭐라 반발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이제 블라드는 그저 발끈할 뿐일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관조하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알아야 하는 기사 중의 한 명이었다.
“바다······. 좋았는데요.”
“그래?”
올려다보았던 높은 달은 이제 없기에 자연스레 마주할 수밖에 없는 푸른 바다.
그 바다가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올라갈 때가 아닌 넓혀야 할 때라고.
‘오랜만에 한번 듣고 싶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 울림의 진동은 마치 목소리를 떠올리게 낯익음이 깃들어있었다.
※※※※
여전히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는 데어마르.
지금도 속속 도착하는 보고서들이 알리시아의 신경을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바예지드에게 전장을 내준 꼴이 되었군요.”
든든한 우군이었으나 정작 상처는 데어마르만의 것.
전쟁에서 살아남았기에 가문의 존속만은 이루어냈으나 지금부터는 곪아가는 상처에 신음해야 할 차례였다.
“노렸던 걸까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습니다. 아마 전대 가주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셨을 겁니다.”
바예지드는 지금도 서부를 뛰어다니며 전리품들을 줍고 있겠지만 하이날은 그저 가만히 서서 숨만을 고르고 있을 뿐.
알리시아는 처참히 쓰러져 있는 데어마르를 보면서도 울분을 터트릴 수가 없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인 거네요.”
힘이 없기에 무시당했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답답한 현실을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하는 알리시아의 앞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회의에 참석해야겠어요.”
짓눌리는 무게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만 알리시아 앞에 고풍스러운 초대장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초대장을 보는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색에 맞지 않게 조금씩 이글거리고 시작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레몬 농사만 지을 수는 없는 거예요.”
“······.”
군사가 있어야 하고 기사가 있어야 하며 남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오직 반짝이는 금화뿐.
지금도 상처에 허덕이는 데어마르의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알리시아는 이번 북부 회의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뚫어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하게 떠나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때마침 창밖을 통해 보이는 하이날의 나무.
이제는 홀로 서 있는 것이 더 낯설어 보이는 그 나무 밑에는 언제나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던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그가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영주님. 영주님!”
알리시아가 창밖에 보이는 나무를 보며 조용히 의지를 다잡고 있을 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말았다.
“지금 밖에, 밖에······.”
“이게 무슨 일인가?”
던칸은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굽힌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집사를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랫동안 충성해왔던 하이날의 집사.
자신만큼이나 노회한 그는 언제나 침착한 모습으로 알리시아를 보좌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밖에? 뭔가요?”
“알리시아 님······.”
심상치 않은 집사의 모습에 알리시아조차도 긴장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집사는 불길한 소식 때문에 그녀를 다급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밖에 손님들이 와계십니다.”
“손님이요?”
간신히 숨을 고른 집사를 보며 알리시아는 어째서인지 그의 등 뒤에서부터 낯익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엘프들입니다. 그들이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네?”
지금은 이곳에 없는 자신의 기사가 가져왔던 엘프들의 편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그때 편지 안에서 느껴졌던 바람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엘프? 엘프요?”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온 손님들.
그들은 자신들을 동쪽 끝, 아우슈린에서 왔다 말하고 있었다.
가능성의 짐승 (3)
키는 훤칠하게 크고 어깨는 넓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하더라도 마치 귀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들의 귀.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뾰족하고도 긴 귀가 지금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최근에 전쟁이라도 치른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곳곳에 있는 핏자국이며 그을음이 전부 최근의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디스 님. 정말 이런 곳에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이 있을까요?”
마치 속삭이는 것만 같았으나 확연히 들려오는 발음과 운율.
처음 듣는 엘프들의 언어에 경비병들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데어마르에 대한 불길한 첫인상뿐이었다.
“······기사 블라드가 말했었다.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은 이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레인저들의 부정적인 보고가 있었지만 그래도 바리디스는 믿어보기로 했다.
블라드는 분명 하이날의 데어마르라는 곳에서부터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이 시작되었다고 했었으니까.
다른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어린 세계수를 지켜주었던 블라드의 말이라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방금 영주님께서 여러분의 입장을 허가하셨습니다.”
인간들의 눈빛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엘프들의 언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두 세계의 경계를 향해 다가온 던칸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분명 귀한 손님이었으니 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들어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혹시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제국 역사상 엘프들을 위해 최초로 문을 열어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던칸의 명령과 함께 새로 갈아치워야만 할 것 같은 성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삐걱대는 데어마르의 성문이었으나 그 움직임만큼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과연 맞았군.”
엘프들을 위해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도시 데어마르.
난생처음 마주하는 인간들의 도시를 보며 레인저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보는 인간들의 도시는 낯선 모습이 가득했지만, 도시를 떠도는 공기의 냄새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아우슈린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음이 있었다.
----?
그리고 그 낯익음이 시작되는 곳. 데어마르의 하얀 저택.
그 위로 빼꼼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언덕 위의 하얀 뱀.
멀리 있어도 보이는 뱀은 엘프들을 향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데어마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프 여러분.”
바라디스는 던칸의 말을 들으며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맞이하는 인간들의 도시.
그 낯섦에 한껏 긴장하고 있었으나 분명 데어마르는 그들을 환영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엘프들을 향해 흔들리고 있는 하얀 꼬리처럼.
※※※※
도시에 깃든 어둠 속, 그곳에 자리 잡은 낡은 술집 하나.
술집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기대어 서 있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는 멀리서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커스.”
“이제는 포즈난이야.”
“······그 정도로 이름을 바꿔대면 헷갈리지 않나요?”
블라드의 장난 어린 핀잔에 이제는 포즈난이 되어버린 마커스는 그저 냉막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이걸로 그때의 협조는 다 갚은 거다.”
“알겠어요. 더는 샤를 때의 일에 대해서는 생색내지 않을게요.”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블라드를 보며 포즈난은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감히 암행대의 대장에게 거래를 걸어왔던 대담한 녀석.
바예지드의 피를 이은 두 후계자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을 이렇게 쉽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잘 쓰고 돌려줘라.”
“알겠어요. 마커스.”
블라드는 마커스가 전해주는 까마귀를 품에 집어넣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에 있는 술집을 향해 휘적거리며 들어갔다.
마치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듣던 대로 정말 말 안 듣는 놈이로군.”
포즈난이라 말했으나 굳이 마커스라 대꾸하는 블라드.
이름 없는 사내는 저 젊은 기사의 고집만큼이나 자신이 오래도록 마커스라 기억될 것임을 자각하고 말았다.
“마커스라는 이름이 어감이 괜찮긴 했지.”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남자의 입에는 어느새 길게 빼문 담배 한 개비가 물려있었다.
※※※※
주인이 내미는 술잔 위로 영롱한 황금색이 비치고 있었다.
서부의 특산품이자 이 술집의 자랑이기도 한 맥주.
난생처음 보는 술을 보며 블라드의 혀가 메마른 입술을 홅고 말았다.
장미의 미소에서 일했던 초팔이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하얀 거품이 둥둥 떠 있는 이 술은 분명 기가 막힌 맛일 거라고.
“드워프 말씀이십니까?”
“그래. 드워프 말이야. 키 작고 땅땅한 친구들.”
시선만큼은 맥주라는 술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펼쳐져 있는 블라드의 손바닥은 자신의 허리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의 키라고 말하는 듯한 블라드의 손놀림을 보며 술집의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갑자기 왜······.”
“여기서 사고팔고 그런다며. 드워프들 말이야.”
무심히 건넨 블라드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술집 주인도, 접시를 나르던 종업원도.
그리고 취한 듯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사내들까지도.
모두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블라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 알고 왔거든. 그러니까 너무 돌아가지 말자고.”
그러나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는 상황에서도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술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뒷골목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바예지드의 기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맥주잔을 들고 있는 블라드의 눈빛에는 오직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끈적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물어볼 테니까 대답만 하면 돼.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닐 거야.”
블라드가 내뿜는 기세에 산전수전을 겪어왔던 노예 상인조차도 차마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물의 냄새.
이제 블라드라는 존재는 어두운 뒷골목이 품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여기 창고에 너희들이 가둬놓은 드워프들이 있는 거로 듣고 왔거든.”
휴가를 명받은 블라드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바예지드의 기사였지만 요제프의 기사.
데어마르를 떠나 나사우에 다다랐던 블라드는 앓아눕고 만 자신의 주군에게서 자그마한 임무 하나를 받아 이곳까지 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전혀······. 끄아아악!”
“원래는 손가락부터 시작하는데 지금은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손목부터 가자.”
태연하게 말하는 목소리 뒤로 저 멀리 날아가는 손목 하나.
뒤늦게 찾아온 격통에 술집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노예상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었지만, 그의 조직원들은 쉽사리 블라드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손 다음에는 바로 모가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네. 이게 쇼아라 방식이거든.”
태연하게 웃는 얼굴 위로 비치는 푸른 눈동자가 스산하다.
잘려나간 손목을 애써 붙들고 있던 노예상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쇼, 쇼아라의 블라드! 파란 눈깔!”
“······하. 파란 눈깔이 뭐야. 진짜.”
북부에서는 경의와 자부심을, 그러나 서부에서는 공포를 담아.
“그래서 드워프들. 있어 없어?”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는 블라드의 이름은 그렇게 다른 의미를 간직한 채 불리며 대륙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
서부의 기병대가 유명한 이유.
그것은 그들이 가진 말과 기마술의 훌륭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들고 있는 가볍고도 단단한 무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멀리 날아가는 화살.
더 단단한 방패와 갑옷.
소소하지만 전장에서만큼은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무기의 격차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드워프들의 피와 땀에서 갈취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창살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처럼 서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는 했다.
“······.”
드워프들의 자부심이나 다름없는 수염조차 엉망으로 잘려버린 창살 안의 사내.
비쩍 마른 몸 위로 드러나고 만 근육들이 처량해 보였다.
등허리 곳곳에 새겨져 있는 채찍 자국들이 그가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철컹-
저 위에서부터 무거운 자물쇠 소리가 퍼져오자 갇혀 있던 어린 녀석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지하 감옥과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쇠사슬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학대는 드워프들의 핏속에 흘렀던 강인한 영혼마저도 충분히 꺾을만한 것이었다.
“어디 보자.······불카루? 볼카누?”
“······불카누다.”
삐걱거리는 판자 소리와 함께 내려온 사내.
낮이었으나 벌써부터 어린 녀석에게서 풍기는 맥주 냄새가 알싸했다.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불량한 것이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머리 색만큼이나 싹수가 노란 녀석인 것 같았다.
하긴, 저 젊은 나이에 노예들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분명 훌륭히 썩을 재목이겠지.
“음. 음. 좋아. 불카누. 그래.”
“······?”
그러나 불카누는 눈앞의 금발 청년이 가까이 다가오자 맥주 냄새 사이에 숨겨져 있던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한둘로는 배길 수 없는 확연한 피 냄새.
“여긴 진짜 전부 드워프들 밖에 없네? 과연 드워프 전문 상인이라더니.”
과연 마커스가 알려준 정보처럼 마치 상자처럼 쌓아놓은 철창 안에는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차마 손발을 제대로 피지 못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
그중에서도 보이는 어린 드워프들을 확인한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던 맥주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마. 여기 있는 아이들만 풀어준다면 무기를 만드는데 협조······.”
“다 풀어줄게.”
시작은 시원하고 넘어가는 목 넘김은 부드럽다.
분명 위스키보다 싼 술이겠으나 블라드는 처음 맛보는 맥주라는 술에 빠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뭐?”
“대신 조건이 있다. 불카누.”
근처에 있던 의자를 잡아당긴 블라드는 맥주잔을 집어던지고는 불카누라는 드워프와 눈을 마주쳤다.
드디어 찾았다. 드워프.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바예지드 가문의 차남이신 요제프 바예지드 님 밑에서 일하는 기사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맥주잔 소리가 요란하다.
그와 함께 블라드의 손 위에는 핏자국이 가득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제안과 선택.
블라드의 입에서부터 요제프가 명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드워프 해방 전선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신다.”
공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지하 감옥.
그곳에서 겨우 열린 창살 사이로 건네지는 편지와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네가 이 편지에 대한 답을 가져온다고 맹세한다면 여기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은 자유다.”
좁디좁은 창살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과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몸뚱이에 갇혀 있던 요제프.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던 둘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넓은 세계로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의무를 가득 담았던 첫 잔은 요제프를 위해.
그리고 가라앉아 있던 황금색을 담았던 다음 잔은 목소리를 위해.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고 있는 불카누를 보며 블라드는 속에 담아두었던 또 다른 물음 하나를 꺼내 들기로 했다.
“혹시 너희들이 있다는 섬에 소드마스터에 관련된 전승이 있나?”
블라드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그때의 계약을.
엘프들의 마을에서 가리키고 있던 소드마스터에 대한 흔적은 분명 드워프들이 있는 서쪽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발걸음을 따라 (1)
엘프들의 대장로이자 가장 늙은 엘프인 제로니모는 말했었다.
그는 서쪽을 향해 떠나갔다고.
“······자네가 어째서 그의 행적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의 흔적을 쫓아 다다랐던 엘프들의 숲이었건만 정작 그곳에서 맞닥뜨린 것은 목소리가 아닌 소드마스터에 대한 흔적이었을 뿐.
의문을 해소하면 해소할수록 더 큰 의문들이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흔적을 찾고 싶다면 먼저 이해해봐야 할 걸세.”
“······무엇을 이해해야 합니까?”
내가 쓰는 검은 황실의 검이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왜 황실의 검을 쓰고 있는가?
목소리의 행적은 분명 정령들을 지키며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왜 정령들을 지키고 있었는가?
“건국왕 프라우센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인 키하노 프라우센을 말이지.”
“······.”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들은 분명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국왕 프라우센.
최초의 소드마스터.
그리고 영광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인간 키하노.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그에 대한 고민들을 읽어보길 바라네.”
늙은 만큼 현명해진 제로니모는 블라드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말해줄 수 있었다.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봐야 한다.
아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그는 오래된 기억들을 수없이 들춰보았을 것이다.
“서쪽으로 가보시게. 그는 그곳으로 떠난다고 했었으니.”
“서쪽입니까?”
모두가 프라우센이라는 남자의 영광된 시작은 찬양했을지라도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신비롭게 사라져버린 프라우센의 대한 흔적.
어쩌면 지금의 블라드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 흔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래. 서쪽. 우리의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자리.”
자신이 누굴 찾는지도 모른 채 이곳까지 걸어왔다.
그러나 희미한 흔적은 분명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아마 지키고자 노력했던 자들의 발버둥일 것이다.
“그곳에 있는 드워프들을 찾아가 보게나.”
늙은이가 세워놓은 이정표가 어린 기사를 위해 다음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있었다.
이제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서쪽.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드워프들을 향해서.
“드워프······.”
또다시 낯선 세계를 접하고만 블라드의 얼굴 위로 고고한 은빛의 색깔이 머물렀다.
고이 놓여 있던 은색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빛줄기.
고민하고 있던 블라드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져나간 그 빛은 마치 찬찬히 살펴보기라도 한다는 듯 그렇게 오랫동안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알리시아는 지금 뛰어오르는 심장을 붙잡은 채 간신히 평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저희 가보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흔적이자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가문의 가보.
알리시아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했던 그 호박석을 블라드에게 내어준 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끌렸기에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데어마르의 미래를 내다본 투자.
블라드라는 전도유망한 기사는 분명 데어마르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메꿔줄 수 있는 훌륭한 조각이었고 알리시아는 그 빛나는 조각을 정말이지 갖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영주. 하이날의 알리시아 님.”
자신을 바라디스라 소개한 엘프는 실로 정중한 태도로 알리시아를 대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배척한다던 그간의 소문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
하이날의 가신들은 그런 엘프들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께서 블라드에게 쥐여주신 가문의 소중한 가보는 저희 아우슈린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블라드가 가져온 엘프들의 편지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인사였을 뿐.
어머니 세계수의 소중한 흔적을 보관해주었고 또한 잃어버리고 만 인간들의 영주를 위해 엘프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히 고개 숙인 바라디스의 뒤에서부터 고풍스러운 나무상자 하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자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을 할 것만 같은 모양새.
엘프라는 이름만 앞에 붙어도 가치가 훌쩍 뛴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은······뭐죠?”
이윽고 상자가 열리자 그와 함께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
우울한 냄새로 가득 차 있던 이곳을 순식간에 환하게 만드는 그런 향기였다.
“사프란입니다. 저희가 특히 아끼는 향신료이죠.”
마치 꽃잎을 말려놓은 것만 같은 붉은 줄기들.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마치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이 확연한 실체를 내보이고 있었다.
“어, 음. 이게 그러니까.”
어찌 내뱉고는 있으나 차마 끝을 맺을 수는 없었던 알리시아의 목소리.
난생처음 엘프들의 문물을 접하고만 알리시아는 눈앞에 있는 사프란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는 물건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리시아 남작님. 저희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하이날 가문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굳이 돌려 말하지 않는다.
말속에 진의를 숨겨 이득을 보려 하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엘프들은 그저 곧고 바르게 전할 뿐이었다.
“비록 먼 곳에 있긴 하지만 그곳에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저희의 제안을 깊게 생각해주십시오.”
풍겨오는 향기는 아찔하고 들려오는 말은 달콤하다.
알리시아의 가신들은 귓가에 맴도는 바라디스의 말에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가 있나.
가장 어려운 시기, 가장 믿을 수 없는 기회를 맞이한 가신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영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알리시아를 향해 돌아갔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유일한 하이날인 알리시아 하이날.
가신들의 눈빛을 마주한 그녀의 어깨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펴지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먼 곳에서 오신 여러분들.”
엘프들을 향한 알리시아의 미소가 환히 데어마르의 홀을 밝히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치를 알아보았던 알리시아의 앞에 있는 것은 그간 지난했던 세월에 보답하는 블라드의 선물이었으니까.
※※※※
인간들과의 대화는 성공적이었다.
제국에 비해 빈약할 수밖에 없는 엘프들이었기에 언제나 그들에 대한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야 마주한 커다란 세상에는 이미 큰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북부 연합이라는 세력이 준동한 것은 분명 저희에게 이득일 겁니다.”
“어쩌면 제국에게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북부 연합이 내세우고 있다는 북부정교회는 분명 다른 종교나 믿음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하나의 기준만이 아닌 너와 나의 가능성.
그것을 보장해준다는 새로운 종파는 분명 엘프들에게 있어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주는 존재일 것이다.
“여기로군.”
여태껏 무지했던 세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 레인저들은 본래의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언덕 위에 있는 하이날의 나무를 살펴볼 수 있도록 알리시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들이 아우슈린을 나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블라드가 말했었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가 보아도 오래되어 보이는 레몬 나무 한 그루.
그곳에서 느껴지는 진한 향기는 분명 어린 세계수의 냄새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역시 뱀이었군.”
왼쪽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눈동자 속에 떠오른 오망성이 바라디스의 눈을 밝혀주고 있었다.
세계수와 함께 하는 엘프들의 세계.
그곳을 통해 보이는 색이 진한 곳에는 자신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하얀 뱀이 있었다.
“살아남아 있었군요.”
“전에 보았던 도브레치티의 두더지와도 같은 느낌입니다.”
블라드가 말해주었던 대로 정령들의 흔적을 따라왔던 바라디스와 엘프들.
그들을 아우슈린을 떠나 도브레치티의 두더지를 먼저 만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세계수의 기어이 깃들어 있던 이곳 데어마르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살려놓았을까?”
오래된 지난날, 오직 살아남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만을 챙긴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엘프들.
그러나 모든 것이 타들어 가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몰래 세상 밖으로 흩뿌려 준 흔적들이 있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아마 지금 보이는 하얀 뱀일 것이다.
“바라디스 님. 저기.”
“음?”
부하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바라디스는 곧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얀 뱀의 등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어린 것들.
그것들은 분명 블라드의 검에 담아 보냈었던 어린 세계수의 정령들이었다.
“자리를 잡았군.”
멀리까지 왔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을 넘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우슈린에서 태어난 어린 정령들을 보며 엘프들의 표정에서 환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하이날의 영주에게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해야겠다. 어쩌면 또 다른 흔적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하나가 되어버린 제국 안에서 흔적도 없이 구겨져 버린 작은 세계들.
그러나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엘프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작은 세계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들은 자신들이 따라 나온 어린 기사의 행적을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전 자신들을 찾아왔던 소드마스터의 행적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
서서히 땅거미가 져가는 항구의 부둣가 앞.
그곳에서 서 있던 블라드는 조용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사우를 떠나갔던 그 배 위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드워프들이 블라드가 있는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루트거 님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알고 있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마커스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러시겠죠.”
내가 한 이 일에 대해서 루트거가 당연히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오롯이 요제프만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는 곧 가주직을 손에 넣기 위한 형제들의 싸움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으니까.
“후회하지 않겠나?”
파도 소리와 함께 퍼지는 마커스의 물음이 블라드의 귓가로 퍼져오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냐.
너를 아껴주었던 루트거가 분명 실망할 텐데.
“후회는······. 할 것 같습니다.”
루트거 바예지드.
나와 함께 용을 잡았던 남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고 돌이켜보면 즐거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안 하면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요.”
루트거의 호의를 배반한 것은 분명 뼈아픈 결정이었다.
그러나 고딘은 말했었다.
지금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부터 살펴보라고.
“저는 요제프 님의 기사니까요.”
“······그래.”
가이다르와의 전쟁은 요제프의 숨통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루트거의 가치를 드높이는 변수였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요제프는 제 빛도 발하지 못한 채 스러져 갈 것이 분명할 터.
그렇기에 블라드는 드워프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여기서 해야 할 일도 다 한 것 같네요.”
블라드의 말과 함께 지평선에 와닿은 배가 황혼 속을 향해 자그마한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아마 지금 사라져 간 배 안에서는 여전히 블라드가 있을 항구를 바라보는 드워프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자신을 진창 위에서 끄집어내어 준 요제프를 위해, 그리고 목소리를 위해.
블라드는 불카누라는 드워프를 비둘기 삼아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편지 한 장을 띄워 보냈다.
발걸음을 따라 (2)
낯선 집무실에서 바라본 창밖은 푸른 바다로 가득 차 있었다.
창가에 서 있던 페테르는 그 푸른빛 위로 점점 번져가는 노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은 잘 보내주었나?”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바예지드의 가주.
그런 페테르를 바라보고 있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는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약 스무 명은 되는 인원이더군요.”
눈을 좁힌 채 바라본 창가 너머에는 조금씩 노을을 향해 나아가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노예로 잡혀 있던 드워프들과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잠입했던 불카누가 타고 있을 작은 배.
“명하신 대로 그들을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비록 블라드는 몰래 내보냈다고 생각하겠으나 이미 도시 나사우는 바예지드의 것.
요제프의 소망을 담은 저 배는 페테르가 허락했기에 떠날 수 있던 것이었다.
“결국 저 녀석은 루트거가 아닌 요제프를 선택하는군.”
지금도 홀로 항구에 서서 떠나가는 배를 지켜보고 있는 어린 기사.
페테르는 언제나 그러했듯 높은 곳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름의 각오가 단단해 보였습니다. 요제프 님은 분명 좋은 기사를 얻었습니다.”
“그래.”
페테르는 들려오는 마커스의 보고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온전한 것은 하나이나 받으려 하는 것은 두 사람.
페테르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요제프의 발버둥을 보며 많은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나사우는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지.”
영민하고 사려 깊지만 타고나기를 허약하게 태어나고만 자신의 아들 요제프.
그것은 분명 그 아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때로는 누군가에게 부당한 짐을 지워주고는 하는 법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아마 북쪽에 있는 것보다야 훨씬 몸에 무리가 덜 가겠지.”
페테르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비치는 그의 손바닥은 새빨간 빛이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핏빛으로 물든 것만 같은 손.
아마 평생 지워낼 수 없을 그 빛깔을 보며 페테르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자신의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래도 아비 된 도리로서 대안 하나 정도는 제시해주고 싶군.”
아들들이 장성한 만큼 또다시 반복되어야 하는 바예지드의 역사.
그러나 페테르는 그들에게 반복될 비극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자그마한 비상구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가주로서의 의무와 아버지로서의 연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페테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심정을 느끼며 마커스는 조용히 집무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이름 없는 그림자가 떠난 자리.
이제는 홀로 서 있는 페테르는 붉은빛으로 물든 손바닥을 꽉 쥐고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아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넓은 바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낯설기만 한 넓음이더라도 누구에게는 숨 쉴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페테르는 바라고 있었다.
※※※※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탄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게가 이끄는 부다아트 족과 슈테판이 이끄는 가시나무 용병단,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앞장서 있는 블라드까지.
나사우를 떠난 이들은 지금 데어마르를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마침 잘됐군요. 아마 이 상태로 겨울까지 뛰었다면 골병 꽤나 들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나름의 부상자는 있던 상황.
격렬했던 전쟁의 초반부터 싸워왔던 이들이었기에 슈테판의 말대로 다들 나름의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알고 있었다며.”
“무엇을 말이야.”
“북부정교회 말이야.”
아게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감히 부관 주제에 대장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니.
그 날카로운 추궁을 마주한 아게는 적당히 블라드의 눈빛을 뭉개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눈치채고 있었던 거지.”
무심히 블라드가 챙겨온 맥주를 마시던 아게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차가우니까 더 맛있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북부의 기사와 중부의 용병, 그리고 야만족.
공통점이 있을 수가 없는 이들이 그나마 대화를 나눠볼 만한 주제는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북부연합과 북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 정도일 것이다.
“나도 사실 과정은 잘 몰라. 바예지드가 낌새를 던져줬고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채셨다 뭐 이 정도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있다.
마치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제국민과 야만인들처럼.
그러나 두 세계를 구분 짓던 가장 큰 장벽에 북부정교회라는 이름의 구멍이 뚫려버렸으니 야만인들로서도 한 번 정도는 고민해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시는 조상신까지도 인정해준다고 하니까 말이지. 아마 그 약속이 아니었다면 우리라도 절대 협조하지 않았을 거야.”
린드부름의 습격과 용살기사단에 의해 세력이 크게 기울어가던 부다아트 족이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들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제국에 쉽게 협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이 아닌 새로이 만들어진 북부의 그릇은 충분히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야만인들의 입장에서도 한번은 고민할 법한 대안이었다.
“그래도 몇몇 부족들은 우리까지 죽이겠다고 날뛰고 있다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이번 겨울에는 부족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지.”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가 오랫동안 반목해왔던 역사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다아트의 족장은 자신의 아들을 미리 세상 밖으로 보내본 것이었다.
바예지드에게 계속 협조하는 것이 옳을지에 관한 결정은 아마 아게의 입에서부터 시작될 모양이었다.
“그래?”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짧았다.
자신은 까마득히 몰랐던 북부연합의 일을 들으며 블라드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섰다 믿었지만, 세상을 떠도는 파도는 여전히 블라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앞에 데어마르입니다!”
순간, 침묵을 깨는 누군가의 보고가 있었다.
숲길을 나서자 보이는 아직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초원.
그러나 불길한 냄새와는 상관없이 그 앞에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어느새 정겨울 뿐이었다.
“응?”
모두가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를 보며 들떠있었지만 블라드는 데어마르에서부터 느껴지는 낯선 감각을 느끼며 눈을 잔뜩 좁히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블라드 님.”
“······잠깐만.”
서둘러 왼쪽 눈을 감으며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블라드.
블라드의 기감이 예민한 것을 알고 있던 사내들은 서둘러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합을 맞춰왔던 만큼 용병들과 야만족들이 순식간에 어우러지며 확고한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그러나 이들의 날선 경계에도 무색하게 블라드는 그런 의도로 오러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달라 보이는 데어마르.
“축제라도 하는 건가?”
“네?”
점점 저물어가는 황혼 너머로 멀리서 보이는 하이날의 나무가 요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흥겨운 느낌으로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는 나무의 위에는 하얀 뱀이 높게 고개를 쳐든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음?”
한참 하얀 뱀의 해괴한 짓거리를 보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의 어깨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 씨. 비 오잖아.”
조금만 더 가면 데어마르였건만.
그러나 그 새를 참지 못하겠는지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불러낸 여름의 마지막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닿기 전에 내린 그 비는 여전히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
“······사프란, 사프란이라.”
돋보기를 통해 마주하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커져 있었다.
엘프들이 건네준 사프란이라는 향신료.
본인들은 주로 요리를 할 때 쓰는 향신료라고 했지만, 향수로 써도 무방할 것만 같은 좋은 향기였다.
“이것도 혹시 그런 것 아닐까요? 압실론이라는 엘프들의 차가 사실은 마약이었다는데······.”
노회한 던칸은 갑작스레 와닿은 호재를 보며 기뻐하기보다는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저 멀리 브리간테스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숙청은 엘프들의 차인 압실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들었으니까.
“본인들은 몰랐다고 하니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요.”
엘프들에게는 평범한 차였지만 인간들에게는 마약.
신체구조가 다르기에 그렇게 작용한 것이라 설명한 바라디스의 말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통하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실험을 해보면 되겠지요. 이건 그만한 부담을 감수할 만한 물건이에요.”
바라디스가 가져온 것은 그저 선물만이 아니었다.
아우슈린은 진심으로 데어마르와의 관계를 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증거로 가공된 사프란뿐만 아니라 그 꽃의 구근까지도 가져와 안겨주었다.
아마 다른 곳은 몰라도 데어마르라면 꽃을 피울 거라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
“정말로 이걸 키워보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돋보기를 내려놓은 물빛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우리 같은 자그마한 영지에서는 값싼 것을 키워봤자 손해에요. 겨우 영지민들이나 먹여 살릴 정도일 뿐이라고요.”
알리시아는 이번 전쟁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데어마르는 정말이지 작은 영지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완전 거지에요. 돈이 없다고요.”
거대한 가문들의 사이에 껴서 이러저리 흔들렸을 뿐인 데어마르를 보며 알리시아는 속으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수모는 결국 힘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레몬 사업에 주력하신 것일 테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작물이 필요해요. 그래야 돈을 벌고 기사들을 모으죠.”
전대 가주인 알리시아의 아버지 또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하이날의 힘만으로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알리시아의 앞에는 레몬보다 열 배는 더 가치 있을 작물이 놓여 있었으니 고민할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가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도 돈 냄새 정도는 맡을 줄 아는 자들이니까요.”
엘프들의 방문에 놀란 것은 알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요제프조차도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이번 일 만큼은 아무리 바예지드라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상관없다.
알리시아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승부를 본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요.”
분명 저 멀리 동쪽에 있는 비츠카야도 엘프들과의 교역을 통해 단숨에 가세가 확장되었다고 했었다.
데어마르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똑똑똑-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알리시아의 귀로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들이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소리였다.
“알리시아 님. 지금 막 블라드 경이 데어마르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집사의 말을 들은 알리시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 그녀에게 있어 가장 반가운 존재는 역시 블라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라드 경에게 바로 저에게 오라고 전해주세요.”
언제나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져와 주는 남자.
아마 블라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기회 또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번에는 너무 바빠서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 전했잖아요.”
알리시아는 수상쩍다는 던칸의 눈빛을 보며 다급히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블라드를 데려오라는 명에는 변함이 없었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사프란.
언덕 위를 누비고 있는 이들은 엘프들.
그리고 지금 도착한 사람은 자신의 기사인 블라드.
무언가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만 같은 조각들을 보며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미소 한 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
“그렇게 반갑나? 그래?”
어둑한 하늘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성문 앞.
서둘러 성문 안쪽으로 들어간 바라디스는 자신의 어깨 위에서 조잘대고 있는 고양이 형상의 정령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건강해 보이는 고양이 모양의 정령은 그동안 하얀 뱀이 이 아이들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저기 오는구나.”
냥냥거리는 정령의 말대로 경비병들의 외침 속에 블라드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데어마르의 성문.
어두운 틈 사이로 보이는 화려한 금발을 확인한 바라디스는 품속에 고이 품어두고 있던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그 아이가 말한 대로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겠지.”
지금도 단풍나무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그 편지는 자신의 동생인 세계수의 신녀가 건네준 것이었다.
봉인조차 되어 있지 않은 신녀가 보낸 편지.
그러나 편지 안에는 글귀 대신 마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것만 같은 유치한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
오직 그때가 닥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신녀의 예언에는 어린 카나리아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금발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발걸음을 따라 (3)
땀이 흥건한 이마, 새하얗게 질린 입술.
달빛이 내려앉는 침대 위에서 한 소녀가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고 있었다.
“······으, 으으.”
사방에서 다가오는 밤안개의 냄새가 지독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이유 모를 진득함이 소녀에게 불길함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따라가요. 빨리요······.”
평범한 안개가 아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계수의 신녀는 블라드의 허리를 붙잡고는 어서 가자 재촉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녀의 말은 블라드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니까.
오직 세계수의 신녀만이 자각할 수 있는 그런 꿈.
-짹. 짹짹.
어둠을 헤치며 힘겹게 걷고 있는 블라드의 앞으로 어린 카나리아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마치 블라드를 인도라도 하겠다는 듯 카나리아는 횃불처럼 어둠 속에서도 앞을 밝혀주고 있었다.
“빨리요. 빨리.”
신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직 저 아이만이 블라드를 어둠 속에서 빼내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다가오는 어둠은 짙고 깊었으나 그에 대항하는 어린 카나리아의 지저귐은 너무나 연약할 뿐이었다.
훅-
마치 누군가의 입김이 와닿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사라져버린 어린 새.
그 빛에 의지해 나아가고 있던 신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
순식간에 블라드와 신녀의 주위로 안개가 꾸물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세계수의 신녀는 서둘러 블라드의 허리를 껴안고는 카나리아가 사라졌던 곳을 향해 매섭게 노려보았다.
-······.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새빨갛게 웃고 있는 입술과 함께.
이제는 빛을 잃어버리고만 자그마한 깃털 하나가 그녀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너한테는 절대 안 줄 거야.”
블라드를 인도하던 그 빛은 꺼져버린 것이 아니었다.
잡아먹힌 것이었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녀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지 않았다.
※※※※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알리시아의 집무실.
창밖에 보이는 하이날의 언덕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앞에 있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뱀은 오늘 일광욕이라도 하겠다는 듯 똬리를 틀고는 가만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던칸 경이 말하기를 당신처럼 특수한 계약을 맺은 기사는 몇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블라드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아름답게 반짝이지만 무언가 굶주려 있는 것만 같은 그녀의 눈빛.
그런 알리시아 눈빛을 마주한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마 7년이 아니라 더 긴 기간이었다 해도 승낙했을 겁니다.”
블라드는 알리시아가 자신과 요제프와의 계약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요제프가 알려준 것이겠지.
그렇다면 요제프는 지금의 상황 또한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기간은 짧았으나 저에게는 과분한 계약이었죠.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알리시아는 블라드에게 영입에 대한 운을 띄우고 있었다.
귀족과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블라드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분위기.
그러나 그동안 숱하게 자신에게 관심을 표했었던 알리시아였기에 블라드 또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놓은 답변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요제프 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요.”
“아.”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표정이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불확실한 대답으로 그녀에게 허튼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알리시아의 기사이기도 한 블라드는 그녀에게 나름의 애착이 있었고 가능하다면 이번의 제안을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가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블라드는 애써 웃음 지으려 하는 그녀의 처연한 모습이 물빛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요제프 님이 물어보아도 좋다고 하신 것이었군요.”
흔들리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에 이런 기회를 준 것이었구나.
이제야 요제프의 속내를 짐작한 알리시아는 속에서 차분히 끓어오르는 울분을 느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요제프 님보다도 저와 먼저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요.”
“만약 그랬다면 분명 알리시아 님과 계약을 했을 겁니다.”
“······.”
그랬을 거라 말하는 블라드의 미소가 괜히 얄미로웠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인다면 못 해줄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알리시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블라드였고, 그는 지금 막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뒤였다.
역시 데어마르보다는 쇼아라겠지.
알리시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못내 분했다.
“게다가 쇼아라에는 제미나라는 친구도 있으니까요.”
“······네?”
갑자기 들려오는 제미나의 이름에 블라드는 당황했지만 알리시아의 미소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4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마치 방금의 말은 내뱉지도 않았다는 듯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알리시아.
블라드는 예전과는 무언가 달라 보이는 그녀의 기세를 보며 조용히 눈치를 볼 뿐이었다.
“장원을 드리겠어요.”
“······네?”
더는 훌쩍이고 있을 뿐인 물망초 꽃은 이곳에 없다.
이제 알리시아의 눈빛에는 그저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가득할 뿐.
“장원이요. 당신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질 세습되는 땅 말이에요.”
장원(莊園). 모든 기사가 주군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
그 단어를 들은 블라드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앞에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 이번 전쟁을 통해 저희도 영역을 넓힐 수 있었어요. 물론 바예지드의 배려가 있긴 했지만.”
그동안은 하나의 도시와 2개의 마을뿐인 하이날 남작령이었지만 이번의 전쟁을 통해 2개의 마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블라드가 오징어 떼와 함께 도착했던 어촌 마을은 이제 위치상 도시가 될 수 있을 만한 입지를 가지게 되었으니 블라드에게 장원을 내어주겠다는 그녀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요제프 님이라 할지라도 내걸 수 없는 조건일 거예요.”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빼앗아라도 와야 한다.
짙은 눈그늘의 사내에게서든, 빨간 머리의 여자에게서든.
블라드라는 존재는 이 두 명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꼭 맞는 조각이라는 것을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
‘······장원, 장원이라.’
블라드는 이제는 익숙해진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장원이 그렇게 좋은 건가?’
꿈꿔본 적 없었기에 가치조차 모르겠는 장원이라는 단어.
그러나 분명 고딘은 말했었다.
기사에게 있어 장원이란 존재는 귀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입구 같은 것이라고.
비록 거짓된 이름을 알려주었던 고딘이었지만 장원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던 그때의 웃음만큼은 진실된 것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언젠가 때가 되면 기억해 달라는 것이지.’
자신에게 장원을 주겠다 말했던 하이날의 군주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당당한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제안했다.
‘저뿐만 아니라 데어마르에 있는 모든 영지민은 블라드 경을 아끼고 좋아하고 있어요. 태어난 쇼아라만큼은 아닐지라도 이곳이라면 당신에게 또 다른 고향이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가장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은 아닐지라도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될 수 있다.
알리시아의 돌직구 같은 제안을 들은 블라드는 지금도 하염없이 복도를 걸으며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모르겠는데.”
전부 다 모르겠는 것 투성이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번의 고민만큼은 요제프나 다른 바예지드의 기사들과 나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알리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블라드에게 고민을 떠넘겼고 아마 그것이 그녀가 블라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였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거부한 괘씸한 기사에게 주는 그런 복수 말이다.
“이럴 때 탁 튀어나와 주면 참 좋을 텐데.”
복잡해진 생각만큼 어지러운 발걸음을 따라 복도를 걷던 블라드는 절로 목소리의 존재를 떠올리고 말았다.
오직 자신만이 알기에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인 목소리.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상식은 해박한 존재였으니 분명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어주었을 텐데.
“응?”
순간 복도를 걷던 블라드는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쫑긋거렸다.
“목검?”
누군가가 목검 같은 것을 들고는 허공을 내려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바람 소리는 목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뭐야 이거.’
열심히 내리치고는 있으나 길을 찾지 못한 그 소리에 블라드는 복도 위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열심히는 하나 조금의 나아짐도 없는 그 소리는 오직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안타까움이 섞여 들어있었다.
“······.”
블라드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잡아끄는 소리를 따라 여태껏 가본 적 없던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오래된 만큼 좁고 구불구불한 데어마르의 복도.
빈약한 재정에 줄어든 사용인들 때문인지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복도에는 자근자근 밟히는 먼지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좁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나온 곳은 여태껏 블라드도 모르고 있던 아주 자그마한 정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초라한 공터.
그리고 그곳에서 블라드는 있는 힘껏 목검을 내려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으, 흐······.”
샤를 라브노마.
이제는 마지막 라브노마이기도 한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서 샤를은 목검 같지도 않은 몽둥이를 들고는 열심히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중이었다.
“······엉망이구만.”
내려치는 것인지 올려치는 것인지 모르겠는 의미 없는 동작들.
전혀 길이 잡혀 있지 않은 샤를의 모습을 확인한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복도 옆에 붙어 모습을 숨겼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나.”
아마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저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설픈 라브노마의 작위는 소녀를 붕 뜨게 만들었을 것이며 전쟁 때문에 날카로웠던 그간의 분위기는 분명 소녀를 위축시켰겠지.
결국, 낯설기만 한 이 도시 안에서 샤를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샤를의 사정을 짐작한 블라드는 가만히 볼을 긁으며 들려오는 목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음에도 쉴새 없이 내려치는 목검.
가만히 복도 벽에 기대어 있던 블라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흠.”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익은 소리.
지금 샤를이 내는 소리는 뒷골목 공터에서 홀로 목검을 내려치던 소년이 내던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마치 어리고 부끄러웠던 예전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 블라드는 그만 복도를 나서 자그마한 정원에 들어서고 말았다.
“······야.”
“네?”
갑작스레 나타난 블라드를 보며 동그랗게 치켜뜨고 있는 두 눈에는 당황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의 반가움이 비치는 것은 분명 블라드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무언가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샤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블라드는 괜히 나섰나 하는 곤혹감에 목소리까지 떨리고 말았다.
배우는 것에는 익숙했어도 알려주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뒷골목의 소년은 아직 남에게 나의 것을 내어주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냥 내려치지 말고 팔꿈치 각도를 좀 좁혀보지.”
그렇다 할지라도 받은 것이 있다.
이제는 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뒷골목 공터에서 묶여 있었을 거라는 걸.
“네?”
“선을······ 이렇게 그어보라니까.”
익숙한 소리를 따라 내디딘 발걸음 끝에는 예전의 광경과 꼭 닮은 장면이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모습이 있다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
“이렇게요?”
“······너는 파지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경직된 듯 꽉 접혀 있는 소녀의 손을 펴주는 블라드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저택의 자그마한 정원.
-소년은 내려치는 팔꿈치 각도를 좀 더 좁혀야 할 거 같은데.
그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의 시작은 아마 어두컴컴한 뒷골목의 어느 공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귀향
데어마르의 언덕 위로 홀로 올라오는 남자가 있었다.
입고 있는 근사한 차림새와는 달리 들고 있는 손에는 청소도구가 가득한 남자.
짧아진 낮만큼이나 길어진 노을을 확인한 블라드는 언덕 가운데 서서 청소도구들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
올라오는 블라드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있던 하얀 뱀이었으나 오늘의 블라드는 녀석을 보러온 것이 아니었다.
언덕 가운데 자리 잡은 하이날 가문의 가족묘를 돌보러 온 것이었다.
“알리시아 님이 많이 바쁘셨나 보네.”
다른 이의 가족묘지이긴 했으나 이끼가 잔뜩 올라온 묘비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도무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기에는 산 사람들도 살아남기에 바쁜 시기였으니까.
“돌아가기 전에 닦아놓고 가야겠네.”
무심히 내려놓은 도구들 사이에서 물에 적신 짚 뭉치를 꺼내든 블라드는 꺼끌한 면을 이용해 묘비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는 너무 많았으나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는 그 묘비들을 보며 블라드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이끼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일단은 다친 데 없이 잘 살아남았으니까.”
격렬했던 전투였던 만큼 살아남았기에 감사하다.
누구는 신에게, 누구는 조상들에게 그 감사를 표시하겠으나 블라드는 마땅히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눈앞의 이들과는 달리 묘비 하나 없이 묻히고 만 어머니의 존재는 이제는 블라드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돌봐주셔서.”
그러나 희미하다 할지라도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블라드는 비록 다른 이의 것이었지만 눈앞의 묘비들을 다리삼아 저 먼 하늘을 향해 읊조리기 시작했다.
“후우.”
알리시아의 부모님 묘를 닦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을.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씩 닦아낼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마디씩을 읊조려가던 블라드는 이윽고 가장 오래된 묘비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세월에 닳아버린 글자 사이로 가장 오래된 하이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노란색 호박석을 알리시아에게까지 물려준 사람이자 지금 하얀 뱀이 있는 나무를 심어낸 초대 가주.
‘······.’
처음 마주했을 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이날의 초대 가주는 분명 목소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령이 깃든 나무를 심은 하이날의 초대 가주와 정령들을 찾아다니며 지켜냈었던 목소리의 행적은 분명 공통점이 있었고 그 공통점의 가장 위에는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달려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시나요. 블라드 경.”
“······아.”
소드마스터라는 단어와 함께 한참 상념에 빠져들어 가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 님.”
“저보다 더 정성이시네요.”
그곳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야 막 정신을 차려서일까.
선명한 노을빛과 함께 흩날리는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
갑작스레 너무 진해진 색들을 보며 블라드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고 말았다.
“기사들은 함부로 뒤를 잡히면 안 된다면서요. 너무 넋 놓고 있던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네요.”
분명 농담이었으나 블라드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알리시아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마 알리시아가 블라드의 뒤가 아닌 앞에서 다가왔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소드마스터라는 단어를 생각하던 블라드의 두 눈이 저절로 자신의 세계를 끌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으이차.”
블라드가 다 해버려 자신이 돌볼 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알리시아는 별수 없다는 듯 블라드의 옆에 앉고는 가만히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또 해주셨네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요.”
혼자 멀뚱히 서 있기가 뭐 했던 블라드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으며 그녀와 같이 데어마르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그저 주고받는 한 마디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정당하지 않은 계승자에게서부터 그녀를 지켜주었고 서부의 찬탈자로부터 데어마르를 지켜주었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기사가 되었고 마침내 목표했던 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도, 하이날의 알리시아 남작도 결국 서로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도시로······. 꼭 다시 한번 오고 싶네요.”
그렇기에 지금 블라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은 쇼아라에서 태어났으나 기사 블라드는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얼마든지 환영할게요.”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노을에 물들어가는 블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가는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봐두고 싶었으니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두 사람이었으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있었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둘을 바라보던 언덕 위의 하얀 뱀이 지금만큼은 따뜻한 바람이 불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도 반가웠네.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의 반가운 비도, 여름의 시원한 비도 아닌 차가움을 머금은 비는 지금도 데어마르 앞에 모여 있는 사내들의 어깨를 때리는 중이었다
“언젠가 또 볼 기회가 있겠지. 안 그래도 북부도 한번 조사해볼 생각이었으니까.”
바라디스의 시선이 내리는 빗방울들을 뚫고는 블라드 옆에 서 있는 누아르를 향하고 있었다.
초원의 아들인 검은 말.
일각수의 피를 이은 것이 확실한 누아르는 분명 엘프들의 입장에서 한 번 정도는 조사해봐야 할 존재일 것이다.
“전해준 계시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직관으로 알아차릴 날이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괜스레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신녀의 그림을 건드려보았다.
노란 새, 자신, 그리고 그 주위를 불길하게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색깔들.
분명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이었으나 정작 그 그림을 전해준 신녀는 그 이상의 의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아마도 어젯밤 꾸었던 꿈처럼 희미해진 기억 사이로 흩어졌던 모양이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블라드는 떠나가지만 엘프들은 이곳 데어마르에 남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세상은 낯선 바다와도 같았으니 겨우 찾아낸 데어마르라는 섬에 잠시 동안은 정박해 있을 예정이었다.
“준비되었답니다. 요제프 님.”
“······좋다. 출발하지.”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요제프의 안색이 창백했다.
고질적인 그의 기침병은 온도에 민감한 것이었고 지금 같은 날씨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허락에 블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귀환행렬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바로 쇼아라의 블라드.
경험 없는 블라드에게는 아직 조금 이르긴 하였으나 요제프는 이번 귀환행렬을 지휘하는 것을 맡겼고 블라드는 지금의 광경으로 그의 믿음에 보답했다.
부대 차렷-!
블라드의 눈짓과 함께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잔뜩 물을 먹은 바예지드의 깃발들이 데어마르의 성벽 앞으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지치고 상처 입긴 했으나 지금의 이들은 승리자.
그렇기에 엉망인 깃발이라 할지라도 들 자격이 있을 것이다.
“······.”
알리시아는 성벽 아래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블라드의 눈빛이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데어마르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와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하며 보내줘야 할 때.
자신의 입으로 작별을 고해야만 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저희는 여러분의 피로 세운 지금의 평화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여름에 도착하였으나 가을이 되어서야 떠나는 병사들.
서부와의 전쟁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를 치르고 만 그들을 위해 알리시아가 힘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녀의 치사(致謝)가 이들에게 있어 자그마한 자부심이라도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데어마르는 언제든지 돌아올 여러분을 환영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외치는 마지막 말은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한 것.
모두를 바라보던 알리시아의 눈동자였으나 지금만큼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블라드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든 나를 향해 돌아와도 좋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비록 가을비 아래서 패잔병처럼 서 있는 병사들이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 하나씩이 맺혀 있었다.
※※※※
“제미나! 제미나!”
도시의 끝자락. 해가 들지 않은 거리.
아직 저녁이 아니었기에 문을 열 준비를 마치지 못한 장미의 미소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 자식은 하라는 일은 안 한고.”
자그마한 핀 하나를 입에 물고는 한참 머리를 올리고 있던 제미나는 아래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임 초팔이와 다르게 이번에 새롭게 고용한 녀석은 영 제미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쾅-! 쾅-!
“제미나! 거기 있어?”
예의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숙녀의 방을 가차 없이 두드리는 목소리.
오타르의 동생인 네드는 지금 제미나의 방을 가차 없이 두들기는 중이었다.
“뭐야?”
“······있으면서. 왜.”
그러나 다급했던 방금과는 달리 네드는 이제야 막 문을 연 제미나를 보고는 조금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둬 너.”
단지 사나운 그녀의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채 마치지 못한 화장이었으나 주근깨만 가렸어도 피어나는 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화려한 핀들과 함께 틀어 올린 붉은 머리.
그 붉은 색과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덜미는 충분히 소년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 이게 아니지!”
한참 제미나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던 네드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교회에서 사제들이 다 성문으로 뛰쳐나가고 있거든!”
“그런데 뭐.”
교회가 뭐 어쨌다고.
수녀원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특히나 더 교회에 대해 냉소적이게 된 제미나였다.
“주교님도 나갔다고 하더라고. 그 새로이 부임하신 분 말이야!”
“······주교까지?”
그러나 교회에 좋은 감정이 없다 할지라도 심상치 않은 신호만은 감지해야만 했다.
지금의 제미나는 장미의 미소를 이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왜 그런다는데? 그것까지 알아 왔으니까 지금 이 난리를 피우는 거지?”
제미나의 큰 눈망울이 가느다랗게 좁혀지자 네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지금의 제미나에게는 예전의 부엌데기였던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작아진 마르셀라가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고······. 데어마르에 갔던 병사들이 온다고 다들 마중을 나갔다더라고.”
“······뭐?”
그러나 지금 보이는 제미나의 얼굴에는 실로 오랜만에 예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데어마르에 갔던 병사들이 지금 돌아왔다고.”
네드의 말에서부터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의 흔적이 느껴졌으니까.
“블라드도?”
“아마도?”
순간, 네드의 눈으로 반짝이는 빛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제미나의 귓가에 매달린 귀걸이 한 쌍이 보내는 빛무리.
그 귀걸이는 기사 블라드가 쇼아라를 떠나기 전 레이디 제미나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
“왜 저렇게들 나와 있는 걸까요.”
“교황청의 사제들이 아니니까.”
저 앞에 보이는 쇼아라의 정경을 보며 행렬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길었던 파병을 끝내고 돌아왔으니 병사들이 들뜨는 것은 이해하겠으나 지금의 블라드는 이 행렬을 지휘하는 책임자.
그런 블라드였기에 성문 앞을 가득 메운 사제들의 모습에 반가움보다는 경계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북부정교회면 이렇게 나와주는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
데어마르를 떠날 때보다 조금은 더 창백해진 요제프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 하나가 걸려있었다.
비록 블라드는 자리에 맞게 경계하고 있었으나 요제프는 이들이 어째서 이렇게 나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수상해 보인다면 앞서가서 확인해봐라. 그것이 네 임무 아니냐.”
“알겠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제들의 환영에 의심을 품은 블라드는 홀로 쇼아라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추방당했기에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한 나의 고향.
그러나 지금의 블라드는 교회에 밉보인 초라한 추방자가 아닌 바예지드 군을 인솔하는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저건 누구지.
-너무 젊어 보이는데.
-블라드다! 쇼아라의 블라드!
성문 앞에 있는 병사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지금 블라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아니.”
홀로 성벽 앞까지 다다른 블라드.
그러나 잔뜩 경계한 자신과는 다르게 그곳에는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어떤 사제가 서 있었다.
“이제야 돌아왔군. 쇼아라의 블라드.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이제는 하얀색의 법복이 아닌 붉은 색의 주교복을 입은 사제 안드레아.
자신이 내어준 이름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에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사제님!”
“하하! 키도 더 컸군!”
이제야 안드레아를 알아본 블라드는 서둘러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지친 길을 걸어온 블라드를 안아주는 그의 품은 태어나 처음 맛보았던 하얀 밀빵만큼이나 포근하고 푹신했다.
마주 안은 사제와 소년의 위로 오늘의 황혼이 지고.
닿았으나 넘지 못했던 푸른 달이 다시금 밤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녀의 눈물과 함께 떨어져 내렸던 소년은 오늘 푸른 달빛과 함께 돌아왔다.
끝과 시작 (1)
시간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언젠가는 시들며, 강인하던 검이라도 언젠가는 녹이 슬고 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늘 위로 떠 올랐던 태양도 마찬가지.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로 점점 붉어지는 노을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점점 기울어지는 해를 따라 휘청이며 이어지던 그림자는 마침내 브리간테스에서도 가장 영화로운 건물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에까지.
댕- 대앵- 댕-.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도시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울려야 할 때가 아님에도 울리기 시작하는 종소리.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곧 황궁 위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검정색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던 해가.
마침내 쓰러진 노을의 끝에서부터 새까만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벽지 바꿨나 보네.”
노곤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뜬 블라드는 멍하니 천장에 박혀 있는 문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숫자를 세면 셀수록 시야는 흐릿해져만 갈 뿐이었다.
단 하룻밤만의 휴식으로 그동안의 피로를 풀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잘까.”
잘까라고 말했지만 이미 더 잘 생각이 충만했던 블라드는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쇼아라에서 추방된 지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동안 몸 뉠 곳은 있었지만 편하게 뒤척일 곳은 없었던 블라드는 실로 오랜만에 늦장을 피우기로 결심했다.
“좋네.”
진짜 오늘만큼은 코가 삐뚤어지게 자야지.
그동안 쌓인 피로는 너무 끈적였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따뜻했으니까.
가을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코끝을 맴돌고 있는 차가워진 공기가 블라드의 이불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야.”
“······.”
“야. 야.”
“······건들지 마라.”
그러나 블라드의 결연한 결심에도 망설임 없이 그를 흔드는 손이 있었다.
자그맣지만 거침없는 손.
조심히 어깨를 흔들고 있던 그 손은 어느새 대담하게 올라가 블라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머리 건들지 말라고 했지.”
“내가 므리 근들지 마라고 해찌.”
“······야.”
볕이 잘 들지 않는 거리였으나 들춰낸 이불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블라드의 눈가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좀만······. 더 자자고. 점심까지만.”
“지금이 점심이야.”
둥글게 휘어진 제미나의 눈이 어느새 창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려진 커튼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
언제나 새벽의 어스름한 빛에 깨어났던 블라드에게는 낯설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더 잘 거면 점심이라도 먹고 자. 마르셀라가 너 온다고 새벽같이 재료 준비해놨으니까.”
머리를 헝클이던 제미나의 손이 블라드의 옷깃을 잡고는 천천히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일어서는 상체만큼이나 점점 가까워지는 제미나의 얼굴이 싱그러웠다
“너. 화장했냐.”
“흐.”
콧잔등에 가득했던 주근깨가 보이지 않았기에 물어본 말이었건만 제미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때? 봐줄 만하지?”
“이 정도면 범죄야.”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일 것이다.
어쩌면 방이 어두워서일 수도 있고.
그만큼 지금 눈앞에 있는 제미나는 블라드가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빨리 나와. 점심 거의 다 됐다니까.”
“······.”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닫히는 문.
블라드는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제미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건방져졌어.”
블라드가 기대했던 주근깨 가득했던 제미나는 없었다.
비쩍 마른 손으로 걸레를 쥐어짜던 가련한 소녀도.
지금 블라드의 앞에 있는 그녀는 어느새 스스로 일어서버린 장미의 미소 제미나였을 뿐.
“화장 좀 했다고 저렇게까지 변하나.”
제미나가 떠나간 자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막연히 그 향기를 분 냄새라 생각했지만 정작 제미나가 바른 화장은 옅고도 옅었을 뿐이었다.
※※※※
“잘 잤니. 블라드.”
“네. 마르셀라도 잘 주무셨나요.”
“잠이야 못 잤지. 네 덕분에.”
장난스럽게 건네는 마르셀라의 말에 블라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녀린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퉁퉁 부은 두 눈.
어제 귀환한 블라드를 껴안고는 펑펑 울어댔던 것은 제미나보다는 오히려 마르셀라였었다.
“나이가 드니까 감정이 잘 안 추슬러져.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봐.”
“아직도 한창이세요.”
전직 초팔이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해 줄 때라고.
“그래?”
과연 그 말이 정답이었다는 듯 접시 위에 담긴 고깃덩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마 지금 같은 눈치가 알리시아에게 발동되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내밀어준 음식들을 먹으며 조용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막 귀환했던 어제는 너무 바빴고 혼잡스러웠으며 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했었다.
“마르셀라.”
“응?”
“여기요.”
4층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블라드는 조심스레 마르셀라에게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그걸로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날 푸른 달빛에 사로잡혔던 사람은 오직 블라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날 밤, 가장 큰 것을 잃은 사람은 마르셀라였으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증거는 필요했다.
“이게 뭐니. 반지?”
“고딘 거예요.”
무심히 움직이는 숟가락 너머로 너무나 큰 이름이 들려왔다.
“고딘?”
블라드의 말에 당황했는지 주머니를 여는 마르셀라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무서운 것일 수도.
아직도 장미의 미소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푸른 달빛은 마르셀라에게 있어서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제가 죽이지는 못했는데 어쨌거나 죽긴 했거든요.”
블라드가 건네준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것은 반지였다.
정확히 편지를 봉인할 때 쓰는 인장 반지였고 그 반지에는 가이다르의 상징인 독수리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건 마르셀라 거에요.”
“······그래.”
승자가 아닌 패자였기에 온전한 것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래도 훌륭한 전리품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건만 블라드는 고딘의 반지를 마르셀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블라드에게서 반지를 받아든 마르셀라는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사이로 수없이 지나가는 것은 아마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그때의 고통일 것이다.
“에잇!”
“큽!”
그러나 마르셀라는 그 반지를 원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화로 위로 던져진 반지를 보며 블라드는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내고 말았다.
“마르셀라?”
“뭘로 만든 거야. 반지인데도 잘 타네.”
화로 위에서는 새빨갛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고딘의 반지.
그러나 당황하는 블라드와는 달리 마르셀라의 얼굴에는 어느새 언제나와 같은 미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가끔 남자들을 보면 여자들보다 더 감상적이란 말이야.”
“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수가 아닌 시간일 것이다.
마르셀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고딘의 반지를 화로 위로 던져버렸다.
이 반지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닌 자꾸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였을 뿐이니까.
“나 생각해서 가져온 게 대견하긴 한데 이제 나한테는 이런 거 필요 없어.”
블라드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마르셀라는 블라드를 위해 과거의 반지를 던져버리고는 오늘의 요리를 꺼내놓을 뿐이었다.
“너도 이제 필요 없지?”
“······네.”
포크를 집어 든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마르셀라를 보며 희미하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쇼아라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그녀의 삶에서는 배울만한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러게요. 이제는 필요 없겠어요.”
타들어 가는 반지가 데우는 솥 위에는 오랜만에 보는 마르셀라의 요리가 담겨있었다.
으깬 감자와 구운 소시지, 그리고 소의 피로 만든 블랙 푸딩까지.
모두가 호르헤가 좋아했던 메뉴들이었다.
※※※※
“점심은 잘 먹었어?”
“같이 와서 먹지 그랬어.”
밖으로 나서려 1층으로 내려온 블라드의 옆으로 하벤이 달라붙어 왔다.
머리에 쓰고 있는 선장모는 멋들어지게 바뀌었지만 짚고 있는 지팡이만큼은 여전히 허접한 채로.
“모자도 새로 산 김에 지팡이도 바꾸지 그랬어.”
“이거? 이걸 내가 왜 바꿔.”
하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과장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도 오래 써서인지 반딱거리는 지팡이에는 광까지 비쳐 보일 정도였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덕 많이 봤거든. 네가 만들어 준 거라고 하니까 거친 바다 놈들도 말을 잘 듣더라.”
“그래?”
북부의 신성. 쇼아라의 블라드.
오랫동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바예지드의 젊은 기사 중 가장 빛나는 존재이며 눈엣가시처럼 도발하던 서부를 꿰뚫어버린 남자.
동향에 대한 자부심과 다음 세대에 대한 안심까지도 모두 책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블라드였다.
“그리고 요즘에는 네 이름 뒤에 엘프라는 단어도 붙고 있더라. 진짜 엘프들이랑도 아는 사이야?”
“비켜봐. 나 교회 가야 해.”
하벤의 말이 괜히 쑥스러웠던 블라드는 서둘러 장미의 미소를 나서기 시작했다.
늦장을 부린 탓인지 쇼아라의 뒷골목 사이로 노을이 감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쇼아라의 노을.
지는 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하루의 끝이겠지만 뒷골목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떠오르는 하루의 해와도 같은 것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그래.”
“오늘부터.”
그동안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은 자의에 의한 판단은 아니었다.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에 가지 못한 것이었지.
신은 영광된 존재였으나 그에게 향하는 길은 뒷골목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먼 길이었다.
“······쟤는 뭐 저리 바뻐.”
한참 밖으로 나서려던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장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으나 무언가 달라진 것만 같은 소년의 둥지.
그 둥지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제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애들은 빨리 크지?”
“쟤 나랑 동갑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멀리서 바라본 제미나의 모습은 꾀죄죄했던 예전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낯설기도 했지만, 적잖이 안심되는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배는 괜찮아?”
“작아서 그런지 별 탈이 없네.”
“아니, 제미나 말고.”
“그래. 제미나 말이야.”
서로가 다른 제미나를 말하며 낄낄대기 시작하는 블라드와 하벤.
이제야 조금은 제 모습은 같아 보이는 블라드를 보며 하벤은 선장모를 바로 고쳐 썼다.
“그나저나 교회 가는 거면 나도 좀 데려가 주지.”
“네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그래.”
“사실 네가 안 데려다줘도 상관은 없어.”
“응?”
블라드는 하벤의 고갯짓을 따라 뒷골목 중에서도 작고 초라한 구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해가 들지 않는 거리.
어두운 밤 속에서부터 조심스레 빛을 밝히는 것들이 있었다.
“저번 주교는 소아성애를 금지했었는데 이번 주교님은 뭘 금지한 줄 알아?”
“······뭔데?”
서서히 지는 땅거미 사이로 천천히 뒷골목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 조심스레 기어 나온 것들이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별 금지.”
어린아이들이었다.
여태껏 빛을 피해 숨어 있던 뒷골목의 아이들이 조금씩 블라드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쟤네 지금 다 교회 가는 거야. 이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거든.”
교회로 향하던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뒤로 죽 늘어선 아이들의 행렬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두가 굶주리고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교회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만큼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언제 또 쇼아라의 블라드 같은 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시잖아.”
“······.”
가능성 있는 어린 것들은 어디서라도 존재할 수 있다.
쇼아라의 블라드가 그것을 증명했으므로.
그렇기에 가장 가까이서 그 광경을 지켜본 사제 안드레아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교회 간다며. 안 가?”
“······가야지.”
해가 진 뒷골목 사이사이로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뒷골목에 번져가는 어둠 사이로 자그마한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별들이 향하는 곳은 쇼아라의 교회.
아마 오늘 이 아이들은 겨울날의 블라드가 그랬던 것처럼 신실한 사제에게서 따뜻한 저녁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끝과 시작 (2)
밤이 되자 골목 곳곳에서 희미한 등불이 피어올랐다.
해가 져야만 빛을 밝히는 쇼아라의 뒷골목.
그러나 요즘만큼은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불야성을 이루는 중이었다.
-여기 술 한 잔 더!
-소시지 한 번 기가 막히는구먼.
뒷골목 곳곳에서 요란한 사내들의 함성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으나 쇼아라로 복귀한 이들은 승리자였고 각자의 주머니에는 짤랑거리는 금화 몇 개씩은 담겨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들 돈 많이 벌어왔나 봐?”
“이기긴 했으니까.”
한창 바쁜 시간이었으나 제미나는 블라드와 함께 4층에서 로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술꾼들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는 종업원들이 보였으나 이미 진이 빠져버린 제미나에게는 잠깐의 휴식이라도 필요했다.
“너도 돈 많이 벌어왔어?”
“기사는 연말에 한 번에 받아. 성과급이라.”
저 아래 있는 로비에서 몇몇 병사들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술잔을 높게 치켜들기 시작했다.
뒷골목의 많은 가게 중 특히나 장미의 미소가 붐비는 이유에는 분명 블라드라는 존재가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 표정이 썩었어. 교회 다녀온 다음부터 영 그러네?”
“마르셀라는 어디 있어? 그러고 보니까 안 보이네?”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제미나를 피해 블라드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걸쳐 가장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소녀 앞에서는 도무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르셀라는 요즘 가게에 잘 안 나와.”
다행히 제미나의 시선을 돌리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또 다른 고민이었다.
“왜? 어디 아프기라도 해?”
“아픈 건 아닌데······.”
내 말 좀 들어보라는 듯 블라드 옆으로 다가온 제미나는 까치발을 들고는 난간에 양팔을 얹어놓았다.
“이제 은퇴하고 싶대. 그럴 나이도 됐다 그러고.”
“······아아. 그래.”
제미나의 고민을 들은 블라드는 손에 있던 술잔을 기울이며 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직 은퇴할만한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블라드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그동안 그녀가 겪은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퇴는 모르겠으나 분명 쉴 때가 되긴 되었다.
“그럼 여기는 어쩌고?”
“······.”
블라드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으나 정작 기대했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제미나는 그저 난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가만히 블라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사람이 물어보는데 대답을······.”
“나는 어때?”
북적이는 가게, 시끄럽게 떠드는 취객들.
그러나 블라드의 귀에 와닿는 것은 고요한 그녀의 질문일 뿐.
“나는 어때 보여? 할 수 있을 것 같아?”
블라드를 올려다보는 제미나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간절했다.
많은 것을 빼먹은 채 물어보는 제미나였으나 조금씩 흔들리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말해 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할 수 있지 그럼.”
진창 위에 서서 하염없이 검을 바라보던 소년의 옆에는 언제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평생 모으지도 못할 5골드나 되는 검이었지만 그까짓 검 따위 자신이 사주겠다고 말해주었던 소녀였다.
“마르셀라에 비해 이것저것 작기는 하지만 너 정도면 충분하지.”“······야. 미쳤냐.”
길길이 날뛰려 준비하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역시 고민하는 제미나보다는 움직이는 제미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받았으니 돌려줘야 한다.
나는 아직 장식 없는 검의 대가를 그녀에게 지불하지 못했으므로.
그날 소녀에게 받았던 용기와 위안을 블라드는 이제부터 돌려주기로 했다.
※※※※
어젯밤, 밤의 물결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다다른 블라드와 하벤은 곧 마중 나온 사제의 안내를 따라 안드레아가 있는 주교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얼마나 닦았는지 바닥이 얼굴까지 비쳐보이네.”
“제발 촌티 나게 두리번거리지 마. 하벤.”
정작 하벤에게 조용히 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걷는 블라드의 발걸음 또한 긴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에 왔던 경험은 살벌했던 재판을 위해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기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응?”
그렇게 이름 모를 사제의 안내를 따 안쪽까지 다다르자 그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낯익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아아. 부제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나요.”
나이는 아마 샤를과 비슷해 보이는 소년.
아무리 높게 보아도 13살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소년은 언제나 안드레아를 따라다녔었던 어린 부제였다.
“반갑습니다. 부제님이 알려주신 기도문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오. 그 기도문은 그럴 때 외우는 게 아닌데요.”
바르나의 교회에서 처음 기도를 하는 블라드를 도왔던 것은 지금의 부제였다.
처음 신 앞에 무릎 꿇었던 그때를 블라드는 잊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기도문이라는 건 여러 개를 외워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진심만 담겨 있다면 신께서는 알아주실 테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제님.”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성숙해진 부제는 어느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의 실책을 감싸주었다.
뒤에서 비웃고 있는 하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블라드는 오랜만에 마주한 인연을 보며 참기로 했다.
“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오. 주교님이.”
주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하벤이 재빨리 선장모를 벗고는 손질하기 시작했다.
뒷골목 출신 주제에 높디높은 도시의 주교를 만난다니.
아마 하벤에게 있어서는 배를 처음 가졌을 때만큼이나 감격스러운 순간일 것이다.
“어때. 뭐 묻은 것 없지.”
“······차라리 뭐라도 묻었으면 닦아내기라도 할 텐데 말이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재빨리 서로의 복장을 확인한 둘은 부제의 인도에 따라 주교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똑똑-
“주교님. 블라드 경이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마주한 주교실을 보며 블라드와 하벤은 동시에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낯선 건물에서 길을 확인하는 것은 뒷골목 출신들의 버릇 같은 것.
그러나 어린 부제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고개를 까닥이는 앵무새 같다 생각하며 웃을 뿐이었다.
“들어오시게! 기사 블라드!”
“들어가시죠.”
자신을 힘껏 환영하는 안드레아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손잡이를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린 그곳에서는 성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블라드를 향해 손짓하는 안드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저녁은 들었는가.”
“먹었지만 또 먹을 수 있습니다.”
“하하! 하긴 한창때이니.”
블라드를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시선이 넉넉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주교 안드레아는 블라드를 보증하고 있었으나 어느새 자라버린 청년은 이제는 도리어 안드레아의 명예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어 있었으니까.
“여기는?”
“하벤입니다. 자그마한 배를 몰고 있습니다. 주교님.”
블라드에게 배워서인지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인사였으나 하벤을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절뚝거리는 다리 옆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지팡이였으나 하벤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선장이라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파도와도 같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셨군. 대단하시네.”
“아닙니다. 주교님.”
장애를 가졌음에도 바다를 누비는 뒷골목의 청년을 보며 안드레아의 얼굴에는 또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쇼아라의 뒷골목을 후원해보겠다는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다들 앉지.”
주교답지 않게 직접 손님들을 테이블로 안내한 안드레아는 익숙한 손길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린 부제 또한 그를 돕는 움직임이 능숙해 보였다.
“시끄럽군요.”
“아직 급식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아서 말이야. 급한대로 교회 건물을 쓰고 있다네.”
한 모금의 차와 함께 긴장을 넘기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 아무래도 자신들과 함께 교회에 도착한 뒷골목의 아이들인 듯싶었다.
“안 그래도 제가 이 일에 관심이 있어 자그마한 기부를 하고 싶은데······.”
“오. 오. 안 그래도 되네. 요즘은 기부금이 꽤 많이 들어오거든.”
블라드의 주머니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안드레아는 손을 내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블라드에게 담요까지 받았다는 아이들의 말이 있었으니 아마 이미 이래저래 돈을 썼을 것이다.
“새로운 주교가 왔으니 다들 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사실 이런 게 싫어서 주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일세.”
누구에게는 귀중한 목적이었으나 신실한 사제에게는 그저 귀찮은 짐일 뿐.
도시의 유력자들이 보내는 기부금을 진심으로 귀찮다고 말하는 안드레아를 보며 하벤은 들고 왔던 금화 주머니를 재빨리 속으로 감췄다.
“혹시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블라드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안드레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보아왔던 블라드는 돌려 말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내였다.
“북부정교회······는 사실 산 로지노에서 시작한 것이지. 자네도 그것은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북부정교회는 북부 교구 산 로지노에서 비롯된 종파였다.
북부에 대한 차별은 영역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교황청과 산 로지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도 쥐꼬리만 하긴 했지만 그래도 교황청에서 보내주는 지원들이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제는.”
“다 끊겼군요.”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말처럼 단순히 돈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북부정교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인재였다.
“부탁을 하고 싶었네만 의외로 기사 중에서는 신실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네. 당장 이곳 쇼아라에서도 자네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하고.”
신실하다는 말과 함께 블라드의 가슴팍을 가리킨 안드레아.
그곳에는 산 로지노가 인정한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요제프님에게도 허락은 받아두었네. 잠시동안 내가 자네를 써도 되겠냐고 말이지.”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쇼아라의 블라드는 주교님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요.”
안드레아는 명망 높은 사제였으나 그가 가진 능력의 특성상, 이단심문관이나 성기사같은 특수한 직위에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 인연이 없었다.
다시 말해 무력을 사용하는 일에서는 바예지드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해 줄줄 알았지.”
블라드의 시원스러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안드레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아무것도 모르는 하벤 또한 같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따라가려 하는 그의 노력이 가상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일을.”
“일단 쇼아라 안에서도 부탁할 일이 있기도 하지만.”
안드레아는 이미 블라드의 사용처를 정해놓았다는 듯 곧장 자신의 어린 부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을 좀 도와주었으면 해서 말이지.”
“부제님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안드레아의 말에 블라드는 천천히 다기를 정리하고 있는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부제에서 정식 사제가 되어야 하는 시기라서 말일세. 그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만 하거든.”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만큼 안드레아는 자신의 어린 부제를 아끼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데려와 키우다시피 하였으니 사실상 자식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시험입니까?”
“그럴걸세. 시험이라는 것이 앉아서 종이에 끄적거리는 그런 시험이 아니거든.”
교회에서 말하는 시험이라는 것은 곧 시련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었다.
안드레아가 평생을 몬스터 퇴치에 힘써왔던 것처럼 진실된 사제들은 신의 뜻을 설파하기 위해 자신만의 시련을 찾아 떠나고는 했었다.
“이 아이를 우트만 남작령으로 보낼 생각일세. 비록 교황청이 그곳에 있던 사특한 존재들을 해치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어둠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우트만 남작령.”
우트만 남작령과 사특한 존재.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들은 블라드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죠.”
“그렇지. 그때 자네도 들었지 않았는가.”
안드레아의 말처럼 블라드는 분명 들었었다.
한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던 어린 부제의 찬송가를.
목이 쉬어라 외쳤던 그때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요제프는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허허. 얼굴 좀 피시게. 지금 당장 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 데다 이제는 그렇게 위험한 곳도 아닐 테니.”
“네?”
안드레아의 느슨한 핀잔에 블라드는 재빨리 옆에 있던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잔뜩 찌푸려져 있는 눈썹과 굳은 표정.
방금까지만 해도 어린 부제를 향해 있었을 그 표정은 분명 신녀의 그림에서 보았던 표정과 닮아있었다.
끝과 시작 (3)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을 맞으며 서로를 마주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넓고도 화려한 방이었으나 둘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달칵거리는 찻잔 소리뿐.
그런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저물어가는 노을보다 더 오래된 것만 같은 노인이었다.
“······5살짜리 황제라니, 그것도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방계의 아이를.”
찻잔을 든 그의 늙은 손가락이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하는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고 매서운 것.
“이 계승은 절대 인정할 수 없소이다. 사르누스 공작.”
노인의 얼굴이 깊은 주름들을 구기며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세월의 흔적만으로는 지울 수 없는 분노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아이가 남아있는 혈족 중 가장 프라우센에 가까운 것을 어찌하겠나.”
“그 아이가 가장 가까워지도록 만든 것이겠지.”
흘러가는 시간은 노인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으나 그만큼 날카로운 통찰력을 남겨주고 갔다.
공정공(宮廷公) 아르망.
공작의 작위 대신 위대한 성(姓)을 포기한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늙은 용이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400년이라는 세월을 가만히 참고 있었으니 오죽 답답하셨겠소. 사르누스 공작.”
“······.”
4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아있던 용들로부터 제국을 지켜왔던 용살기사단의 주인.
그 긴 시간을 넘어 이제야 속내를 드러낸 푸른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사르누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건국왕 프라우센과의 맹약에 따라 지금도 제국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다. 이 아이를 지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그 아이는 황제의 자격에 오를 자격이 없소.”
“자격이 없다 해도 어쩔 텐가. 프라우센의 대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건가?”
“······.”
아르망은 사르누스의 말에 감히 답할 말이 없었다.
프라우센의 대를 끊는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은 사르누스일 것이다.
400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그의 충성은 어디까지나 건국왕 프라우센과의 맹약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었으니까.
늙은 용과의 맹약과 더불어 그의 모든 유지를 받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의 직위에 오를 후계자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끝을 직감한 늙은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상 핏줄은 끊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의지뿐.
“······제국의 시작은 단 한 자루의 검 끝에서부터였소.”
거대했던 용의 발톱 아래에서도 별처럼 찬란히 떠오른 남자가 있었다.
키하노 프라우센.
사람들은 모든 종족의 명운을 담아 휘둘렀던 그를 가리켜 검들의 주인, 소드마스터라 불렀다.
“소드마스터의 의지라면. 그리고 그가 다뤘던 검의 선택이라면.”
프라우센이라는 성은 황실이 잇고 있었지만 키하노라는 이름을 잇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일 것이다.
그 남자가 든 검은 가장 완벽했던 용을 갈랐고 시대의 끝을 그었으니까.
“그것이라면 당신이 내세우는 저 빈약한 핏줄보다야 더 나을 테지.”
“······아르망. 이러지 마시게.”
희미해진 전설을 쫓는 늙은이를 보며 사르누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끝을 알리지 않았기에 전설이 되어버린 건국왕의 이야기는 이제는 어린아이들이나 믿는 동화와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수백 년을 찾았어도 찾지 못한 검일 진데······”
“아무리 오래되었다 할 지라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
소드마스터의 검을 말하는 아르망의 목소리에는 분명 기이한 확신 같은 것이 깃들어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용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외다.”
“······.”
이제는 소식이 끊겨버린 기사가 보낸 전보가 있었다.
비밀스러운 암호들로 적힌 그 짧은 전보에는 분명 적혀있었다.
아우슈린. 소드마스터의 검.
뽑히다.
그것이 전 헌병 대장 오귀스트가 보내온 마지막 전보였었다.
※※※※
뒷골목 어둠 끝에서 태어난 소년은 저물어가는 해를 좋아했다.
골목 너머 큰 길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끝이었지만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시작을 알리는 해였으니까.
블라드가 밤하늘의 별을 동경했던 것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랫소리가 좋지?”
“······그렇네요.”
창밖을 보던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말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케이드의 숨소리.
그리고 피와 고름들을 씻어내는 찰박거리는 물소리.
그 소리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어린 부제의 노랫소리가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블라드의 귓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요제프 님의 예측대로 조금만 늦었어도 후유증이 생길 뻔했군. 이 친구가 활을 다룬다고 했던가?”
“네.”
안드레아는 아마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케이드가 기사로서 활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말했다.
가이다르와의 전쟁은 데어마르뿐만 아니라 요제프의 기사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고, 지금 누워있는 케이드가 바로 그 증거였다.
“감사합니다. 주교님.”
“원래부터 해왔던 일이니 고마워할 건 없네. 본래 세속의 일은 관여치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긴 했지만······.”
안드레아의 착잡한 눈빛이 창밖에 걸려있는 검은색 조기(弔旗)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깃발들.
그 깃발들이 불러올 수많은 죽음을 직감했기에 신실한 사제는 이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주교직 같은 건 맡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제는 정치의 영역까지 신경 써야만 하는 안드레아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채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달랬던 소리. 찬송가였다.
“······본래 교황청과 틀어지지만 않았어도 저 녀석을 트라마슈 성가대에 보낼 예정이었네. 신의 목소리라던 그녀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영 안타깝게 되었지.”
“그런가요.”
딱히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안타까움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자신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어린 존재들은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 부제는 그 세계를 펼칠 수 있게 도와줄 적확한 스승이 없는 상태였다.
안드레아는 분명 훌륭한 사제였으나 어린 부제와 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훌륭하네요. 노래를 통해 사람을 치유한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허허. 이제 나의 위안은 자네와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저 녀석뿐이지.”
능력의 발현은 개인의 개성이겠으나 노래 속에 치유의 성질을 담은 것은 분명 안드레아의 지도 덕분일 것이다.
어린아이를 이끌어 준 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일 테다.
“저라는 존재도 주교님께 위안이 되나요?”
“······그럼 물론이지.”
안드레아는 왜인지 모르게 침울해져 있는 블라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황혼이 블라드의 얼굴을 짙게 감싸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는 분명 나의 위안이자 자랑이지. 분명 자네를 가르쳤던 모든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세.”
“그런가요?”
노을빛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던 블라드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비록 잠시 멈춰서 뒤돌아봤던 길에 확신하지 못할지라도, 앞서 있던 자들이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어두운 밤을 걷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어린 부제의 찬송가와 함께 짙게 깔리는 밤하늘.
이제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자부심이 되었다는 말에 밤하늘에 물든 블라드의 웃음이 밝게 빛났다.
목소리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밤 아래 어딘가.
하늘 위에 떠있는 별빛들조차 구름을 뚫지 못하는 밤, 아무도 모르는 숲길을 달리는 무리가 있었다.
분명 말을 몰고,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행렬이었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의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입니다.”
“······.”
빛 한점 없었기에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그보다 더 어두운 베일을 쓰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어 하는 듯이.
“명하신 대로 정령들의 핵(核)을 찾아다닌 도중 발견한 것입니다.”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녀의 손위로 빛나는 구슬 하나를 올려놓고는 눈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주 잠시 구름이 지나가자 그사이를 비집고 나온 달빛이 기사를 비추었다.
분명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목 위에는 달려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안내하세요.”
“네.”
기괴한 무리의 모습과는 다르게 여인의 목소리는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당장이라도 베일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고 싶을 정도의 영롱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린 명에 따라 숲속으로 진입한 기사들은 곧 여태껏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나무숲과는 달리 넓게 펼쳐져 있는 풀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썩어버린 나무 한 그루.
커다란 동체를 눕힌 채 쓰러져버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남긴 시체와도 같아 보였다.
“안쪽입니다.”
목 없는 기사의 인도에 따라 나무 밑동을 향해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텅 비어버린 나무의 안쪽이었다.
워낙 거대했기에 마치 거대한 공터 같아 보이는 그 안에는 짙은 구름 속에서도 비치는 한 줄기 별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죽었군요.”
비록 구름은 짙었으나 바늘이라도 찔러 낸 듯 새어 들어오고 있는 별빛 아래에는 이름 모를 남자의 시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쳤다는 듯 자그마한 바위 옆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시체.
그 시체를 확인한 여자는 흥미가 돋는다는 듯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천천히. 두둥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채로.
“죽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이미 죽어 있는 나무의 뿌리들이 남자의 시체를 떠받들 듯 받쳐주고 있었다.
마치 관이라도 만들어준 것만 같은 그 모양새에 여인은 지금 누워있는 시체가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체는 썩지 않았고.”
시체는 썩지 않았으나 쌓여있는 먼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두꺼웠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차가운 여인의 손끝에서부터 점점 흩어져가는 옷에서 보이는 것은 이제는 쓰지 않는 아주 오래된 황실의 문장.
“그리고 들고 있는 검은······.”
신비한 모습의 시체였으나 정작 들고 있는 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시체가 쥐고 있는 검보다도 그의 손끝이 담고 있는 강렬한 흔적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말았다.
“용의 피······?”
시체의 손끝을 통해 사내의 역사를 확인한 여인은 뛰지 않는 심장과는 달리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치 용의 심장이라도 쥐어 터트린듯한 그의 손끝에는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강렬한 용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사람은······.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아무도 찾지 않는 제국의 끝, 울창한 숲속.
정령이 머물고 있던 거대한 나무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시체 한 구가 있었다.
마치 지친 듯 쓰러져버린 그 시체의 손끝에는 분명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강한 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세상 모든 용을 죽였어도 갖지 못할 진하디진한 흔적이었다.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1)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소리가 들려온다.
강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룻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쇼아라의 부둣가 위, 마치 실로 꿰매기라도 한 듯 얼기설기 얽혀 있는 어느 건물 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저 담배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술병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꿀꺽거림 뿐이었다.
“자네를 이렇게 앞에 두니 시간 참 빨리 지나간다 싶군.”
술병 하나를 다 해치우고 나서야 입을 연 노인은 다 피워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대며 빙긋이 웃었다.
누렇게 변색된 치아와 흉측한 치열이 위협적으로 보였지만 정작 앞에 앉아 있는 블라드는 꿈쩍도 않고 있었다.
“사실 몰라도 되는 일이긴 하지만 원래 나도 자네를 데려오고 싶었어. 호르헤 녀석이 날름 채가긴 했지만 말이지.”
“······.”
옛일을 생각하는 노인의 눈빛이 아련해 보였다.
비록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 나오는 이야기가 본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가만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뒷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사람으로서 캡틴 후버라는 보스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셀라도 은퇴한다면서?”
“완벽한 은퇴는 아닐 겁니다. 보스처럼 늙은 것도 아니니.”
“하하! 그렇지. 아직 마르셀라 나이라면 한창이긴 하지.”
평범한 뒷골목의 소년이었다면 방금의 말로 날카로운 갈고리에 머리가 찍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치를 보는 자는 오히려 보스인 후버였고 블라드는 손님이었음에도 그의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스에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름발이인 하벤을 거둬주신 것에 대해서요.”
“그거야 그놈이 똘똘했으니까.”
“비록 구석에다 박아두기는 하셨지만 말이죠.”
“······.”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후버는 왼손에 있던 갈고리로 다시금 술병을 따고 말았다.
과연 쇼아라의 뒷골목이 낳은 최고의 재능.
이미 블라드는 자신 따위가 띄워주기에는 너무 무거워졌고 단단해져 있었다.
“변명은 아니네만 그 일 이외에는 마땅히 쓸 곳도 없었네.”
“압니다. 이해합니다.”
예전 뒷골목에는 다섯 명의 보스가 있었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기사는 한 명의 보스를 잃었고 두 명의 보스를 죽인 자였다.
쇼아라의 블라드는 반짝이는 금화도, 신이 내린 면죄부도 막지 못했던 기사였고 후버는 그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은퇴하고 싶네. 편안히, 안전하게.”
그리고 그렇기에 은퇴하기로 했다.
먹히기 전에, 혹은 그의 손에 죽기 전에.
“왜 그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아니라면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뒷골목의 역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복잡하고 쉴새 없이 움직여왔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본다면 결국 하나의 법칙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약육강식의 법칙일 것이다.
“쇼아라의 젊은 시장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아네.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니까.”
늙었기에 보이는 것이 있다.
늙은 선장은 오랫동안 바다를 누벼왔고, 몰아치는 폭풍에는 가만히 돛을 내린 채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디 말씀드려주게. 이 늙은이가 은퇴하고 싶어 한다고.”
“······많이 내려놓으셔야 할 겁니다. 요제프 님이 준비했던 만큼 보상을 하셔야 할 테니까요.”
딱히 끌리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블라드는 자신을 이곳까지 소개해 준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며 최대한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어쨌거나 빌어먹던 시절, 이 사람 덕분에 버틴 기간도 있었으니 나름의 답례이기도 한 셈이었다.
“······당연하지. 섭섭지 않게 준비하겠네.”
블라드의 대답을 들은 후버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크게 가슴을 쓸어내리고 말았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었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교수대에 목이 매달릴 뻔했다.
“부탁함세. 후회하지 않게 하겠네.”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지금 일어서고 있는 사내는 고귀한 핏줄, 요제프의 심복이자 쇼아라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잠깐만.”
“······?”
밖으로 나가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날아온 술병 하나를 잡아채었다.
무언가 불쾌한 빛이 나는 갈색빛의 술이었다.
“이건 뭡니까.”
“내 역작이지.”
새로이 담배를 꺼내든 캡틴 후버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무려 이름도 달아놓은 술이지. 캡틴Q라고. 사실 은퇴 후 소일거리로 양조장을 할까 했었거든.”
후버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그제야 지금 들고 있는 술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먹고 죽으려 해도 아무것도 없던 시절, 그야말로 정말 먹고 죽을뻔한 그 술이었다.
“······양조장은 꿈도 꾸지 마십쇼.”
블라드는 아직도 그날 밤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
“뭐야, 어떻게 됐어.”
“이거나 받아.”
조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부둣가를 나선 블라드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하벤을 보고는 재빨리 그에게 술병을 던져버렸다.
마치 그동안 독병이라도 들고 있었다는 듯 질린 표정과 함께.
“이게 뭐야?”
“뭐긴 뭐야. 그 지랄 같은 술이지.”
“아니, 그 영감이 아직도 이걸 만들고 있었어?”
하벤 또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술병을 받아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당장이라도 술병을 버리고 싶은 모양새였다.
“후버를 고용해. 빼먹을 건 빼먹어 놔.”
“응? 뭐?”
“그 사람 살리려면 그렇게 해야 할 거야.”
블라드는 무심한 듯 말하고 있었고 하벤은 모르는 듯 대답하고 있었으나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블라드와 호르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하벤과 후버는 한 울타리에 있던 사람이었고 뒷골목의 남자들은 이런 것에 민감하고는 했다.
하벤이 후버에게 블라드를 소개해준 것처럼 말이다.
“젊었을 적에는 바다에도 나간 적 있는 사람이라며, 항해술이니 밀수 루트니 이것저것 배워두라고. 안 그래도 바예지드가 요즘 바다 쪽에 관심이 많거든.”
“쉽게 알려줄까. 그게 그 사람 사업 밑천인데.”
“죽기 싫다면 알려주겠지.”
살려서 토해내나 죽여서 뺏어가나 어차피 후버의 모든 것은 요제프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러나 뒷골목의 보스라 해도 살려서 쓸만한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굳이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책잡힐 일 같은 거 하지 말고.”
“알았어.”
하벤은 갑작스레 바뀐 블라드의 분위기를 느끼며 웃음기를 지우고는 고개를 끄덕여댔다.
“한 번 쓸려나갈 시기이긴 하지. 지금이.”
“그래. 애들 관리 잘하고.”
늙은 선장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폭풍을 보았듯이 하벤 또한 흘러 지나가는 블라드의 말속에서 의미심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쇼아라의 시장이 바뀌었을 때도 나름의 변화가 일어났던 만큼 북부연합과 정교회가 나타난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더한 물갈이가 시작될 것이 뻔했으니까.
“하벤.”
“응?”
골목의 갈림길 앞.
블라드는 시청으로, 하벤은 장미의 미소로 향하기에 헤어져야 하는 길.
“이거 기회야. 온 거야 지금.”
“······.”
비록 블라드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기회라는 것은 뒷골목의 아이들에게 있어 꿈과 같은 일이었고 그것을 잡기 위해 둘은 쉼 없이 발버둥 쳐왔었다.
그리고 지금 둘 앞에는 새로이 변화하려는 쇼아라가 앞에 있었다.
“잘해보자.”
“그래.”
너는 큰길로, 나는 뒷골목으로.
비록 가는 길을 달랐지만 둘이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아마 그것은 멍석 하나로 서로를 감싸던 그 시절, 언젠가 하고 말겠다며 나누었던 그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
히이이이힝-
푸르르륵-
쇼아라의 시청 안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
말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검은 말과 녹색머리 소녀가 있는 곳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너도 다들 피해 다니는구나.”
푸르르륵-
샤를의 말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소리를 내는 누아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지랄 같은 성격의 누아르는 주위의 말들에게 근처에 다가오지 말라 경고하는 중일 뿐이었다.
“그래그래. 나도 그 심정 다 알지.”
그러나 어린 샤를은 아직 누아르의 성정을 알지 못했고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검은 말의 모습을 보며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사용인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한 누아르였으나 유독 샤를에게만은 관대했고 그 모습은 마치 제미나에게 보여주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비록 마음에 드는 빨간색은 아닐지라도 샤를의 머리카락 색이 고향의 초원을 떠올리게 해서일까?
“이게 다 그 애꾸눈 때문이야.”
누아르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샤를의 눈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고약한 기사.
그는 자신을 가르치던 블라드를 보자마자 머리통을 후려치고 발목을 갈긴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무어라도 배우고 있을 텐데.”
검술을 배우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블라드와 함께 있지 못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샤를의 분노는 오롯이 자야르를 향해 있었다.
애송이 주제에 애송이를 가르친다며 윽박질렀던 기사.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블라드와 함께 목검을 휘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수 없어 진짜.”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자격으로 있기에 뭐라 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이곳이 라브노마의 저택이었다면 크게 한번 쏘아 올렸을 것이다.
샤를은 그만큼 분했고 억울해하는 중이었다.
“야야야! 인마!”
“잉?”
그런 샤를에게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
“그래 너! 거기 쪼그만 놈!”
샤를은 혹시나 싶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으나 정작 그 모습을 본 사내의 표정은 더 험악해질 뿐이었다.
“너 이 자식. 그 말이 얼마나 귀한 말인데. 당장 안 나와!”
“잉? 엥?”
노예로 위장했던 시절이야 당연히 지금 같은 취급을 감내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쇼아라였고 샤를은 고귀한 귀족인 라브노마였다.
손님의 자격으로 있는 만큼 샤를은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뭔 사내자식이 뭔 잉? 엥? 이 지랄이야! 나오라고 인마!”
그러나 지금 윽박지르고 있는 사내도 충분히 이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여기가 네 자리야?”
“이야. 이 자식 어른한테 반말하는 것 보소. 싹수가 노란 게 아주 누구랑 똑같네 그냥.”
누구라도 겨우 차지한 자리가 위협받는다면 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라드의 말인 누아르를 관리하는 것은 여태껏 그의 몫이었으니까.
“헹. 그래도 꼴에 사내라고 목검까지 차고 있네. 네가 뭐 종자라도 되냐.”
“그래 나 종자야! 기사한테 검을 배우면 그게 종자지!”
그러나 가뜩이나 독이 올라있던 샤를은 전후 사정 관계없이 자신에게 윽박을 질러대는 턱이 긴 사내를 향해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사내가 방금 말 한대로 샤를 라브노마는 이미 사람도 죽여본 적 진짜배기 노란 싹수였다.
“기사 블라드의 종자가 바로 나야! 매일 그 사람한테 검을 배우니까!”
“뭐라고?”
당연히 종자도 아니었고 검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지만, 악에 받친 샤를은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이 충분한 유효타가 되었다는 듯 사내의 얼굴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네가 왜 블라드의 종자야!”
어디서 잔뜩 고초를 겪고 왔는지 옷차림이 남루한 사내.
억울한 듯 가슴을 쳐대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내가 블라드의 종자야 인마!”
길잡이이자 마구간지기, 블라드의 종자이며 사기꾼이기도 한 사내.
고트가 돌아왔다.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2)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것만 같은 거대한 협곡이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은 협곡의 끝은 하늘을 찌를 듯 사나웠으며 급격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양새는 지금이라도 황무지를 향해 덮쳐들 것만 같아 보였다.
“여기까지로군.”
메마른 흙먼지가 떠도는 황무지.
페테르는 입을 가린 천을 내리고는 가만히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협곡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두 눈 사이로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성문이 하나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올랑바르 관문이군요. 아버지.”
“그래.”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아들의 말에 페테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트거가 말했듯 좁다란 협곡을 가로막듯 서 있는 저 성문은 서부가 자랑하는 문턱 중 하나인 올랑바르 관문이었다.
교류가 별로 없던 북부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천혜의 요새는 협곡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서부로 향하는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과연 서부의 성벽이라더니 듣던 대로 쉽게 뚫을 수 없어 보입니다.”
루트거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저 앞에 있는 올랑바르 관문을 바라보았다.
뱀이 지나간 것처럼 좁고 구불거리는 협곡의 사이는 아주 오래된 옛날에는 강이 지나가던 자리라고 했었다.
아마 그때였다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메마른 황무지가 아닌 거대한 강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진군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페테르가 명을 내리자 협곡의 입구까지 다다른 수천의 병사들이 정연히 멈춰 섰다.
정확히 저 멀리 관문 위에서 꾸물거리는 병사들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점이었다.
“여기라면 충분하겠군.”
명령을 마친 페테르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자신들이 들어와 있는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앞에 자리 잡은 관문의 위치만큼은 못했지만, 이곳 또한 좁고 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요새라도 일단 짓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형이었다.
“연합군은?”
“이틀거리 뒤에서 내려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백작님.”
“좋다.”
조언자 라그무스의 보고를 들은 페테르는 올랑바르 관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듣던 대로 어떤 침입도 불허할 것만 같은 서부의 성문.
“······뚜껑을 덮기만 하면 이번 전쟁은 끝이로군.”
그러나 좁고 깊은 길목은 들어가려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오려는 자 또한 그사이를 꿰뚫고 나와야 했으니 자연이 만들어 준 불이익은 모두에게 동등할 것이다.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한다.”
“알겠습니다.”
페테르의 명에 수천의 바예지드 군이 협곡의 입구 안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앞에 있는 서부의 군세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페테르의 나지막한 말에 주위에 있던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가이다르였으나 끝은 바예지드가 낸다.
서부의 관문인 올랑바르 협곡을 봉쇄함으로써.
지금도 뒤에서 내려오고 있을 북부연합군은 강철공의 지시에 따라 협곡 입구에 요새를 설치하기 위해 오는 자들이었다.
이제부터 새롭게 지어질 요새는 서부를 틀어막음과 동시에 중부를 노리는 북부연합군의 최남단 전초기지가 될 예정이었다.
※※※※
햇볕이 비치는 오후의 쇼아라.
창을 넘어 들어오는 빛이 따스했지만 정작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고트는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 고트. 쇼아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햇빛을 등져서일까, 아니면 못 본새 눈그늘이 더 짙어진 탓일까.
고트를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감, 감사합니다.”
팽- 팽-
그러나 고트는 요제프의 어두운 얼굴이나 자야르가 보내는 살벌한 눈빛보다도 더 감당하기 힘든 것이 있었다.
“매듭이 이게 아닌가?”
“······.”
옆에서부터 들려오는 블라드의 밧줄 소리.
종자의 잘못은 곧 기사의 잘못이었고 그로 인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고만 블라드는 지금 옆에서 조용히 매듭을 짓는 중이었다.
성인 남성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블라드의 손끝에서 점점 불길한 매듭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교수대에서나 쓸 법한 그런······.
“그래.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잠시 밧줄에 정신이 팔려 있던 고트는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요제프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록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백작가의 자제를 모욕한 사람이었고 그에 대한 처분은 앞에 있는 요제프가 내리는 것이었으니까.
“중부에서부터 올라왔다고 들었다.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넵!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눈빛이 고트의 행색을 훑기 시작했다.
홀쭉 들어간 볼과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차림.
슬쩍 보기만 해도 그동안의 여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는 몇 달 전, 도시 마르시나에서 블라드 경과 헤어졌었습니다······.”
기억의 시작은 고트의 고향에서부터.
흙멧돼지 콜린과의 전투 이후로 다급하게 피난을 떠났던 고트는 결국 가족을 외면하지 못했기에 블라드와 헤어지고 말았었다.
“마르시나라면 나름대로 기반이 갖춰진 도시일 텐데.”
“그렇습니다. 분명 그러했는데.”
요제프의 말대로 도시 마르시나는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
비록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나 쉽게 점령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였고 그렇기에 블라드에게서 받은 돈으로 가족의 안전만 확보한다면 다시 쇼아라로 떠날 생각이었던 고트였다.
“지금 중부는 난리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전쟁이며 도적 떼의 약탈이며······.”
그러나 고트는 결국 가족들을 내려놓을 안전한 땅을 찾지 못했다.
마르시나가 함락당하기 직전, 겨우 도시를 빠져나온 고트와 가족들은 근처의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이라고는 곳곳에서 번지기 시작한 전쟁의 겁화(劫火)뿐이었다.
“그렇게나 심각한가?”
“말도 마십시오. 불이 나지 않은 도시가 귀할 정도로 중부는 지금 곳곳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트의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북부의 도시인 쇼아라까지 늙으신 어머니를 이끌고 왔겠는가.
깊이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트가 허튼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군.”
비록 까마귀가 보내오는 전보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바예지드의 주인인 아버지의 것이었고 요제프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들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으니, 요제프는 자신의 예상보다 중부의 상황이 훨씬 심각함을 인지할 수 있었다.
“잠깐 쉬었다 이따 저녁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자네가 걸어온 길을 지도에 상세히 표시해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고트의 말대로라면 황제의 죽음 이전부터 삐걱거리고 있던 중앙의 통제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죽은 지금이라면 더욱더 흔들리기 시작하겠지.
가뜩이나 정통성이 약한 황제를 내세우고 있었으니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귀족들에게는 지금만 한 호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나에게 오기 전에 샤를 양에게 먼저 사과를 받아와야 할 것이다. 블라드?”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명령에 자리에서 일어선 블라드는 혀를 차며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고트는 자신이 살아남았음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곧 블라드가 다른 모양으로 매듭을 짓고 있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끝을 뭉뚝하게 만들고 있는 그 매듭은 얼핏 보아도 채찍 같아 보이는 형상이었다.
※※※※
“으으으······.”
“엄살 좀 그만 부려.”
블라드는 닿지도 않는 등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고트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정도 자국은 있어야 봐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고트의 옷 위로 매섭게 가로지른 생채기 몇 개가 새겨져 있었다.
요제프는 샤를에게 사과를 받아오라 가볍게 말했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암만 봐도 영락없는 마구간지기였다니까.”
“매듭 바꿀까?”
“······왜 그러고 있었대. 도대체 왜?”
눈치 빠른 고트조차도 샤를의 겉모습만으로는 귀족인 것은커녕 여자아이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소녀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모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거기 가면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어라.”
“······알았어. 대장.”
풀죽은 고트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샤를의 유모인 마르타를 떠올렸다.
그녀는 화살에 꿰뚫렸던 상황에서도 자신보다는 샤를을 감쌌던 여인이었다.
비록 몰라서 한 일이기는 했으나 고트가 저지른 일은 엄연히 귀족을 모독한 행위였으니 아마 그녀의 분이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
“몇 대 더 때려놔야 하나?”
“······그럴까?”
블라드가 고트의 등짝을 보며 이 정도 상처면 그녀의 화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 저 밖에서부터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뭔 일 났나?”
“네 일이나 신경 쓰지.”
“아니, 다들 뛰어 들어오는 모양새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저기 좀 보라는 고트의 고갯짓에 블라드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고트의 말대로 경비병들이 시청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오는 사람,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매우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뭐야?”
지금 시간이라면 모든 경비병들이 도시를 순찰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시청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다급히 보고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는 뜻.
“이봐.”
“네? 넵 블라드 님!”
한참 복도를 뛰어가던 경비병은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경례를 취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그것이!”
숨은 잔뜩 차 있었으나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이 도시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기사는 블라드 뿐이었으니까.
“지금 강을, 강을 거슬러서 수상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상한 배?”
입으로는 수상한 배라 말하고 있었으나 두 손으로는 잔뜩 팔을 벌리고 있는 경비병이었다.
“엄청 커?”
“넵!”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엄청 큰 수상한 배.
헐떡이는 경비병 앞에서 기사와 종자가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
저게 뭐야!
내 평생 저런 배는 본 적이 없는데!
쇼아라의 경비병들이 부둣가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창대로 밀어내고 있었다.
다만 이미 그 안에 있던 뒷골목의 무리만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스!”
“······저게 뭐냐.”
뒷골목의 보스 캡틴 후버는 자신의 건물 가장 높은 곳에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를 보고 있었다.
수십 년을 바다 위에서 떠돌던 그로서도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저게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지?”
경험이 풍부한 후버는 알 수 있었다.
저 정도 크기의 배는 절대 강을 거슬러올 수 없음을.
쇼아라의 강은 넓었으나 수심은 얕았기에 저 정도 크기라면 배 밑바닥이 강바닥에 닿고 말 것이다.
이번 나사우 원정 때 나포해왔다던 두 척의 배가 아직도 바다에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물레방아?”
그러나 점점 위용을 드러내는 그 배를 보며 후버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바다를 누벼왔던 늙은 선장조차도 처음 보는 형태의 배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니다! 창을 거둬라!”
갑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자의 말과는 달리 지금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배는 누가 보아도 수상한 배였다.
돛을 접어놓았으나 움직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배.
그 기묘한 배의 양옆에는 지금도 물레방아들이 쉴 새 없이 물살을 밀어내는 중이었으니까.
“인간들의 영주. 요제프 바예지드를 불러다오! 우리는 그의 편지에 화답하기 위해 이곳 쇼아라에 왔다!”
몸집은 작았으나 옹골차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쇼아라의 부둣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뿔나팔을 목에 붙여놓은 듯 걸걸한 목소리가 쇼아라의 부둣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제프 바예지드가 없다면!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라도 불러다오!”
이제야 막 부둣가에 막 도착한 블라드는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자신을 찾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뭐야. 대장이 아는 사람이야?”
“저거······. 사람 아닌 것 같은데?”
고트의 물음에 블라드가 가늘게 눈을 뜨며 멀리 보자 곧 배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깃발에는 여태껏 보아왔던 문장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드워프 해방전선에서 왔다!”
망치가 모루를 내려치는 듯한 문양.
그것은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를 뜻하는 깃발이었다.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3)
난생처음 보는 배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쇼아라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타고 왔다는 이 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정세에 움츠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훈훈한 열기를 더해주는 참이었다.
“······멋진데.”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부둣가로 몰려드는 사람들.
그렇게 잔뜩 몰려든 사람들 속에는 하벤과 오타르도 있었다.
요동치는 인파의 흐름에 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마는 하벤이었으나 시선만큼은 배를 향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돛을 접었는데도 알아서 움직였다며?”
“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옆에 달린 물레방아 때문에 그런가?”
“흠.”
하벤은 흥분한 듯 쉼 없이 떠벌이고 있었지만 정작 대답해줘야 하는 오타르는 그럴만한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시선을 빼앗겨 버린 하벤을 대신해 그의 균형을 잡아줘야만 했으니까.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도 혼자서 움직이는 배라······.”
귓가를 쨍하니 울리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땅에 서 있었음에도 멀미가 날 것만 같은 인파의 흔들림.
그러나 지금의 하벤에게는 그저 눈앞에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드워프들의 배만 보일 뿐이었다.
흔들림 속에 있었어도 굳건한 그의 눈빛은 마치 진창 위에 서 있던 소년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것이었다.
“꼭. 한번 타보고 싶은데.”
원하지는 않았어도 두 발로 설 수 없기에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절름발이.
그러나 선망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으니.
하벤은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저 배가 그렇게나 가지고 싶었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하벤의 열망처럼 이름 모를 드워프들의 배 안에서부터 희미한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와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처음 왔을 때부터 보였던 연기라고 했었다.
※※※※
향긋한 냄새가 가득한 쇼아라의 시장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블라드조차도 비싼 차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향기였건만 정작 찻잔을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 보였다.
“흐음······. 풀 쪼가리 우린 물은 조금 그런데.”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니다벨리르의 시구르손이라 밝힌 드워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요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던 몇몇 드워프들도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차가 싫으시다면······. 술로 바꿔드릴까요?”
“술이 있었다면 진작에 꺼내주셨····· 어야지.”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구르손의 마지막 어조가 크게 올라가고 말았다.
“우리들의 관습상, 차를 내주는 것은 어서 꺼지라는 말과 같단 말이오. 물론 모르셨으니까 이러셨겠지만.”
“아아. 그러셨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서둘러 눈짓하는 요제프의 지시에 따라 블라드는 재빨리 장식장의 문을 열고는 요제프가 아끼던 술병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서부와는 달리 북부는 드워프들과 교류가 전혀 없었기에 지금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당황했소. 사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시구르손은 이제야 바뀐 술잔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간의 무지에 의한 실수로 굳이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보았소. 우리 족장님도 꽤나 기꺼워하시더군.”
“······그렇습니까.”
요제프는 시구르손의 말을 듣고는 찻잔을 들고는 희미한 미소를 가렸다.
기꺼워했다라.
그저 친선의 의미였을 뿐,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은 편지였건만 아무래도 드워프들 또한 북부연합을 통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편지와 함께 보내 준 선물도 보기 좋았고.”
“······?”
시구르손은 술잔을 들고는 옆에 서 있던 블라드를 향해 치켜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모두가 의아해하였으나 니다벨리르의 시구르손은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맙소. 쇼아라의 블라드. 우리의 아이들을 돌려보내 주어서.”
“아.”
찡긋거리는 시구르손의 눈을 보며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나사우에서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예로 팔려나갔던 드워프들이 돌려보내진 것은 처음이었소. 아마 그 일이 아니었다면 굳이 내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요.”
인간들의 기사가 드워프들에게 보낸 것은 단순한 편지 한 장이 아니었다.
술집으로 가장하고 있던 노예시장의 지하에는 전사 불카누뿐만 아니라 어린 드워프 아이들이 가득했었다.
철창 속에 갇혀 있던 그 아이들은 아마 블라드가 아니었다면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서부를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인간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사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보기로 했소.”
“그러셨군요.”
딱히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블라드의 행동은 드워프들에게 큰 호의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드워프들을 가축처럼 대했던 서부와는 달리 새로이 나사우를 점령했다던 북부의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보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니다벨리르를 구성하는 12개의 부족 중 하나의 부족을 맡고 있는 사람이오.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드워프들은 모두 이런 건가. 아니면 시구르손이라는 드워프가 특별한 것인가.
시원하게 술잔을 들이켜버린 시구르손은 가타부타 잴 것도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부를 조지고 싶소, 우리가 알아서 할 테지만 도움이 조금 필요하오.”
“어, 음. 그러시군요. 그럴 거라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귀족 간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던 요제프로서는 차마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대화 속도.
정중함과 무례함을 마음껏 넘나드는 드워프들의 화법에 요제프는 재빨리 찻잔에 위스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이다르 놈들이 특히나 개자식들이었지. 그쪽이 그놈들과 싸우고 있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소강상태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끝을 봐야겠죠.”
끝을 내겠다는 요제프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구르손 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드워프들조차도 손뼉을 쳐대기 시작했다.
점점 시장통같이 변해가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불안한 듯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고 자야르는 슬슬 안대를 만져대기 시작했다.
북부의 사람들은 아직 드워프들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나 다름없으니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겠군!”
마치 되었다는 듯 내미는 시구르손의 손을 보며 요제프는 실로 오랜만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건네지는 악수 한 번에 체결될 동맹에 대한 결의.
전폭적으로 협조하던 하이날조차 며칠에 걸렸을 일을 고작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끝내버리는 시구르손을 보며 요제프는 그저 내민 손을 맞잡을 뿐이었다.
“같이 하시죠. 바예지드와 북부연합은 니다벨리르를 환영합니다.”
“좋소!”
이렇게 빨리 진행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어쨌거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지르는 박수 소리조차 맞지 않던 드워프들은 이제야 끝났냐는 듯 요제프의 장식장 안에 있는 술병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이제야 막 불을 밝힌 장미의 미소.
그러나 다급히 뛰어왔던 고트는 오늘 가게를 비우라 말했었다.
로비에서부터 손님들을 재울 객실까지 전부.
“시청이 털렸어.”
“뭐?”
“오늘 술 많아?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야 할 거야.”
혹시 무언가 일이 생겼는가 싶어 초조하게 블라드를 기다리던 제미나는 곧 그의 뒤에서부터 엉망진창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작은 사내들을 보았다.
키는 블라드의 가슴팍에 겨우 닿을 정도였지만, 어깨만큼은 옹골차게 넓은 사람들.
게다가 모두 하나같이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은 분명 여태껏 북부에서 본 적 없던 복색과 행태였다.
“혹시 저 사람들······.”
“맞아. 드워프야.”
블라드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제미나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고기를 좋아한대. 생선보다는 육류. 술은 센 것일수록 좋고.”
“응, 응.”
마주하는 블라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초팔이였던 시절, 오늘 진상이 들어왔다고 말하던 그때의 눈빛과도 같아 보였다.
“그리고 채소 같은 건 내놓지 마. 감자는 괜찮대.”
“알았어.”
주량은 셌으나 체력은 약했던 요제프는 진작에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았고 아직도 술에 고픈 드워프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뒷골목에 있는 술집들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격식과 함께 규모를 갖추고 있던 곳은 오직 장미의 미소뿐이었으니 블라드가 이곳으로 드워프들을 몰고 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네 맞습니다. 제가 블라드입니다.”
“명예로운 아이들의 구출자! 자네가 아이들이 도착했던 그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네네. 봤으면 좋았겠지요.”
블라드가 마치 종업원처럼 능숙하게 드워프들을 집어넣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놓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기에 간단히 데워놓은 소시지들이 먼저 올라갔으나 그것만으로도 드워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북부 사람들은 손님 대접을 할 줄 아는구만! 아주 좋아!”
“소시지 냄새 한 번 기가 막히네!”
기본적인 안주만으로 만족한 드워프들은 각자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돋우기 시작했다.
뒤늦게 시구르손을 대접하기 위해 온 보르단조차도 쉽사리 끼어 들어가기 힘든 그런 흥겨움이었다.
“이해해주게. 다들 오랜 항해로 지쳐 있었거든.”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드워프 해방전선인 니다벨리르는 어느 섬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했다.
비밀스러운 위치에 있는 그곳에서부터 이곳 쇼아라까지 거슬러 올라왔으니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식사에 다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 편지 한 장이었는데도요.”
“서로의 때와 필요가 맞은 것이지. 별 건 아니야.”
시구르손은 블라드의 말에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있었으나 분명 파격적인 행보임은 맞을 것이다.
아무리 아이들을 구출해주었다 할지라도 그 큰배를 이끌고 굳이 이곳까지 와주었으니까.
아마 니다벨리르와의 인연은 가주 경쟁 중인 요제프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 근처에 대장간이 있다면서? 오늘이야 힘들겠지만 내일 한 번 자네 갑옷을 봐주도록 하지.”
“아니, 괜찮은데······.”
시구르손이 굳이 이곳 쇼아라까지 온 직접 이유는 요제프의 편지에 화답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블라드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호의를 호의로 갚는 행위는 드워프들의 전통이기도 했던데다 블라드라는 상징을 통해 북부연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사양하지 말지. 애초에 서부놈들이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이유가 다 손재주 때문인데.”
아무리 교류가 없었더라도 드워프들의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서부의 기병대가 유명한 것도 가볍고도 단단한 드워프제 갑옷과 창들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비록 야금술이 전문은 아니지만 엔간한 인간들보다는 나을 거야. 그러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말고······.”
그러나 막상 블라드를 마주한 시구르손은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블라드의 갑옷을 한번 벗겨보고 싶어 했다.
여기저기 우그러져 있었으나 훌륭하게 다듬어진 마감.
게다가 슬쩍 보아도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마련한 장치들이 그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장인의 솜씨였다.
“내친김에 검도 한 번 봐주지. 기사들에게 있어 검의 상태는 곧 생명과 직결되는 것 아닌가.”
“······.”
여기서 한 번 보겠다는 듯 눈짓을 보내는 시구르손.
무언가 번들거리기 시작하는 그의 눈빛을 보며 블라드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워프들에게 찻잔을 내미는 것처럼 기사에게 검을 뽑아보라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그래도 꼭 한번 보고 싶네. ”
결국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내뱉고만 시구르손이었으나 그것은 주위에 있던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인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그들은 블라드의 갑옷과 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치 재주를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나 앞에 있는 드워프들은 귀중한 손님.
멀리서 뽑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싶었던 블라드는 검집에서 슬쩍 검을 뽑아내었다.
“······.”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주 슬쩍 보여주는 블라드의 검에서부터는.
아른거리는 그 빛을 마주한 몇몇 드워프들은 그만 씹고 있던 소시지조차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점점 변해가는 드워프들의 눈빛에서 수상함을 감지한 블라드는 재빨리 검을 집어넣었으나 방금의 흥겹던 분위기는 전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제 검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비치는 빛에 이끌려 거의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한 시구르손은 아직도 멍한 눈빛으로 블라드의 검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히 사라진 푸른 빛 사이.
분명 시구르손은 그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반갑다는 듯 불을 뿜고 있던 어린 도마뱀을 보았었다.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4)
남자가 머금고 있는 붉은색이 진했다.
흔들리는 와인잔 안에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끈적임.
그러나 사르누스는 진한 만큼 무게 있는 목 넘김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아르망 공작이 뜻대로 움직여 주었군.”
떠오르는 아침 해 앞에서도 여유롭게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르누스.
기름을 먹여 단정히 뒤로 넘긴 금발과 유행을 타지 않는 고풍스러운 옷차림은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중부 곳곳에서 산발적인 영지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르망 공작 때문만이 아니라도 다들 그동안 쌓였던 게 많은 모양입니다.”
“너무 오래도록 묶어두기는 했지. 인간이란 본래 욕망을 따라가는 존재거늘.”
사르누스는 미르셰아의 보고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세웠던 기사는 언제까지나 하나일 줄 알았겠지만, 용이란 존재는 사실 모두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짓밟는 만큼 높아지고 먹어 치우는 만큼 커지니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평화로웠던 만큼 움츠리고 있었고 힘과 명분을 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잔에 물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넘치기 마련.
더 넓은 세계로의 확장은 서부만이 염원하던 목표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나처럼 할 테지.”
사르누스는 마지막 남아 있던 와인을 털어놓고는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 바라본 거울에는 고귀한 귀족 사르누스 드라굴리아의 모습뿐.
어둠 속에 숨어 쪼그라들어 있던 예전의 모습 따위는 지금의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 녀석은 순수하지 못하군.”
환하게 빛나는 금발 사이로 붉은색 새치가 하나 보였다.
그것을 발견한 사르누스는 찌푸리듯 웃으며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시원치 않았던 만큼 마지막까지 말썽이로군.
“우스운 꼴로 돌아오기는 했다만 그래도 우트만 남작령의 일은 잘 수행하고 왔으니 칭찬은 할 만했다.”
“······그렇습니까.”
무심히 뽑은 머리카락 하나.
금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머리카락은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이었다.
“북부에 있다던 아이는 좀 더 진했으면 좋겠군. 그 녀석도 이제는 거둘 때가 되었으니.”
뿌렸으니 이제는 거둘 때가 되었다.
저 먼 북부까지 가 굳이 진창 위에 심어두었던 나의 씨앗은 과연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비어 있는 와인잔과 뽑아 든 붉은 새치.
그것들이 새로이 채워질 때를 기다리며 늙은 용은 웃고 있었다.
※※※※
“흐음, 흐음.”
시구르손은 집중하고 있었으나 그의 옆에 서 있는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처음 보는 해괴한 외눈 안경을 쓴 시구르손이 자신의 검을 핥듯이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의해 낱낱이 벗겨지는 푸른 검을 보며 블라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을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는 것 같은데.”
광란의 밤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드워프들은 그렇게 좋아하던 술잔도 내던지고는 다들 시구르손 주위에 몰려있는 중이었다.
수염 긴 사내들끼리 바짝 붙어있는 모습이 영 우스웠지만, 그들이 보내는 눈빛만큼은 진중하고 신중했다.
“······불씨가 맞아.”
나지막이 선언하는 시구르손의 말에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두 손을 불끈 움켜쥐고 말았다.
온갖 아우성이 그들 사이에서 몰아치고 있었으나 다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것은 아마 검 위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어린 도마뱀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어린 정령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될 테니까.
“이 녀석을 어디서 데려왔다고 했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우슈린이라고.”
시구르손의 물음에 블라드는 자신의 검을 빼앗듯 가져와 버렸다.
외눈 안경 속 기이하게 커진 시구르손의 눈동자가 검 사이로 들어가는 어린 도마뱀을 안타깝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어린 정령이 있을 수 있지? 애초에 정령들은 가장 완벽한 용이 전부 다 먹어 치웠을 텐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세한 것은 엘프들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블라드는 뭐에라도 홀린 듯 점점 달라붙어 오는 사내들을 밀쳐대며 으르렁대었다.
사내들에게서 느껴지는 따끔한 수염의 감촉이 블라드의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중이었다.
“이거 만들어준 사람들이 엘프들이니까요. 진짜 달라붙지들 좀 마십시오!”
블라드가 기사에게는 지켜야 할 간격이 있다며 윽박지르자 드워프들은 그제야 혀를 쩝쩝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갔음에도 그들의 시선에는 미련이라는 두 글자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드워프들은 정령이라는 걸 처음 보나?’
엘프들의 장로 제로니모는 소드마스터는 드워프들에게 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드워프들은 어린 정령의 모습 하나에도 크게 기꺼워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소드마스터의 흔적은 그들에게 닿지 못한 것만 모양이었다.
양피지 기록 따위로 정령을 확인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엘프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내가 자네 갑옷을 한번 봐주고 싶은데 말이야.”
뜬금없는 갑옷 타령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라도 시구르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외눈 안경이 저절로 확대해버린 시구르손의 눈은 지금도 블라드의 검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 기회에 우리 배에 있는 장비들도 몇 개는 손보고 싶기도 하고 말일세.”
“······그거 진담이셨습니까?”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시구르손을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검을 내준 것은 불쾌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드워프들에게 장비를 점검받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 흔치 않을 것이다.
서부가 왜 그토록 드워프들을 유출시키지 않으려 애썼는지 이번에 한 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처에 비어 있는 대장간이 있긴 한데······.”
작고 초라하기는 했지만 블라드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쓰는 이가 없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간단한 작업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블라드는 다급히 자신의 옷깃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놀란 듯 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제미나가 있었다.
‘안돼. 거기는!’
얌전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나 제미나의 눈동자는 블라드에게 쉼 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래도 붉은 머리 소녀는 둘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대장간을 저 술꾼들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
“······저거 오래 갈 텐데.”
“어쩔 수 없잖아. 비어 있는 대장간이 그곳밖에 없는데.”
하벤은 지금도 입을 꾹 다문 채 테이블을 닦고 있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에게 속삭여대었다.
드워프들이 한숨 자야겠다고 올라간 후부터는 계속 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 좀 해주지.”
단순히 대장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던 블라드에게서 무심한 대답이 나오자 화가 난 것이겠지.
그동안은 무던히도 참고 있었지만, 장식 없는 검과 관련된 추억만큼은 제미나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어제부터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던 거 몰라?”
“화풀이를 나한테 하면 안 된다. 너희 싸움은 둘이 알아서 풀어야지.”
하벤은 능글맞게 웃으며 블라드의 질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방금의 말 대로 어제 장미의 미소는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하벤은 그들과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그들의 배를 단 한 번만이라도 타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뭣 좀 얻은 건 있고?”
“얻은 건 없는데 들은 건 좀 있지.”
알았음에도 굳이 들어왔고 눈치챘음에도 딱히 쫓아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둘은 한배를 타고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동의 이익이라는 것이 있었다.
“드워프들이 타고 온 배 말이지.”
“응.”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었다는 듯 목소리를 줄이는 하벤.
그런 하벤을 따라 귀를 기울인 블라드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드워프라는 존재만큼이나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쇼아라를 흔드는 화제 중 하나였고 배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블라드마저 시선을 빼앗길만한 물건이었다.
“거기 안에서 물을 데운다고 그러네.”
“뭐?”
그러나 잔뜩 기대하고 있었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영 황당한 것일 뿐.
물은 데운다.
그러면 물레방아가 돌아간다더라.
“그게 무슨 개소리지?”
“······그러게. 말하고 보니까 개소리네.”
머릿속에 있었을 때는 그럴싸했으니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영 이상한 말일 때가 있다.
하벤은 퍼뜩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물을 데우는 것과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 사이에는 참 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뭐 배 안에 목욕탕이라도 가져다 놨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게 수증기가······. 그다음에 뭐 어쨌다고 그러더라?”
기회를 마련해 주었건만 결국 헛술을 마시고 만 하벤을 보며 블라드는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뭐라도 하나 배에 관한 비밀을 알아냈으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켜. 시청에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내가, 내가 오늘까지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게. 할 수 있을 거야.”
“너 어제 드워프들이랑 후버가 만든 술까지 마셨어. 절대 기억 못 해.”
“······아.”
손대서는 안 될 술까지 마셔댔다는 블라드의 말에 하벤은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 번 마셔보았던 경험상, 블라드의 말처럼 어제의 일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나 간다.”
“으어.”
신음과도 같은 하벤의 말을 뒤로 한 블라드는 장미의 미소를 나서 시청으로 향했다.
어제 명했던 대접도 훌륭히 끝냈고 그들이 만족할만한 숙소도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요제프에게 보고하는 일뿐이었으니까.
“······한 번 보고 가야겠네.”
다만 조금은 길을 돌아서.
말이 나온 김에 블라드는 오랜만에 노인의 대장간을 한번 들렀다 가기로 했다.
거의 평생을 걸어왔던 길이었으나 밝은 대낮에 걷는 뒷골목은 영 어색할 뿐이었다.
밤과 낮이 보여주는 모습은 확연히 달랐으며 그것은 문이 닫혀 버린 낡은 대장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고향의 모습은 반가운 만큼 어색해졌다.
“누가 들어온 흔적은 없고.”
비어 있는 집이었으나 어느 부랑자 하나도 얼씬을 안 하는 집이기도 했다.
딱히 관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뒷골목에서 좀 굴러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블라드와 관련된 이곳을 함부로 침범하지는 못할 테니까.
“쿨럭쿨럭. 커윽.”
추웠던 겨울날과 같이 비틀 듯 열어낸 대장간의 문에는 그동안 쌓여있던 먼지가 수북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의자도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던 낡은 모루도.
그리고 언제나 불이 밝혀져 있던 자그마한 모루까지도.
“이 정도면 쓸 만은······ 한 건가?”
쌓인 먼지만큼이나 복잡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 블라드는 이곳을 드워프들에게 내어줘도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말 제미나의 말대로 추억의 한 장소로 남기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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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숨짓고 있는 블라드와는 다르게 어느새 검에서부터 고개를 삐죽 내민 어린 도마뱀은 두 눈을 반짝이는 중이었다.
비록 차갑게 식어있었으나 낯이 익은 고로.
세계수의 꽃 위에서 망설이던 어린 도마뱀은 분명 노인과 함께 불타올랐던 낡은 고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대장간 찾아달라고 했겠지.”
그동안 함께 검을 타고 왔었던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곳을 찾아 하나둘씩 떠났지만, 어린 도마뱀만큼은 마땅히 마음에 맞는 곳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작고 볼품없는 저 낡은 고로는 여태껏 보아왔던 어떤 장소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끼이이익-
조용히 닫히는 문틈 사이로 어린 씨앗 하나가 조용히 검에서 내려앉았다.
실룩이는 엉덩이가 고로 속으로 사라지자 방금까지만 해도 죽은 듯 침묵하고 있던 대장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어디와도 다를 것 없는 익숙한 밀밭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검은색 물감 한 방울이 더 해진듯한 모습이었다.
밀밭뿐만 아니라 이 영지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그렇게 느껴지는 그저 기분 탓일까.
“유스티아 님. 여기.”
“······.”
예전에는 산 로지노 소속이었으나 이제는 북부정교회의 소속이 된 성기사들.
그들은 지금 예전에는 우트만 남작령이라 불렸던 영지로 와 사특한 존재의 예후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다 썩어 버렸군요.”
“썩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 좀 보라는 듯 기사는 곧 손바닥 사이로 밀알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썩어 있는 밀들 사이에서도 그나마 제 빛깔을 가지고 있던 것들.
그러나 그 밀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들도 전부 쭉정이가 되어 있습니다.”
“······.”
유스티아는 손바닥 위에서부터 힘없이 흩날리는 밀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을 따라 힘없이 떠도는 부서진 밀알들.
“왜 여기만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상 최악의 가뭄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우트만 남작령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예년과 다름없이 평범한 수확량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곳의 밭들만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찍어낸 듯한 모습에 유스티아뿐만 아니라 다른 성기사들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더 깊이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유스티아 님.”
지금도 그들의 뒤에서는 올해의 농사를 망쳤다며 울고 있는 농민들이 있었다.
보호해 줄 영주도, 그렇다고 받아 줄 땅도 없는 그들에게 있어 시꺼멓게 죽어버린 밀밭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일 테다.
“······.”
그들을 바라보는 유스티아의 얇은 눈썹이 양미간 사이로 깊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북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우트만 남작령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돌아와야 할 자리 (1)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만 가득한 아침 시간.
일반 손님들을 몰아내서인지 조용해진 여관의 사이로 종업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냄새 좋네요. 마르셀라.”
“벌써 일어났니?”
블라드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종업원들만 쓸 수 있는 자그마한 바에 걸터앉았다.
예전에는 호르헤와 조직원들이 쓰던 곳이었고, 지금은 블라드와 하벤 일행이 주로 쓰는 이곳은 지금 향긋한 수프의 냄새가 가득 퍼지는 중이었다.
“하벤은요?”
“아침 일찍 나갔어. 드워프들을 안내해준다나 봐.”
“그래요?”
하벤은 기어이 드워프들의 배를 타볼 모양인 듯싶었다.
굳이 그럴 목적이 아니라 해도 드워프들과 친분을 쌓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블라드는 그러려니 하며 앞에 있던 수프 그릇을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요. 마르셀라.”
“그거 제미나가 만든 건데?”
“······.”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마르셀라를 보며 가만히 수저를 들 뿐이었다.
자그마한 바 안에서 굳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붉은 머리.
마치 자신과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굳이 돌아서 있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거야. 애초에 내가 내준 것도 아니잖아.”
“······내가 뭐.”
아니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던지 애써 돌아선 제미나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드워프들이 굳이 영감님의 대장간에서 하겠다고 직접 말했다니까. 나도 다른 대장간으로 시선 돌려보려고 노력했어.
”“······.”
어쩔 수 없는 일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상하지 않은 일은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블라드와 함께한 만큼 많은 추억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제미나가 가장 아끼는 기억은 바로 장식 없는 검과 관련된 것이었다.
장식 없는 검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블라드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드워프들이 쓰면 좋은 거잖아. 장미의 미소가 지금 주목받는 것처럼······.”
“아 몰라. 나는 말 잘 듣는 누아르한테나 가 봐야겠다.”
어차피 버려둘 것이라면 누구라도 쓰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장인이라 일컬어지는 드워프들이 쓰다 가는 것이니 나름 영광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제미나의 속마음은 여전히 복잡할 뿐이었다.
“쟤 왜 저래요.”
자신을 피하듯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정작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은 둘을 지켜보고 있는 마르셀라일 것이다.
“차라리 예전이었으면 둘이 한 방에라도 집어넣었지.”
“네?”
“아니야. 수프 식겠다. 어서 먹어.”
예전이었다면 한 방에 해결했을 일을 굳이 돌려서 말해야 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마르셀라는 생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 가니. 요즘 쇼아라에서 블라드 씨가 제일 바쁜 것 같아.”
“먼저 대장간에 들른 다음에 교회로 갈 생각이에요. 안드레아 님이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주교님이랑 부탁도 주고받는 사이야? 많이 컸네. 블라드.”
마르셀라는 수프를 떠먹는 블라드의 머리를 가만히 매만져주었다.
서로가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지금 보듯 블라드는 집중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제미나는 그런 블라드를 바라보며 무던히도 참아왔을 테니까.
“그런데 얼마나 냈어요?”
“뭐가?”
“기부금이요. 수녀원에다 낸 거요.”
한 그릇 더 달라 내미는 블라드의 손을 보며 마르셀라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때 수녀원에서 문도 안 열어줬다면서요.”
“······.”
언제나 아침은 가볍게 먹는 블라드였으나 오늘만큼은 힘쓸 일이 많다는 듯 도리어 그릇을 내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거기 있던 애들한테는 하루에 한 끼만 먹였다 그러더라고요.”
“······그래. 그랬다더라.”
제미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듯이 블라드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처음으로 수녀원에 갔던 날, 부푼 마음을 안고 만났었던 붉은 머리 소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다.
“그래서 오늘 수녀원에 가는 거니?”
“저 멍청한 계집애는 아무것도 몰라요.”
괜히 마르셀라에게 시근거리고만 블라드는 다시 가득 채워진 수프 그릇을 보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자기를 생각해주는데 돌아오는 것은 토라짐뿐이었으니 블라드의 입장에서도 억울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 오늘 잘하고 와.”
조금은 어긋나 있었으나 결국은 서로를 마주하는 둘을 보며 마르셀라는 그만 웃고 말았다.
역시 창관을 그만두기를 잘했다.
이런 광경은 예전의 더러웠던 장미의 미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니까.
한참 수프를 먹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마르셀라는 잘했다는 듯 다시 한번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
쌓여있는 서류의 높이만큼이나 깊게 내려앉아 있는 눈그늘.
그런 요제프를 바라보는 노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살인적인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좀 바쁘기는 하군요.”
요제프는 노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멋쩍다는 듯 웃었지만, 오히려 눈그늘의 짙음만 강조되어 보일 뿐.
요제프가 아무리 장성했다 할지라도 늙은이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바쁘셔도 건강은 챙기셔야 합니다. 도련님.”
“그래도 오랜만에 라문드 경을 마주하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고귀한 바예지드의 핏줄이자 쇼아라의 시장인 요제프를 도련님이라는 단어로 칭할 수 있는 사람.
은퇴한 바예지드의 기사 라문드는 홀쭉 볼이 들어가 있는 요제프를 보고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괜스레 자야르를 째려보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무슨 일이 있어 오신 겁니까.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제 신변에 딱히 급한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의 소임까지 다했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은퇴를 해낸 라문드는 그동안 바르나 근처에 있는 자신의 장원으로 돌아가 소일거리를 하는 중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라도 꿈꿔왔던 은퇴 생활을 하고 있던 라문드는 요제프의 말처럼 특별한 일이 없다면 굳이 이곳 쇼아라까지 찾아올 일은 없는 사람이었다.
“블라드 때문에 오셨습니까?”
“오. 물론 그 녀석을 보러 온 이유도 있지요.”
블라드의 이름을 들은 라문드가 기껍다는 듯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라문드에게 있어 가까운 도시는 바르나였으나 반가운 도시는 쇼아라였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블라드 때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온 김에 한 번 점검은 해볼 생각이지만 굳이 그 녀석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라문드가 이곳 쇼아라까지 찾아온 이유는 블라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라문드는 그 말과 함께 한 장의 종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서 구르기라도 한 듯 그 종이는 여기저기 더러워져 있었으나 그 안에 쓰여있는 문자만큼은 확실히 식별할 수 있게 보존되어 있었다.
“······교황청의 문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제프의 눈에는 종이에 쓰여 있는 글귀들보다도 그 밑에 찍혀져 있는 문양이 먼저 들어왔다.
북부정교회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교회의 문양.
북부 연합이 밀어내었던 교황청의 흔적이 지금 요제프의 눈앞에 있었다.
“요즘 마을이나 소규모 공동체 쪽에서부터 이런 종이들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저희 장원의 사용인들이야 글을 모르니 상관은 없었지만······.”
교묘하게도 위정자들의 눈을 피해 변두리부터 퍼지고 있던 교황청의 흔적.
글을 모르는 평범한 농민들에게는 큰 효과가 없었을 것이나 누구라도 하나 알아본다면 글에서 시작된 소문은 입을 통해 멀리 퍼지고 말 것이다.
종이 맨 아래쪽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아무리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문양이었으니까.
“······북부의 사람들은 들어라. 거짓된 이교의 출현으로 신이 분노하셨다.”
요제프는 라문드가 가져온 종이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그러나 한 번에 읽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것은 요제프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악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글씨체는 썼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려 넣었다 보는 게 맞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쓰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된 우상에 대한 신앙은 하나뿐인 그분을 크게 욕보이는 행위. 이미 우리의 눈에는 너희에게 화가 닥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담은 내용만은 확실한 것이었다.
얕은 수이자, 눈에 환히 보이는 의도였다.
누가 보아도 선동의 의도를 담은 종이였으나 요제프는 묘하게 이 종이에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이 닥칠 것이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시작은 경고였으나 끝은 저주.
거짓된 말을 따르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마지막 문구에 집무실 안에는 깊은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상당히 구체적이군요. 시간과 사건을 정확히 명시해놨어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기에는 무언가 이상합니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용도로 썼다면 차라리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도에 맞지 않게 종이 안의 문구가 너무나 구체적이라는 것.
“······이 말이 빗겨나간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올 텐데.”
요제프는 가만히 잔뜩 구겨져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조악하게 만들었으나 확신 어린 글귀.
이런 선동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었으나 교황청이라는 곳은 그리 녹록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요제프는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예언에 가까워 보이는 듯한 그 글귀는 계속해서 요제프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
이제는 차가운 기운마저 느껴지는 뒷골목의 어느 거리.
장미의 미소처럼 시끌벅적한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도 아닌 이 거리에는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 몇 채만 있을 뿐.
그러나 차갑던 거리 끝에서부터 모닥불 하나가 피어오른 것처럼 온기가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문을 닫고 있었던 낡은 대장간에서부터 시작된 온기였다.
까앙-! 깡-!
박자는 달랐으나 소리는 비슷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주황색의 불빛과 함께 대장간에서 퍼지는 망치 소리가 예전처럼 어두운 뒷골목 사이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가네.”
한참 내리치던 망치질을 멈춘 시구르손은 아직도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철괴 하나를 보고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이게 여기서 될 일인가?”
그의 혼잣말에 주위에 있던 드워프들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드워프들이 의아해할 법도 한 것이 주위 불빛을 매끈하게 반사하고 있는 철괴는 누가 보아도 상등품의 것이라 할 만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장인인 드워프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말이다.
“암만 봐도 말도 안 됩니다. 이건.”
“저 고로 가지고는 절대 안 되죠.”
“여기 있는 장비 가지고는 식칼 정도나 고치는 수준일 겁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구르손과 드워프들은 동시에 대장간 안에 있던 낡은 고로를 바라보았다.
----?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자 당황해하는 어린 도마뱀.
그러나 순진한 표정과는 다르게 지금 이 녀석은 시뻘건 쇳물 안에서 헤엄을 치는 중이었다.
마치 이 정도면 따끈하지라는 표정과 함께.
“불씨라는 게 있다고는 들었는데 본 건 처음이라.”
“이 중에서 처음 아닌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선장님.”
“그렇지, 그냥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니까.”
처참하게 무너져버렸기에 얼마 남지 못한 드워프들의 전승은 시구르손의 말처럼 그저 이야기처럼만 남아 떠돌고 있을 뿐.
떠올려야 할 자긍심도 지켜야 할 자부심도 희미해져 가는 드워프들의 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천히 꺼져가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가져가야 해.”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지고만 지금, 시구르손과 선원들의 앞에는 그 옛날 영광스러운 고로를 달궜다던 불씨 하나가 헤엄치고 있었다.
블라드라는 기사의 검을 타고 이곳까지 왔다는 어린 정령.
이제야 겨우 접한, 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두 세계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어?”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러나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서로가 통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기에 어린 도마뱀은 애타 보이는 드워프들의 눈빛을 보고는 그만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이게 또 필요한가 보네?
“아니야! 지금 토하지 마!”
구에에에엑-
사태를 짐작한 시구르손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지만 어린 도마뱀은 너무 신이 난 상황이었다.
맞닿은 경계를 통해 넓어지는 세계.
어린 불씨에게 있어 드워프라는 세계는 꼭 들어맞는 조각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 말고 모래 가져와! 모래!
여기 다 탄다! 안 돼!
으아아악! 그만 뱉어!
순도 높은 쇳물과 함께 터져 나오는 드워프들의 비명.
뜨거운 열기를 참지 못해 문을 박차고 나오는 드워프들을 보며 이제야 막 도착한 블라드는 그만 새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응?”
수리한다면서 가져간 갑옷을 받기 위해 대장간에 들른 블라드가 본 광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난다는 듯 불을 뿜어대는 어린 도마뱀과 타들어 가는 낡은 대장간.
그리고 비명을 질러대는 드워프들.
그러나 온기를 넘어 열기를 더해가는 대장간 안에서도 어린 도마뱀은 블라드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돌아와야 할 자리 (2)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선명하다.
“······.”
아무도 없는 수녀원의 커다란 예배실.
그곳에 홀로 서 있던 블라드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자신에게 와닿는 색색의 빛들을 움켜잡아보았다.
그러나 잡으려 했던 빛들은 공허하게 흩어질 뿐.
색유리를 통해 와닿은 빛들은 화려했으나 움켜쥔 손바닥 안에는 그저 작은 먼지들만이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라고.”
블라드는 햇빛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먼지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음 짓고 말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렇게 커다랗고 높아 보였건만.
“······.”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창가의 빛살조차 닿지 않는 저 끝에 오래된 수녀원의 문이 있었다.
추웠던 겨울날, 끝끝내 마르셀라를 안으로 들여 보내주지 않았던 문이기도 했다.
“겨우 저거 때문에.”
처녀는 안으로, 창녀는 밖으로.
순결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정결했던 창녀는 들어설 자격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이 아닌 그저 누군가가 세운 기준은 마르셀라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오직 마르셀라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닌 남이 평가하는 기준에 그렇게 평가되고 재단되어간다.
“암만 봐도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블라드는 그것이 싫었다.
뒷골목의 블라드였을 때도 쇼아라의 블라드였을 때도 블라드는 그저 블라드였을 뿐.
모두에게 자신처럼 안드레아가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수녀원의 문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쇼아라 성문 앞의 분위기는 후끈했다.
병사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맞부딪히는 창들의 소리.
그러나 그 소리 끝에는 누군가의 비명이 아닌 기뻐하는 함성이 들려오고 있어 가장 중심지에 있는 시청에까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정중히 고개 숙인 요제프의 앞으로 그와 닮은 얼굴의 남자가 걸어갔다.
겉보기에는 말끔한 차림이었으나 걸어왔던 여정의 거리를 짐작게 하는 먼지가 그의 어깨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나 또한 그렇다. 데어마르를 지킨 너의 공을 치하한다. 아들아.”
밖에서는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가득했지만, 이곳 쇼아라의 시장실 안의 분위기는 조용할 뿐이었다.
조언자 라그무스도, 요제프의 기사 자야르도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오직 두 부자(父子)가 나누는 눈빛만이 가득했다.
“건강은 괜찮으냐?”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으나 온통 검었을 그의 머리에는 이제 흰색이 더 많아 보였다.
페테르는 이제는 자신이 나아갈 길보다 남아 있을 자들이 따라올 길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였다.
“형님은 같이 안 왔습니까?”
“루트거는 새로이 만들어질 관문이 설치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결정해주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 전쟁은 짧았으나 강렬했고 자신의 아들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렇습니까.”
페테르는 점점 깊어지는 요제프의 눈빛을 보며 아들의 속내를 짐작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영민한 저 아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새로이 만들어질 서부의 요새는 북부연합이 내딛는 기념비적인 첫걸음이었으며 연합의 맹주인 강철공 티무르가 특별히 신경 쓰는 곳.
바예지드의 대표로서 요새에 남아 있을 루트거는 그곳에서 수많은 북부의 인사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입지 또한 같이 다지게 될 것이었다.
“드워프 해방 전선인 니다벨리르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쇼아라의 부둣가에는 그들이 타고 온······.”
“알고 있다.”
차가운 페테르의 말 끊음에 안쓰러운 눈그늘이 깊어졌다.
페테르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듯 요제프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훌륭했고.”
요제프는 분명 해야 할 일을 훌륭히 완수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빠짐없이 해내었다.
그러나 페테르는 온전히 기뻐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축하해 줄 수 없었다.
황량했던 서부의 바람을 맞이하며 그는 많은 고민을 해왔고 이제는 그에 대한 답을 요제프에게 해줄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사우는 어떻겠느냐.”
요제프의 한 발 뒤에 서 있던 자야르는 페테르의 말에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많은 설명을 생략한 말이었으나 흐르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것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곳은 쇼아라보다 따뜻하고 공기도 좋은 곳이지. 너의 약한 몸을 다스리는데도 분명 알맞을 곳일 거다.”
“······.”
바예지드를 대표하는 세 개의 도시. 스투르마, 바르나, 그리고 쇼아라.
그러나 페테르는 요제프로 하여금 이 세 개의 도시가 아닌 서부에서 얻어온 도시를 권하고 있었다.
나사우는 분명 훌륭한 도시였지만 바예지드의 역사와 전통이 함께하는 곳은 아니었다.
“······아버지.”
“나는 너에게 선택지를 주고 싶다. 아들아.”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며 바예지드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
페테르는 아직도 자신의 검에 꿰뚫렸던 형제들의 표정이 기억나는 것만 같았다.
“나사우의 총독(總督)직을 내어주마. 지금보다 더 많은 권한과 지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주직을 포기해라.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을 테니까.
“······여기가 끝입니까.”
“그래.”
요제프는 페테르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원하지는 않았으나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던 길고 길었던 시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시험을 위해 허접한 몸뚱이로 최선을 다했건만 나의 발버둥은 결국 여기까지였다.
시험은 끝났다.
결국,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은 내가 아닌 형이었다.
“너의 어미와도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그녀 또한 너의 안위만 확실할 수 있다면 이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동안 애써 억누르고 있던 깊은 패배감이 요제프의 온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마치 균열이 생긴 둑처럼 이성으로 억눌러놓았던 감정들이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결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난세이며 그런 난세를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강인한 군주가 필요할 테니까.
고작 수성 한 번에 고꾸라지고 마는 연약한 군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요제프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분은.
평생을 달려온 목표가 쓰러진 나의 기분은 도대체 누가 이해해 준단 말인가.
“이번 겨울이 지나면 짐을 꾸려 나사우로 가거라. 너의 어미도 함께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지만 결국은 일방적인 통보일 뿐인 페테르의 발언 속에서 요제프가 기어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절과 패배감,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억누르고 있던 요제프의 고개였다.
“제가 모자랐습니까?”
“······아니다.”
그러나 마주한 그의 눈빛 안에는 끈적이던 감정은 어느새 잠재워진 후였다.
루트거처럼 강인하지는 않았으나 요제프는 그동안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이때까지 살아왔었다.
“혹시라도 제가 아버지에게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아들이었습니까?”
“······아니다.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아이들은 큰다.
비록 부모가 정해놓은 방향과 한계와는 다를지라도.
다져졌기에 진득해진 요제프의 영혼은 페테르의 생각보다 끈질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죽겠습니다.”
부모라는 존재가 시작은 정해주었으나 끝을 정해줄 수는 없다.
내 인생은 오롯이 나의 것이고 그 끝을 정할 수 있는 것 또한 나일 테니까.
“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에 제 이름을 단 별 하나 정도는 새기고 죽고 싶습니다.”
“······.”
몸이 약해서, 재능이 모자라서.
할 수가 없었기에 그저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원하지 않는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 테니까.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저는 다음 대 바예지드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었으나 아무도 봐주지 않았던 요제프는 이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모두 불태워보기로 했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모두가 안 된다 할지라도 하고 싶었기에 가치 있는 일을 따라서.
※※※※
쾅---!
요란한 파격음이 쇼아라의 수녀원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찌나 커다랬던지 바닥이 들썩일 정도의 굉음이었다.
“저저저! 저런!”
커다란 소리에 놀라 뛰쳐 내려온 원장 수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찢어지라 뜨고 말았다.
아직도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수녀원의 예배실.
여기저기 흩날린 나무판자들이 엉망인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주교님! 아무리 제가 교황청을 따르는 사람이라 해도!”
“······허허.”
한참 원장실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안드레아도 소리에 놀라 따라 내려오고 말았다.
점점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수녀들과 그런 그녀들을 보며 초조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용병대장 슈테판.
그러나 정작 그 모든 시선을 받고 있는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왼쪽 눈을 감을 뿐이었다.
“문이 안 열렸더라고 하더라고요.”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으나 감은 눈 사이에서 흐르는 황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창녀인 사람한테 안 열리고, 없는 사람들한테도 안 열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도 안 열리고.”
고귀한 뜻에 의해 세워졌으나 쥐고 있는 자들의 기준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문.
그 기준의 얄팍함을 알아차린 블라드에게 있어 굳게 닫힌 수녀원의 문은 제거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한 번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네요.”
“······그래?”
옆에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악다구니를 쳐대는 원장 수녀가 있었지만, 주교 안드레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네! 어차피 새로 달아놓으려 했던 문이었지!”
광야를 떠돌던 그가 굳이 주교직을 맡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부술 생각이었다.
당신들이 만들어 놓았던 높은 문턱 따위, 사제였던 시절부터 진절머리나던 것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이곳은 힘쓸 사내들이 없으니 자네가 마지막까지 다 부숴주게!”
안드레아의 말대로 아직 덜렁거리고 있는 문짝이 있었다.
블라드는 오히려 신이 나 더 부수라 말하는 안드레아를 보며 놀랐지만, 허락도 받았으니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교님.”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블라드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비치는 색색의 유리들도 지울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빛.
비록 달을 넘지는 못했으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블라드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일격은 창녀를 위해서.
두 번째 일격은 소녀를 위해서.
그녀들 모두가 태어난 대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었다.
“······!”
고귀한 바예지드의 허락과 주교의 보증을 받은 기사의 일격이 쇼아라 가장 높은 언덕을 통해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아까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굉음에 이제는 저 밑에 있던 병사들까지도 놀라 수녀원을 바라보고 말았다.
분노어린 블라드의 일격을 따라 터져나가고 만 수녀원의 문짝.
누군가가 세워놓은 기준은 나를 온전히 판단할 수 없으니.
해야 할 일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뒷골목의 소년은 기어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내고 말았다.
오직 진실된 사제만이 알아봐 주었던 소년의 가능성이었다.
돌아와야 할 자리 (3)
이제는 시장실에 있을 수도 없었기에 더 좁아진 어느 방.
그곳에서 요제프는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언제나 햇빛을 등지고 있던 그였으나 오늘만큼은 들어오는 해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너는 어찌할 거냐.”
창가에 비치는 풍경에서 날갯짓하며 떠나가는 까마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빌려 쓰고 있던 마커스의 까마귀들이 하나둘씩 요제프를 떠나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소속을 옮겨주도록 하마.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니까.”
내가 아닌 남에 의해 주어졌던 것이기에 떠나야 한다.
까마귀들도 기사들도 그리고 쇼아라의 시장직까지도.
요제프는 지금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저희 계약은 7년짜리이지 않습니까.”
“계약은 끝났다. 나는 이제 가주 경쟁에서 탈락하고 말았으니까.”
너는 신의를 나는 기회를.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보장해 줄 수 없기에 요제프는 블라드를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입술만을 곱씹고 있던 블라드는 버릇처럼 요제프를 올려다보았다.
뒷짐을 진 채 들어오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
흐르는 분위기는 침울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블라드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끌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테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롯이 스스로가 맞이하는 오늘의 태양.
그림자가 아닌 햇빛 속에 있는 그의 표정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아무도 없는 시청의 어느 공터.
라문드는 화살처럼 쏘아지는 푸른 검을 보며 기겁한 듯 고개를 젖히고 말았다.
“······!”
끼기긱거리며 비틀어지는 관절의 늙음이 서럽다.
그러나 라문드는 그 늙음에 한탄할만한 시간도 없이 서둘러 다음 공격을 맞이해야만 했다.
“또 누구 걸 훔쳐 온 거냐!”
짓쳐 들어오는 발걸음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능글맞았지만, 그 발끝이 향하는 공간은 라문드의 의도를 정확히 봉쇄하고 있었다.
유연함 위에 얹어놓은 매서움.
세계 안에 또 다른 조각을 채워 넣은 블라드를 보며 라문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배워와서는!”
잔재주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고매한 기술이었지만 아직 블라드의 검 끝에는 확고한 검로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소화는 시키지 못한 것이다.
“치잇!”
블라드는 어느새 공세의 흐름이 전환되어버린 것을 느끼며 혀를 차고 말았다.
역시 라문드는 강한 기사였다.
죽지 않고 늙었을 만큼.
블라드는 갑작스레 변경되는 검로를 보며 흠칫했지만 라문드는 이미 블라드의 반응을 예측하고 있었다.
타앙-!
검로 사이로 억지로 끼워 넣은 그의 어깨가 빛났다.
배웠으나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강체술의 원형이 여기에 있었다.
“나이 좀 생각하시죠! 지금도 골골대시는 분이!”
“골골대도 네놈보다는 낫겠지!”
가벼운 대련으로 시작했으나 늙은 몸을 아끼지 않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 어디 하나 부러지면 제대로 붙지도 않을 나이인데.
“그리고 오러 안 쓴다면서요!”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속이는 기사들도 있으니까!”
반들한 이마만큼이나 빛나는 라문드의 어깨를 보며 블라드는 왼쪽 눈을 감고 말았다.
저 기사의 오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만한 것을 내놓아야 했다.
“······오호.”
푸른 달에 닿았으나 넘지는 못했던 블라드의 세계가 검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 발버둥은 헛된 것이 아니었으니 라문드는 블라드의 왼쪽 눈 사이로 흘러나오는 황금색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와 봐라!”
비치고 있는 황금빛 안에 자신의 색 한줄기도 들어있음을 아는 라문드는 즐겁다는 듯 검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어린 것들은 금방 큰다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의 성장 속도는 볼 때마다 경이로운 것이었다.
“어디 부러져도 원망하지 마시라구요.”
“젊은 놈이 입만 살았구나.”
저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짐승이 있다.
그러나 처음 보았을 때는 가련했을 뿐인 그 으르렁거림이 지금은 실체 있는 위협이 되어 라문드의 시선을 붙들고 있었다.
기사 블라드의 수준은 이미 자신에게까지 닿아있었다.
“······!”
주시하고 있었으나 늙은 몸은 젊은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예전의 모습 따위로는 예측할 수 없는 의외성이 기어이 라문드의 눈을 속이고 말았다.
‘예전보다 훨씬!’
빠르다 못해 마치 시간을 뛰어넘은 것만 같은 모습.
발걸음과 몸짓을 통해 의도를 속인 블라드는 그 찰나의 틈을 통해 라문드의 바로 앞까지 뛰쳐나왔다.
“흐읍!”
늙었기에 삐걱거리고 만 반응.
그 틈을 포착한 블라드는 짧은 숨을 통해 힘의 균형을 옮기고는 인정사정없이 라문드의 단단함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지닌 색깔만큼이나 화려한 일격.
그러나 보이는 화려함과는 다르게 질척이는 블라드의 검격은 계속해서 라문드의 단단함을 갉아먹어 가고 있었다.
일격으로 필살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진득한 도전뿐이라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더······ 럽게도 가는구나!”
끊임없이 두들겨대는 블라드의 시도에 의해 점차 라문드의 강체술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검을 빗겨내고 그 틈을 노려 다시 한번 강한 일격.
까앙-! 깡!
라문드보다 검을 두 번, 세 번은 더 날려대는 전술은 체력의 차이를 감안한 블라드의 의도이기도 했다.
블라드는 지금 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구요!”
그리고 기어이 뚫어낸 틈을 통해 반짝이는 블라드의 눈빛.
큰 거 하나 오겠다는 감각에 라문드는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으나 블라드의 공격은 그보다 반 박자는 빠른 것이었다.
‘······뭐?’
바로 앞에 반질하니 빛나는 블라드의 이마가 있었다.
튕겨 나간 검을 되잡지 않았기에 벌어낸 순간.
그 순간을 통해 기어들어 온 것은 강체술을 뒤집어쓴 블라드의 이마였다.
“아니 이런!”
라문드는 샛된 비명을 질렀으나 블라드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당한 것은 어떻게든 갚아준다.
그것이 뒷골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퍼억-!
아무도 없는 시청 안 공터에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기에는 과도하게 큰 소리였다.
※※※※
“······이 막돼먹은 놈. 가르쳐 준 은혜도 모르고 들이받아? 하긴 그런 놈이니까 수녀원도 때려 부수고 다녔겠지.”
“이게 다 훌륭한 기사분들에게 배워서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라문드의 핀잔에도 블라드는 실실 웃으며 검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애초에 막돼먹은 놈에게 막돼먹었다고 해봤자 들어오는 충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진짜 어디 부러진 건 아니죠?”
“아이고······.”
이제야 아픔이 몰려온다는 듯 뒹굴어대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주려 내미는 손이었으나 블라드의 반대편 손은 어느새 강체술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다.
“손 붙잡고 들이받지 마세요. 왼손에 오러 둘렀어요.”
“······흠.”
라문드는 불끈 쥐고 있는 블라드의 주먹을 보며 아쉽다는 듯 쩝쩝거리고 말았다.
가르친 것보다 앞서 나가니 칭찬해 줄 만도 했지만, 너무 잘하면 오히려 얄미운 법이었다.
“그나저나 어쩔 거냐. 계속 도련님을 따라다닐 생각이냐.”
“······이러려고 불렀나 보네요.”
역시 늙은이들은 방심할 수 없다.
애초에 대련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라문드의 질문은 블라드가 가장 방심하던 때를 꿰뚫고 들어왔다.
“하지 마라. 이미 끝난 일이다.”
“······.”
방금까지만 해도 요란했던 공터에 어느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몰랐다면 어쩔 수 없었겠으나 알았기에 라문드는 말해주어야만 했다.
“자야르면 몰라도 아마 다른 기사들은 다들 요제프의 곁을 떠날 거다. 그게 맞는 거고 법도야.”
젊은이를 위한 늙은이의 충고는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이미 겪어봤기에 아는 라문드의 충고는 정확히 블라드의 안위를 향해 있었다.
“요제프 님도 지금이라도 굽히시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어디 대단한 자리는 아니더라도 한적한······.”
“그렇게 하기 싫대요.”
블라드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라문드의 옆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뭐?”
“그렇게 살기 싫다 그러네요.”
주어질 뿐인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고작 그것뿐일 리 없다고 요제프는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은 모자랐거나 부끄럽지 않았으니까.
쿨럭거리는 기침 속에서도 요제프는 자신의 대한 믿음을 놓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건 좀 멋있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아······.”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낸 블라드는 라문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제 밤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동경했던 푸른 달빛은 없었다.
이제 블라드가 따라가야 하는 길은 저 먼 하늘이 아닌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외침이었다.
지금의 요제프처럼 말이다.
“그동안 살면서 바쁘게만 지내왔지 내가 뭘 하고 싶어 했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먹기 위해 훔쳤고 살기 위해 죽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블라드가 진정으로 원해 한 일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제프 님을 따르는 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냐?”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
푸른 달빛에 닿았던 블라드는 이제 남이 아닌 내가 찾아야 하는 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냥, 이쪽이 좀 더 마음에 든다?”
“미친놈······.”
누군가를 쫓는 것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마음껏 털어놓은 블라드는 그제야 요제프가 왜 웃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라문드와의 대련이 있고 며칠 뒤.
정말 그의 말대로 요제프 주위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소집 해제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기사라고는 자야르와 갈 곳 없던 보르단뿐이었고 요제프는 초라한 모습으로 옥사나에게 돌아갈 채비를 꾸리는 중이었다.
“내일 떠나는 거야?”
“응. 우트만 남작령으로.”
블라드 또한 제미나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다만 블라드의 목적지는 요제프와 같은 스투르마가 아닌 우트만 남작령이라는 것이 조금은 다른 점이었다.
“급했던 일은 이제 다 끝냈고, 그래서 당분간은 북부정교회의 일을 돕기로 했거든. 일종의 순례 여행이랄까.”
바예지드의 기사였으나 주교 안드레아가 보증하기도 한 기사.
페테르 또한 요제프와 마찬가지로 명망 높은 주교가 내미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이 받았던 이름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어린 부제를 도와 사특했던 자리를 정화하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 위험하지 않아?”
골목이 좁았기에 가까운 제미나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감정 때문에 떨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떨림에는 아마 블라드에 대한 걱정 또한 담겨 있을 것이다.
“위험하기는. 거기는 이미 교황청이 죄다 밟아놓은 데야.”
“진짜 안전한 데 맞아?”
“내가 너한테 뭐 속인 적이 있었냐. 왜 사람을 못 믿지?”
“없기는 왜 없어.”
나란히 걸었으나 홀로 우뚝 멈춰서고만 제미나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치 멀어지는 블라드를 잡으려는 듯 그렇게 길어지고 있었다.
“너 예전 편지에서도 죄다 거짓말만 써놨었잖아.”
“······.”
“막 안전한 데 있고 요제프 님 옆에만 있고 그러기는 개뿔. 너 혼자 뛰쳐나가고 그랬었다며?”
블라드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원망과 함께 조금의 물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심시키기 위해 보냈던 편지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제미나에게 불안만을 안겨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너는 내가 우스운 거야. 내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 애초에 알리시아 남작이랑도······.”
“남작이랑도 뭐.”
한숨과 함께 돌아본 그곳에는 이게 아닌 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미나가 있었다.
또다시 떠나기에 애써 내 본 시간이었건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격려나 위로가 아닌 그동안 참고 있던 서운함뿐이었다.
“어차피 너도 구질구질한 이곳보다는 데어마르가 더 좋지? 너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니까.”
실수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멈출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밖으로 나온 말에 제미나는 계속해서 상처 입고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에 상처 입는 모습이 참으로 바보 같아 보였지만 그만큼 제미나는 그동안 무던히도 참고 있었다.
“흐으으······.”
꾹꾹 참고 있었으나 제미나는 기어이 그 큰 눈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런 제미나를 보며 달래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거 아냐. 너는 진짜 멍청한 계집애라는 거.”
“흐어어어엉.”
마치 더 울라는 듯 괴롭히는 블라드의 언행에 제미나의 울음소리가 커져만 갔다.
그래 울어도 싸다.
붉은 머리 제미나는 블라드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애였다.
“맨날 울어도 꼭 내 앞에서만 울어. 변한 게 없네. 어? 아주 예전 그대로야.”
이제는 아이도 아니건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 울고 있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애써 화를 내려 하다가도 그만 웃고 말았다.
그동안 애써 레이디 제미나인척 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고개를 든 붉은 머리 소녀가 블라드는 그렇게 반가웠다.
“이거 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애는 입 다물고 있어.”
한 손에 훌쩍 제미나를 집어 들어버린 블라드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어두운 뒷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둘씩 켜지는 뒷골목의 불빛들.
들고 있는 소녀의 무게만큼이나 전혀 변함이 없는 그 광경을 따라간 블라드는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여기는 왜?”
“봐봐.”
그곳은 언제나 진창이 가득한 곳이었다.
차가운 땅을 녹이는 열기가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곳이었기에.
“너는 이쯤이고.”
들고 있던 제미나를 박아넣듯 진창에 세워놓은 블라드는 자신도 자리를 잡고는 소녀의 옆에 서기 시작했다.
“나는 이쯤.”
그렇게 있던 자리에 서 있던 둘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가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기에 익숙한 몸짓이었다.
까앙-! 깡!
어두웠기에 더욱 밝게 비치는 대장간의 빛이 둘에게로 와닿고 있었다.
비록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르겠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변하게 없잖아. 안 그래?”
“흐으응······.”
우는 것인지 대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블라드는 자신이 하려는 말이 잘 전달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돌아온다면 여기밖에 더 있겠어.”
“······.”
변한 것이 없는 광경이었다.
흘러나오는 망치 소리와 붉은 쇳물의 빛도.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소년과 소녀도.
블라드에게 있어 고향은 쇼아라였지만 돌아올 곳이라 한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조심히 다녀와.”
“그래.”
그래도 변한 광경이 하나 있다면 예전보다 조금은 옆으로 붙은 둘의 발자국 정도일 것이다.
좁지는 않았으나 나란히 붙어있는 블라드와 제미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낡은 대장간 앞에 서 있었다.
오래 서 있던 만큼 깊어진 둘의 발자국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 (1)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즐겁게 노래하는 성냥 주위를 돌자.
새빨갛던 머리가 시꺼멓게 될 때까지.
부르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모두 넘어질 때까지 성냥 주위를 돌자.
※※※※
바짝 얼어붙어 있는 겨울의 가도.
그 위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삐걱거림이 요란했다.
딱딱한 길바닥만큼이나 건조한 북부의 바람은 가뜩이나 무거운 일행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군.”
추운 날씨에도 굳이 창을 열고 있던 요제프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의 침묵을 깬 요제프의 목소리에 기사들 모두가 앞을 바라보았다.
쭉 뻗은 가도 앞으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길.
저 앞에서부터 다가오는 갈림길에 다다르면 일행과 블라드는 헤어져야 했다.
“부디 몸조심하고.”
“요제프 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요제프와 기사들은 스투르마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주 경쟁에서 탈락한 요제프가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를 따르던 기사들은 아마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아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헤어짐에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의 일행에게 있어 그 끝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평소처럼 날뛰고 다니지 마라. 이번에 수녀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보죠.”
그 와중에서 변함없는 자야르의 핀잔은 차라리 반가운 것이었다.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반갑지 않았으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실웃음 소리에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다가올 봄에는 아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때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하얗게 뜬 입술로 다음을 약속하는 요제프의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이 빈말이 아닐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요제프는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했던 말 잊지 말고.”
“네.”
속삭이듯 말하는 요제프의 마지막 말에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요제프가 나지막이 건네준 충고는 교황청에서 뿌리고 다녔다는 기이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제 님께서도 뜻하신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요제프 님의 귀환길에 신의 평안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요제프는 조용히 눈짓하며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레고리, 막심, 그리고 케이드.
마주치는 눈빛 하나에 마지막 인사를 담은 블라드는 이윽고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가 반대편 갈림길로 꺽어들어 갔다.
점점 멀어지는 검은 말과 작은 나귀 한 마리.
불어오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선 요제프와 기사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봐주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린 부제의 앞길을 이끄는 블라드의 모습은 이제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
“아마 기사님은 모르셨을 거예요.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안드레아 님의 어깨가 으쓱했었거든요.”
타고 있는 늙은 나귀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으나 그 위에 타고 있는 어린 부제는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 힘차게 떠벌이고 있었다.
“큰 값 받고도 팔 수 있는 보증이었는데 땅바닥에 버렸다고 다들 얼마나 뭐라 하던지. 그래도 지금 그 소리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금도 재잘거리고 있는 어린 부제의 이름은 쟝이라 했다.
북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한 글자짜리 이름을 가진 소년은 블라드가 마치 자신의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름을······. 보증을 돈 받고도 팝니까?”
“그럼요. 알음알음 다들 팔고 다녔죠. 특히 교황청에서 나온 사람들은 특히나 더요.”
안드레아의 직속 부제여서인지는 몰라도 쟝은 교황청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명망 높았으나 광야만을 떠돌았던 안드레아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쟝이었다.
“하긴 쇼아라의 원장 수녀도 뭘 팔긴 팔았었죠.”
쟝의 말에 쇼아라에 있던 수녀원을 떠올린 블라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없는 자들을 위해 세워진 수녀원이었건만 그 안에 있던 여자들은 전부 유력자들의 자식뿐.
신에게 가까운 순결한 처녀들.
쇼아라의 원장 수녀는 신의 이름을 빌려 그 칭호를 팔아먹는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단 육포는 이걸로 바꿔 드시죠.”
“네?”
쟝은 블라드가 갑작스레 건네는 종이 뭉치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어딘가 두툼해 보이는 그 종이 뭉치 위에는 칸노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칸노르 가문 거네요?”
“그쪽이랑 자그마한 친분이 있거든요.”
어린 부제도 알 정도로 칸노르 가문의 고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비싸기도 하고.
그리고 블라드는 그런 칸노르 가문에서 크게 후원하는 기사중 한 명이었다.
“처음으로 나서는 먼 길이니 잘 먹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디 앓아눕기라도 하면 부탁받은 제가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아. 아. 감사합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발개지는 볼이 쟝의 심정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창때의 소년에게 고기를 들려주었으니 그 기쁨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청빈한 삶을 살던 안드레아 밑에서는 이런 육포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편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쟝의 입을 통해 알아차린 안드레아의 은혜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어느새 육포 하나를 꺼내 우물거리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저 어린 사제의 고행길을 통해 안드레아에게 자신의 이름값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랐다.
※※※※
“오······.”
“어떡할까요. 부제님.”
우트만 남작령의 주도인 모시암으로 향하는 길.
지도가 이상했는지, 지도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상했는지는 몰라도 블라드와 쟝은 며칠을 걸친 야영 끝에 겨우 조그마한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보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둘은 곧 언덕 아래 보이는 기이한 장면을 보고는 멈춰서고 말았다.
“어쩔까요. 내려갑니까?”
“잠시······. 잠시만요.”
쟝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껏 고민하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
이번 고행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어린 부제였고 그 길을 통해 얻을 소년의 성장이 곧 주교 안드레아가 바라는 것임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내려가죠. 막아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어린 부제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고행의 첫 길.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따라 내려가는 언덕 아래에는 지금 축제가 한창이었다.
블라드가 들고 있는 지도에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은 작은 마을.
그러나 그런 작은 마을이라 할지라도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나왔는지 언덕에서 내려다본 광장 안에는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있었다.
“살려줘-! 나는 아니라니까!”
축제에는 무릇 그에 걸맞은 제물이 있어야 하는 법.
축제를 위해 사로잡힌 누군가가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누군가가 씌워놓은 듯 딱 붙어있는 가면의 모습이 꽤 기이해 보였다.
“내가 안 했다니까!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거야!”
기이한 가면뿐만 아니라 온통 검은색 옷으로 뒤덮은 사내는 쉴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장작을 쑤셔 넣으며 불을 키울 뿐이었다.
개중에는 아예 듣기 싫다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속지 마시오! 본래 사특한 것들은 세 치 혀를 굴려 사람들을 속이고는 하는 법이니!”
새하얀 법복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어느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겉모습으로만 보았을 때는 분명 사제의 모습이었다.
“다들 모시암에서 비롯된 사특한 존재에 대해 알고들 계실 거요!”
사제의 입에서 모시암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불길하고도 두려운 이름으로 각인된 도시.
먼 곳에 있는 이 마을에서조차도 모시암과 관련된 것이라면 치를 떠는 중이었다.
“멀쩡하던 보리밭이 왜 썩고 멀쩡하던 우물물이 왜 말랐겠습니까! 그것이 다 모시암에서 튀어나온 저놈 때문이오!”
사제의 손끝이 기둥에 묶여 발버둥 치고 있는 사내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러니 불태워야 합니다!”
“이 미친 새끼가! 멀쩡한 사람은 왜 태우는데!”
기이한 행색의 사내는 있는 힘껏 악다구니를 쳐댔지만 이미 그는 묶여있었고 밑에서는 천천히 시뻘건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마치 장작불에 구워지는 까마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 이거 수상한데.”
얼마 없는 자경단의 눈을 피해 마을의 중앙까지 파고든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불타고 있는 축제의 한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죠?”
“네. 아닌데요.”
지금 블라드의 어깨 위에는 목마를 타고 있는 쟝이 있었다.
쟝 또한 새하얀 법복을 입고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저 앞에 있는 사제에게 쏠린 지 오래.
그 틈을 타 자그마한 돋보기를 꺼내든 쟝은 지금 화형 당하기 직전의 사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암만 봐도 보이지가 않는데요. 물론 이 돋보기로도 찾을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애초에 저렇게 잡혀 있을 리가 없겠죠.”
부제일 뿐이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나 그 정도쯤 되는 존재라면 애초에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힐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블라드와 목마를 타고 있던 쟝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를 더 키워야 하오! 저 위에 계신 신께서도 볼 수 있게!”
점점 장작의 불이 새빨갛게 번져나갈 때마다 사제 앞으로 쌓여가는 제물들.
광기 어린 외침을 따라 나온 마을 사람들은 들고 온 재물들을 사제 앞에 내려놓고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외치는 것은 신의 이름이었으나 바라보는 것은 거짓된 사제.
앞에 있는 제물의 산이 쌓여갈 때마다 점점 커지는 사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거 사기꾼이네요.”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정말로 사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얄팍한 수를 알아챈 블라드는 어깨 위에 있던 쟝을 잡아 내렸다.
“어쩔까요?”
“막아야 해요.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비극을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서둘러 품속에 있던 성경을 꺼내든 쟝은 단호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육포 조작에 기뻐하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알겠습니다. 부제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쟝은 블라드의 끄덕임에 힘을 얻었는지 서둘러 성경을 펼치고는 종이를 넘겼다.
주교 안드레아가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어린 부제를 위해 정성스럽게 새겨넣은 성경책.
그 성경을 넘기던 어린 부제의 손이 멈춘 곳은 신을 위한 찬송가가 적혀있는 페이지였다.
-세상의 헛된 우상 버리고.
-인간의 모든 거짓과 불의도 버리고.
-부름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름 모를 사내의 비명을 따라 천천히 화형대를 따라 돌기 시작하던 마을 사람들.
그러나 새빨간 불 주위를 돌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고아한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거기 당신.”
“뭐, 뭐요.”
어린 부제의 목소리가 길을 만들자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 한 명의 기사.
그 기사의 왼쪽 눈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황금빛이 맺혀있었다.
“당신 진짜 사제 맞아?”
“······으어어.”
거짓된 사제는 자신의 귀와 눈을 때리는 형형한 형상들을 보며 그만 간사한 혀를 깨물고 말았다.
쌓여있는 제물들과 말 못 하는 사제, 그리고 지금도 불길 위에서 발버둥 치는 결백한 제물.
“우리 일단 불부터 꺼놓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
주교 안드레아의 검과 어린 목소리가 거짓된 불길을 붙잡고 있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 (2)
딱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네모진 턱이 인상적이다.
키는 작았으나 덩치는 작다 할 수 없는 사내.
그런 사내가 보내는 눈빛은 지금 방 안을 가득 채운 페테르의 존재감에도 전혀 굽힘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안 드오.”
시구르손은 내뱉은 말만큼이나 삐딱한 시선으로 페테르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무례한 행동이기는 했으나 시구르손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쇼아라의 시장을 바꾼 이유가 뭡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 같은데.”
“······절대로 그런 의도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실각하다시피 자리를 비워버린 요제프의 소식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큰 동요를 불러왔다.
함께 일을 잘 진행하고 있던 사람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렸으니 누구라도 당황스럽기는 할 것이다.
페테르는 자신이 이 공백을 잘 수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난생처음 접하는 드워프들의 세계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바예지드가 니다벨리르를 환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다만 그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바뀐 것뿐이니 너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요.”
끼익-
날카롭게 바닥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시구르손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사람이 바뀐 것이 문제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의 영주. 페테르 바예지드.”
“······.”
지금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예지드의 주인이었으나 시구르손은 그런 것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어느 자리에 있는 사람이냐는 것보다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이곳 쇼아라까지 찾아온 이유는 요제프 바예지드와 기사 블라드 때문이었소. 애초에 그들이 아니었다면 굳이 교류를 터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요.”
오랜 세월 핍박받은 드워프들의 역사는 그들을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태껏 드워프들의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린 드워프들과 함께 보내온 요제프의 정중한 편지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혹은 기사 블라드를 불러와 주시오. 우리와 다시 대화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단단히 팔짱을 끼기 시작하는 시구르손.
곧은 만큼 직설적인 드워프들의 화법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곧장 가리키고 있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또는 기사 블라드.”
옆에 서 있던 조언자 라그무스조차 당황할 정도로 직설적인 요구였으나 정작 그 요구의 대상자인 페테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시구르손의 요구에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던 페테르는 그저 생각을 정리할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한 참이었다.
‘그 이름, 참 많이들 불러대는군.’
시구르손은 몰랐겠지만 요즈음 페테르에게 그 둘의 이름을 찾은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하이날의 영주도, 초록 머리의 소녀도 갑작스레 사라진 둘을 찾던 중이었다.
‘이래서 해보겠다고 한 거였군.’
이제야 요제프의 속셈을 확실히 알아챈 페테르는 실로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동안 열심히도 모아놨구나.’
교류 없던 니다벨리르.
몰락한 라브노마.
볼품없던 하이날.
그리고 깡말라 있던 뒷골목의 소년까지.
아마 자신의 둘째 아들은 제 형이 밖에서 빛나는 명예를 꿰어갈 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들을 줍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들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빛나게 될 때까지 말이다.
※※※※
“살려,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마을의 곡식 창고 안.
어둡기에 서늘한 이곳에서 거꾸로 매달려있는 사내들이 살려달라 나지막이 외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까지 매달려있던 가짜 사제는 이미 하얗던 법복이 새빨갛게 될 때까지 얻어맞은 뒤였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사기꾼 일당의 애원을 들은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특수 상해, 협박, 사기, 재물갈취, 거기다 신성 모독까지.”
내뱉는 죄악 하나마다 조금씩 잘려나가는 육포 조각들.
별것 아닌 행동이었으나 그 행동에서 느껴지는 살기만큼은 진짜였다.
“이 죄들을 다 셈하려면 죽은 것도 살려서 다시 목을 쳐야 할 판인데?”
“죄송합니다! 기사님!”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마치 통보와도 같은 블라드의 말에 가짜 사제와 그의 바람잡이들이 살려달라 아우성을 쳐댔다.
저 아래서 웃고 있는 남자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살고 싶어?”
“네! 네!”
“그럼 내놔.”
“네?”
당연하다는 듯 턱 하니 내놓은 블라드의 빈손.
거꾸로 매달린 채 그 손을 보던 가짜 사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동안 이 짓 하면서 꿍쳐놓은 게 있을 거 아냐. 보니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
이럴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찬송가와 함께 검을 뽑았던 블라드의 모습은 그 어떤 기사들보다도 빛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뒷골목 무뢰배들처럼 껄렁한 모습일 뿐.
“싫으면 말하라고. 아직 화형대에 불이 안 꺼졌다니까.”
“드리겠습니다! 있는 것 전부 다요!”
아마 지금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사기꾼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들의 앞에서 웃고 있는 젊은 기사는 이미 특수 상해, 협박, 사기, 재물갈취, 거기다 신성 모독까지 훌륭하게 저질러낸 사람이라는 것을.
악(惡)을 제압하는 더 큰 악(惡).
어두운 창고 안에서 웃고 있는 블라드의 눈빛이 스산해 보였다.
※※※※
살려준다고 했잖아!
저 빌어먹을 사기꾼 자식! 지옥에나 떨어져라!
마을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가는 사기꾼의 무리가 요란했다.
순진한 믿음을 파고들어 재물을 취했으며 멀쩡한 사람까지 태워죽일 뻔했으니 아마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었다.
“사기꾼? 저게 무슨 소리인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부제 님. 저런 놈들은 마지막까지 수작을 부리고는 하니까요.”
두둑해진 주머니를 괜스레 한 번 두들겨 본 블라드는 서둘러 쟝의 어깨를 돌리고는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부터 남자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블라드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나저나 매달려있던 남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까?”
“다행히 살아있어요. 신께서 보호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블라드가 창고에서 사기꾼들을 족치는 동안 쟝은 촌장의 집에서 화형당하던 사내를 치료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사제 안드레아는 치료의 기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고 쟝 또한 그런 스승의 기질을 받아서인지 자그마한 신성 정도는 다룰 수 있는 아이였다.
“오오······. 귀하신 분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기다림이 초조했던 듯 아예 문밖에 서서 블라드와 쟝을 기다리던 촌장은 더는 굽힐 수도 없을 만큼 허리를 굽혀가면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
“정말 두 분이 없었다면 저희 마을은 어찌 되었을지······.”
허튼 사기꾼들에게 당할 뻔했다는 것을 안 촌장은 과할 정도로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광기 어린 화형식은 법으로 따지자면 앞에 있는 기사에게 처벌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교리로 따지자면 어린 부제에 의해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근처 마을에서 역병이 퍼지는 바람에 깜박 속아 넘어갔지 뭡니까. 당장 저 남자를 잡아 불태우지 않는다면 저희 마을에도 역병이 퍼질 거라 말해서······.”
그러나 사기꾼들의 말을 따른 것은 촌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사기와 선동은 인간의 불안을 타고 들어오는 법.
지켜주는 영주가 없어 안전하지 못함에 불안하고, 사특한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에 불안하던 촌장은 역병을 몰고 들어왔다던 수상한 사내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으으······.”
“정신이 드나 봐요!”
촌장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집 안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사내가 있었다.
험한 일을 당해서인지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를 보며 쟝이 서둘러 부축하는 동안 블라드는 조용히 그의 옆에 놓인 소지품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소매치기했던 경험을 살려 눈짓 한 번으로 살펴본 그의 로브 안에는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가득했다.
‘이 자식도 수상한데.’
그을음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온통 새까맣던 그의 웃옷들.
초라한 로브 안쪽에 빼곡히 달린 작은 주머니들 안에는 타다만 풀잎들과 이상한 뼛조각들이 가득했다.
“여기가, 여기가 어딥니까.”“정신을 차렸나.”
그리고 무엇보다 수상한 것은 그가 쓰고 있던 기이한 가면.
거꾸로 매달려있던 사기꾼들은 블라드에게 말했었다.
그 기이한 가면은 애초에 사내가 쓰고 있던 것이었다고.
“누구······ 십니까?”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블라드는 들고 있던 가면을 누워있는 사내에게 들이 대어보았다.
얼굴형에 꼭 들어맞는 크기와 모양.
과연 사기꾼들이 말한 대로 이 가면은 이름 모를 사내의 것이었다.
“내가 이름을 말했으니 이제는 너의 차례겠지?”
“······내 이름은 니벨룬이요.”
이제야 더듬더듬 입을 여는 사내에게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제야 입을 연 사내에게서 들린 것은 불길한 단어일 뿐.
“나는 죽음을 쫓아 이곳까지 왔소.”
“······죽음?”
바짝 들이댄 그 가면은 마치 까마귀의 얼굴이라도 박아넣은 듯 기이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로브 위에 기이한 새 부리 가면.
가면의 눈구멍을 통해 본 사내의 얼굴은 고양이를 닮아있었다.
자신을 죽음을 쫓아왔다 밝힌 사내는 북부에서는 보기 힘든 수인족이었다.
※※※※
달빛 아래 비치는 저택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아주 오래된 예전에는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겠으나 멋대로 방치되고 만 지금에는 그저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채 그저 서 있었을 뿐.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 저택은 그렇게 내려오는 달빛을 홀로 맞이하고 있었다.
찰박- 찰박-
“······그러셨구나.”
쓰러져 가는 저택의 안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물을 끼얹는 소리.
마치 누군가를 목욕이라도 시키는 듯한 소리가 낡은 저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가지 못하셨구나.”
천장마저 허물어져 새까만 밤하늘이 보이는 저택의 홀.
그러나 모든 것이 낡았음에도 여인이 기대어 있는 욕조만큼은 상아색 빛을 뽐내며 어둠과 어울리고 있었다.
“가엾으신 분.”
시작은 푸르렀으나 끝은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의 여인.
그녀는 지금 정성껏 욕조의 물을 받아 그 안에 있는 사내를 씻기는 중이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사내를 씻기는 여인의 손놀림이 많이 해보았다는 듯 능숙해 보였다.
“남아 있는 것들이 걱정되셨겠지요. 저는 이해한답니다.”
하늘 위에 떠 있던 달빛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서서히 저택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이는 욕조 안의 풍경.
물 대신 가득 들어차 있는 새빨간 핏물.
새하얀 백발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여인이 조심스레 붙잡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은 마치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잔뜩 주름져 있었다.
“······얼마나 용이 두려우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셨을까.”
땅을 딛지 않는 여인은 어머니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새빨간 욕조 안에서 시체의 손을 끄집어냈다.
지금은 잔뜩 말라비틀어져 있었으나 이 손으로 해낸 업적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나셔야죠. 폐하.”
주문과도 같은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시체의 손이 펴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뿌리처럼 천천히 피어나기 시작하는 불길한 손끝.
그 손끝이 펴져 갈 때마다 욕조의 핏물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온전히 하늘 끝에 다다른 달빛이 쓰러져 가는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오직 달만이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처참한 형태의 시체들이 목 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리고 고양이 (3)
엘프들은 어머니 세계수를 잃었다.
드워프들은 영원히 타오를 용광로를 잃었으며 인간들은 빛나는 왕국을 잃었다.
종족마다 다른 것을 잃었지만 결국 그것들 모두는 가능성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들일 것이다.
단 하나의 존재가 이 세상 모든 가능성을 독식하던 시대가 있었다.
떠오르려 하는 별빛들을 모아 자신의 발 아래 가두었던 그런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를 용의 시대라 불렀다.
그리고 여기, 그 험난한 시대에 가능성을 잃어버린 또 하나의 종족이 있었다.
짐승의 귀를 지닌 종족, 수인족.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신비’라고 했다.
※※※※
“기사님! 사제님!”
자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러나 조용했어야 할 그들의 여정은 뒤에서 따라붙는 수인족 사내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제가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블라드와 쟝이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준 니벨룬이라는 사내는 여전히 둘의 뒤를 쫓아오며 같이 가자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어떻게, 못 따라오도록 다리만 살짝 부러뜨리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신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저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블라드 님.”
“그러셨죠. 참.”
쟝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검과 폭력을 다루는 기사들의 세계는 비록 높았다 할지라도 자신과 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쟝이라는 어린 부제만큼은 여전히 대하기가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그럼 부러뜨리지는 말고 따라오지 말라고 욕 정도 하는 것은 괜찮겠지요?”
“······그 정도는 봐주시겠지요.”
연장자이자 인솔자는 블라드였으나 이 여행의 주체인 사람은 바로 쟝이었다.
지켜야 할 대상이자 지켜야 할 규칙인 사람.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어린아이였으나 블라드는 쟝에게 무시 대신 존경을 표하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이봐. 죽음을 따라다니는 니벨룬 씨.”
“네. 네! 기사님!”
그렇다 해도 쌓여버린 화가 어디 가지는 않는 법.
시근거리는 블라드만큼이나 화가 난 누아르의 콧김이 니벨룬의 쫑긋거리는 귀를 스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뒤를 따라다닐 거야.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으르렁거리는 기세가 매서웠으나 니벨룬은 그저 양손을 맞잡고는 둥글게 웃었을 뿐이었다.
“아이고, 그렇게 귀찮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여기저기 낡아버린 검은 로브.
그리고 지금은 쓰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등 뒤에 매달아 놓은 기이한 가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인족 사내에게 있어 불길한 기운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쓸만할 겁니다. 저는 마법사니까요!”
“세상에 어느 마법사가 사기꾼들한테 걸려서 바비큐가 되는데?”
죽음을 쫓아왔다고 말하는 니벨룬은 자신을 마법사라 소개하고 있었다.
그것도 병(病)과 저주를 쫓아다니는 마법사.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온통 피하고 싶은 단어만 내뱉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인상을 구겨대었다.
“제 마법의 특성상 발동을 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그래. 들으면 들을수록 참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마법이라니까.”
들고 있는 것들이 충분히 괴상하였으니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마법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적만도 못한 사기꾼들에게 잡혀버릴 정도라면 그 수준 또한 알만할 것일 테다.
“진짜 이게 마지막 경고야. 계속 쫓아오면 다리 한 군데는 분질러질 줄 알라고.”
도움이 안 되는 군식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거기다 그 대상이 척 보아도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블라드는 아직도 니벨룬이 매달고 있는 까마귀 가면이 영 꺼림칙할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
그러나 니벨룬은 그런 블라드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할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저를 그곳 안까지만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블라드 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다른 이들에게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사는 사람이구만.”
블라드는 지금도 니벨룬이 소중히 들고 있는 두툼한 책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절했던 동안 살펴보았던 그 책에는 온갖 풀잎들의 그림과 효능들이 빼곡히 적혀있던 책이었다.
마법사 니벨룬.
그는 마법사이자 역병(疫病) 의사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
“죽음을 따라왔다고?”
“그렇소. 아니, 그렇습니다.”
이제야 깨어난 수인족 사내는 아직 정신은 몽롱해 보였지만 자신을 죽음을 따라온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무슨 죽음? 이곳에 죽음이 있나?”
북부 사람들에게는 낯선 수인족의 모습, 여기저기 기워진 초라한 검은 로브, 그리고 기이해 보이는 까마귀 가면까지.
불길한 모습의 총체인 니벨룬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뒤에 서 있던 촌장은 역시 그때 불태웠어야 했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저는 죽음을 따라왔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에 죽음이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으면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요!”
“기사님. 제발 저 미친 고양이를 불태우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놈이 자꾸 저희 마을에 저주를 겁니다!”
“이미 마을은 망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람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기사님 제발!”
애초에 니벨룬은 굳이 사기꾼 일당이 아니었어도 스스로 화형대에 올라갈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는 자신의 안위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으니까.
“이미 땅이 오염된 겁니다. 단순히 흉작에만 그치지 않을 겁니다.”
“······.”
아직 화형대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며 발광하는 촌장.
그러나 니벨룬은 주위의 모든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이것 좀 보라며 지도 하나를 꺼내어 블라드에게 들이밀 뿐이었다.
“이것, 이것 좀 보십시오.”
“어째 갈수록 더 수상해지네.”
니벨룬이 내보인 지도는 일개 여행자가 지니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상세한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대략적인 길의 위치뿐만 아니라 강, 언덕의 높이, 근처에 있는 마을의 규모까지.
단순한 여행 목적으로 들고 다닌다기에는 수상쩍은 것이었다.
“딱 첩자들이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은 지도인데.”
그러나 블라드의 의심쩍은 눈초리에도 니벨룬이라는 남자는 귀만 쫑긋거릴 뿐, 딱히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블라드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그라미들은 뭔데.”
“역병들이 퍼진 상태를 표시한 겁니다.”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 위에는 새까만 동그라미들이 가득했다.
니벨룬이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이는 동그라미는 지금 블라드와 쟝이 있는 마을까지도 표시된 참이었다.
“그런데 이거······.”
한참 그 지도를 들여다 본 블라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역시 이상하죠?”
블라드가 알아본 것이 기쁘다는 듯 니벨룬은 지도 위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만 본다면 아무래도 교황청이 제대로 된 정화를 하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
지도 위에 동그라미들은 어느 한 곳을 향할수록 커지고 많아지며 또한 짙어지고 있었다.
그 동그라미들이 가리키는 곳은 우트만 남작령의 주도인 모시암이었다.
※※※※
아직 어린 부제가 침낭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이른 아침.
타다만 장작이 희뿌연 연기를 내는 모닥불 사이에서부터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것 보십시오. 제가 도움이 될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법사가 맞기는 맞았네.”
괜스레 다 식어버린 모닥불을 뒤적거리던 블라드는 니벨룬의 말에 동의하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일행의 주위를 돌듯 둘러쳐진 커다란 원.
어제 니벨룬이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려 놓은 그 원은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으로 보았을 때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모시암에까지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니벨룬의 애걸과 쟝의 부탁으로 일단 모시암까지는 같이 가기로 한 일행.
그러나 블라드는 그 안에까지 이 수상한 마법사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기사인 자신의 보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 안 하면 절대 못 들여 보내줘.”
“오······.”
블라드의 말에 빈틈이 보인 것을 느낀 니벨룬은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기 시작했다.
“들여보내 주시는 겁니까?”
“정확히 왜 들어가려는 지 말부터 해보라니까.”
이미 도시 모시암에는 혹시나 모를 사특한 존재를 찾기 위해 북부정교회의 성기사들이 모여있을 것이다. 주교 안드레아가 자신의 어린 부제를 모시암으로 보내는 이유도 결국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경험을 쌓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역병과 저주를 쫓는 마법사인데······.”
블라드는 비록 자신을 불태우려 했던 마을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외쳤던 니벨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곧장 본론에 들어가 버린 경고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니벨룬을 비난했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야 할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니벨룬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정리하지 않은 채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변하기 힘든 천성 같아 보였다.
“죽음이 왜?”
“죽음은 모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슴에 진득이 담아두고 있었으나 그것을 밖으로 내뱉을 때는 너무 단편적인 것들뿐.
블라드는 니벨룬이라는 수인족 사내가 뒷골목에서 살았던 자신보다도 더 화법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비란 모르는 것 안에 있거든요. 미지의 세계 속으로 숨은 것입니다. 저희는 평생 그것을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저희?”
다만 니벨룬은 이번의 질문만큼은 어떠한 오해도 없이 입이 아닌 손을 통해 대답해주었다.
“수인족들?”
“네, 네. 언제 어디서나 갈 곳 없이 떠도는 저희들이지요.”
니벨룬이 가리킨 것은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고 있는 자신의 귀였다.
“저를 모시암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그곳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꼭 보고 싶습니다.”
“······.”
신비를 찾아 죽음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수인족 마법사.
이제야 완전히 꺼져버린 모닥불 위로 오늘 첫 태양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에 비치는 니벨룬의 호박색 눈동자는 흐릿한 그의 화법과는 다르게 또렷한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만간 흉작에 이어 역병이 돌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다. 너는 그것을 특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요제프는 떠나기 전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속삭여주었다.
그 소문은 은퇴한 기사 라문드가 들고 온 것이었으며 어설픈 교황청의 문양이 새겨져 있던 쪽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일단 그곳에 있을 책임자에게 말은 해주도록 하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사님!”
때를 가리지 않은 니벨룬의 큰 목소리 덕에 작은 침낭에서 쟝이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리고 고양이 하나.
그 셋이 지금 오늘의 태양 아래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저건 저주로써 움직이는 것이다. 평범한 검으로 가를 수 없어.]
안개 낀 야영지에서 울려 퍼지던 어린 부제의 노래 소리.
그 소리 속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블라드에게 목소리는 말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혹시 지금 오러를 쓸 수 있겠냐.]
“지금 나랑 장난해요?”
[들어봐라.]
안개 너머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
그 여인은 자신의 아이를 찾아 울던 가엾은 여인이었다.
[저 저주를 깨기 위해서는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 그리고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목소리는 말했었다.
오직 단단히 세계를 굳힌 이 셋만이 저 사특한 존재로부터 여인의 눈물을 끊어낼 수 있다고.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1)
도시 모시암의 위로 달빛이 만드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주인 없는 도시이자 아직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
중앙에서 보낸 군세에 의해 함락되고만 모시암은 여전히 부서진 성문조차 복구하지 못한 채 발가벗겨져 있었다.
“하암······.”
그리하여 지금 모시암을 지키는 것은 의욕 없어 보이는 병사들뿐.
지금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병사들은 북부연합에서 보내온 병사들로 이 도시에 대해 마땅한 애정이나 책임감이 없는 자들이었다.
“피에르 님. 되었습니다.”
“그래.”
저 멀리서부터 그들의 방만한 자세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경비병들이 느끼기에 오늘의 어둠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더 부드럽고 끈끈한 것이었다.
하나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곳곳에서 들려오는 하품 소리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밤의 부드러움에 경비병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들었습니다.”
눈을 붙인 경비병들은 아주 잠깐이라 생각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흐르는 어둠 위로 평안함의 축복을 실어 보낸 정체 모를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아무런 제지 없이 도시 모시암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모시암······.”
하염없이 졸고 있는 경비병, 부서져 있는 성문. 그리고 그사이를 통과하는 정체 모를 사람들.
한참 지나가던 사람들 속에서 잠시 멈춰선 피에르는 부서져 있는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다 일부러 부순 거란 말인가.”
비쩍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껑충한 키의 남자.
후드를 젖히자 보이는 그의 가슴팍에는 교황청을 뜻하는 낡은 로사리오가 매달려있었다.
※※※※
아침의 운무를 헤치며 걷는 세 사람이 있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를 타고 있는 두 사람.
“헥······ 헥.”
그리고 아무런 탈 것도 갖추지 못한 수인족 남성 한 명까지.
“겨우 그거 걸었는데 숨이 차는 거야?”
“아니, 이게 따라붙기가 좀 힘들긴 하네요.”
“수인족들은 다 체력이 좋다고 그러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그것도 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편견에 사로잡히시면 안 됩니다. 기사님.”
“아니, 지금은 편견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그렇지.”
“······.”
혀를 빼물며 걷고 있던 니벨룬은 슬슬 시작되려는 블라드의 핀잔에 재빨리 입을 닫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심성이 삐딱한 이 기사는 여전히 니벨룬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여기 물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제님.”
“저는 아직 부제일 뿐입니다. 사제라고 부르시면 안 돼요.”
“흐. 그렇다 해도 베푸시는 모습은 이미 훌륭한 사제이십니다.”
쟝이 건네준 물통을 받아든 니벨룬의 귀가 쫑긋거렸다.
니벨룬을 통해 수인족을 처음 본 쟝은 그 모습이 내심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중이었다.
“좀 있으면 모시암이니까 거기에서는 입 닫고 있어라.”
“네.”
“저번 마을에서처럼 하고 싶다고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주저리지 말고.”
“······네.”
핀잔인지 경고인지는 모르겠으나 블라드가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은 안 하겠다고 하긴 하는데······.’
며칠간의 여행이었을 뿐이지만 블라드는 대충이나마 니벨룬이라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이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내.
니벨룬이라는 사내는 평소에는 정상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자기가 매진하는 분야에서만큼은 광인의 모습처럼 돌변해버리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블라드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 앞에 정지! 말에서 내려 신분을 밝히시오!”
투덕거리며 걷는 와중에도 목적지는 가까워졌고, 드디어 저 멀리 짙은 안개 너머에서 보이는 성벽이 있었다.
모시암. 사특한 존재를 품고 있던 도시.
그곳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성문 앞으로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고서는 길을 막아 세웠다.
“수인족?”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희 처음 뵙지요?”
상황에는 맞았으나 어딘가 꺼림칙한 니벨룬의 인사.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 말했건만 기어이 경비병에게 말을 거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도시는 처음인가?”
“그러게요. 처음이지만 꼭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부서진 성문이 아주 멋지네요.”
“······.”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데는 아주 잠깐의 대화만 있으면 된다.
이미 경비병은 니벨룬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 어그러진 조각들을 발견하고 말았다.
마치 저주처럼 들렸던 저번 마을에서 경고처럼 니벨룬은 타인의 세계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 남자. 말에서 내려 신분을 밝히시오.”
새파랗게 젊은 기사와 어린 부제, 그리고 어딘가 이상한 수인족 사내.
안개 속에 있었을 때보다 더 수상해 보이는 조합을 보며 모시암의 경비병들은 가차 없이 창을 내리 세웠다.
“꼭 내려야 하나?”
“잔말 말고 내려오시지. 수인족까지 끌고 왔는데 얌전히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하긴, 그건 그렇긴 하지.”
하긴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도 한껏 웃고 있는 니벨룬의 표정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 어딘지 모르게 기이해 보였으니까.
굳이 환영받지 못하는 수인족이라 할지라도 니벨룬의 지금 모습은 충분히 제지할 만한 것이었다.
“여기에 온 목적과 신분을 밝혀라.”
“잠시만. 여기에 넣어두었었는데.”
수상한 자들을 앞에 둔 경비병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정작 앞에 있는 블라드의 말투는 태연할 뿐이었다.
“아아. 여기 있군.”
니벨룬이 이상하면 어떻고 쟝이 어리면 어떻단 말인가.
성문을 드나들 자격조차 없어 개구멍을 파고 다니던 소년은 이제 더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블라드는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도 닫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잠깐만 받아봐.”
“응?”
너무나 자연스럽게 건네는 물건들.
무심히 건네는 물건들이었으나 정작 그 물건들을 확인한 경비병은 점점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쇼아라에서 만든 증명서고······. 참고로 바예지드 백작님이 직접 직인 하신 거다.”
“끄윽.”
“그리고 이건 주교 안드레아 님이 보내시는 확인서고.”
“흡!”
“나는 블라드라는 기사인데. 잠깐만, 폼멜에 바예지드의 문장이 새겨져 있거든.”
바예지드 백작이 직접 임명한 기사이자 주교 안드레아가 보증하는 어린 부제의 인도자.
그리고 이미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북부의 기사. 블라드.
“이 신분패는 바르나 교회에서 직접 내어준 것인데 여기도 보면 안드레아 님의 보증이 새겨져 있고.”
“죄송, 죄송합니다······.”
경비병을 바라보는 쟝의 얼굴이 안쓰럽게 변해갔다.
블라드가 주섬주섬 꺼내는 증명들은 일개 성문지기가 받아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들이었으니까.
블라드가 품 안에서 무언가 하나씩 꺼내 들 때마다 주위에 있던 경비병들의 얼굴이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지나가도 돼?”
“제발 지나가 주십시오······.”
경비병들을 보며 웃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이 여전히 소년 같았다.
마치 빛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
블라드는 성문을 지나며 그 위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안개가 가득해 확실히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개중에는 확실히 낯익은 깃발들도 몇몇 걸려 있었다.
‘바라노프, 바예지드, 그리고 하이날이라······.’
북부를 대표하는 7개의 깃발.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우트만의 깃발이 내려간 대신 새로이 하이날의 깃발이 걸려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처럼 도시 모시암은 현재 어떠한 영주의 지배 없이 북부연합이라는 공동체의 이름 아래 관리되는 중이었다.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과하게 군기가 들어버린 경비병들의 안내를 따라 들어선 모시암은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해 보였다.
분명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였으나 주위에는 문 하나 열어놓지 않은 가게들뿐.
짙은 안개 때문인지는 몰라도 왕래하는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아 괴이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네요······.”
“그렇기에 부제님께서 이곳으로 오신 겁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의 말씀이 필요한 도시이니까요.”
블라드는 낯선 도시의 모습에 움츠러드는 쟝을 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해주었다.
블라드의 말처럼 도시 모시암은 현재 북부의 그 어느 도시보다 신의 위로가 필요한 곳.
안드레아가 말하기를 쟝뿐만 아니라, 때가 된 대부분의 부제는 거의 대부분 이곳 모시암으로 향할 거라고 했었다.
“안개 가득한 모습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분명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바로 떠나실 건가요?”
여태까지는 씩씩한 척하고 있었어도 쟝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뿐.
여태껏 자신을 든든히 지켜주었던 기사의 임무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쟝은 불안한 듯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가지는 않고 아마 당분간은 여기에 있을 겁니다. 한 일주일 정도는요.”
“아. 다행이네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홀로서기의 시작이기는 하겠으나 아직 어린 부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시기이기도 했다.
‘잘 좀 보살펴주게.’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굳이 자신을 쟝에게 붙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임무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보호자가 필요했던 것이겠지.
교회의 규칙에 얽매여 있기는 했으나 어린 아기 때부터 키워온 어린 부제는 안드레아에게 있어 제자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존재였으니까.
“잠시.”
“네?”
그래서 지금 블라드는 쟝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도시로 들어선 순간부터 인도자의 임무는 끝이었으나 블라드는 여전히 쟝의 보호자를 자처하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앞에 있는 경비병. 잠시 멈춰라.”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제지에 당황하는 쟝과 경비병.
그러나 수인족인 니벨룬만큼은 귀를 쫑긋거리며 안개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를 쫓고 있었다.
“누군가 울고 있는데요.”
“······.”
“여자인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여인의 울음소리였다.
얕고 낮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울음소리.
안개와 여인, 그리고 울음소리를 확인한 블라드는 언젠가 겪어본 듯한 기시감을 느끼며 천천히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흑, 흑흑······.”
아무도 없는 도시의 대로 한 가운데.
이제야 다가온 울음소리를 확인한 쟝과 경비병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 좀 찾아주세요. 아저씨 제 아이가요······.”
도시의 자욱한 안개를 뚫고 나온 것은 울고 있는 어느 여인이었다.
비어 있는 포대기를 등에 업고 있던 여인은 경비병을 확인하고는 쓰러지듯 그에게 기대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분위기는 비슷했으나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 울고 있는 여인은 사특하지도 그렇다고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도 않았다.
“아아, 이게······.”
할 수 없이 우는 여인을 안아 든 경비병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블라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 도시에는 이런 미친 여자들이 꽤 있습니다.”
“왜?”
“그것이······.”
다급하게 다른 병사에게 여인을 넘겨준 경비병은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이곳에 있던 사특한 존재가 어린아이들을 많이 해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울고 있던 여인은 어느새 쟝을 향해 다가가 업고 있던 포대기를 가져다 대었다.
그곳에 들어갈 리 없는 쟝이었으나 울고 있는 여인은 비어 있는 포대기의 부재가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지금 이 도시에는 딱 지금 부제 님 나이까지의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있어도 부모들이 밖으로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지요.”
“······그래?”
블라드는 병사들에 의해 점점 멀어지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자신의 가슴팍을 쓰다듬어 보았다.
엘프들에게 받았고 드워프들의 수리해 준 갑옷.
예전보다 더 따뜻해진 그 갑옷의 가슴팍에는 여전히 산 로지노에서 받은 글귀가 남아 있었다.
※※※※
“죄송합니다. 지금 단장님께서 부재중이시라.”
“갑작스레 왔으니 이해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이제는 주인 없는 자리가 된 시청에는 현재 북부정교회에서 온 성기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흐음······.”
임무 때문에 나갔다는 단장을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은 블라드는 금세 삐져나오는 하품을 억눌렀다.
‘너무 졸린데.’
어느새 어깨를 기대며 잠들어 있는 쟝과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손가락으로 나른한 눈물 몇 방울을 찍어내며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잠은 무거웠고 눈꺼풀은 점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으······.”
차가운 바깥과는 다르게 훈훈한 건물 안의 공기.
요 며칠간 지속해온 야영과 이제야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도감까지.
언제 올지 모르는 단장을 생각하며 팔짱을 낀 블라드는 그만 고개를 떨군 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즐겁게 노래하는 성냥 주위를 돌자.
새빨갛던 머리가 시꺼멓게 될 때까지.
부르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
어둡지만 밝은 곳.
축제라도 벌어진 것일까.
저 앞에서부터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늪처럼 빠져든 꿈속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하나 있었고 그 모닥불은 잔잔한 불꽃을 품은 채 어두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
꿈속의 공간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안락한 곳이었다.
이곳은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다.
그런 기분을 느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앞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처럼 웃음을 짓고 말았다.
뒷골목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언제나 춥고 배고팠던 그곳에서 고통스러워했던 블라드는 모닥불이 주는 온기에 이끌려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 모닥불 안에는 어렸을 적 블라드가 굶주려 했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따스한 수프, 지붕 있는 거처, 포근한 담요, 그리고 어머니의 웃음까지.
그것들 모두가 모닥불 안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부르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부르던 모두가 넘어질 때까지.
[블라드!]
“······!”
순간, 찢어지게 아파지는 어깨.
꿈속이었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 블라드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 이 도시에서 나가라!]
그리하여 돌아본 그곳에는.
얼굴이 새까맣게 칠해진 정체 모를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2)
타오르는 모닥불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했고 주위에 깔린 어둠은 푹신한 카펫만큼이나 안락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향하고 싶을 만큼 편안하고 그리운 것들이었다.
“······!”
하지만 지금 블라드는 뒤가 아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어서 나가라 외치는 누군가.
얼굴 없는 사내의 목소리는 여태껏 블라드가 찾아 헤매다녔던 그 소리였으니까.
[블라드!]
고딘에 대한 복수와 요제프와의 계약도 끝낸 지금, 블라드에게 남아있는 것은 단 하나의 약속뿐이었다.
그것은 목소리의 이름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약속.
블라드는 그 약속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래.]
오랜만이라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남자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흔들던 손을 내려놓았다.
역광에 가려져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블라드는 그가 자신을 향해 반갑게 웃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
“블라드, 블라드?”
“······으으.”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뼛속까지 시린 오한이었다.
마치 몸살이라도 앓은 듯 온몸은 욱신거렸고 내뱉은 숨결은 입김이 서릴 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분명 꿈에서는 따뜻한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유스티아?”
“오랜만이네요. 블라드.”
이제야 겨우 맞춰진 초점 앞에는 찰랑거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
그녀의 눈빛에는 방금의 오한을 걷어주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었나 봐요.”
산 로지노의 성기사 유스티아.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함께 했던 그녀는 지금 걱정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블라드의 턱 끝을 쓰다듬었다.
블라드가 덜덜 떨며 만들어낸 땀방울을 닦아주기 위함이었다.
“······혹시 꿈을 꾸셨나요?”
“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유스티아의 얇은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한 줄기의 불안 또한 같이 맺히기 시작했다.
“일단 깨워.”
“네.”
순간, 유스티아의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주위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부제 님! 일어나세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블라드에게 있어 버거울 정도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사내들의 목소리와 기도문.
날카로운 소리의 진동들이 블라드의 귓가를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고개를 돌려 바라본 옆에는 당황한 듯 굳어있는 니벨룬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쟝의 모습까지도.
성기사들의 거친 흔듦에도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어린 부제는 마치 잠꼬대라도 하듯 희미한 노래 가사를 되뇔 뿐이었다.
“······성냥을 , 계속.”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은 단어들.
쟝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성기사들의 기도문을 뚫고 블라드의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성냥?’
쟝의 희미한 노랫소리에 맞춰 블라드의 갑옷과 검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꿈속에서 목소리가 블라드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 세웠던 그때의 뜨거움이었다.
※※※※
“만나서 반갑네. 나는 북부정교회 제2 기사단장인 귄터라고 하네.”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입니다.”
안개가 깔려 있어서 그런지 한낮이었음에도 집무실에는 제대로 된 볕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블라드는 지금 창문을 등지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블라드. 익히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청록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
자신을 귄터라 소개한 남자는 현재 도시 모시암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오히려 내가 더 영광이지. 악수나 한 번 하세.”
블라드는 테이블 너머로 건네오는 손을 바라보았다.
검을 잡는 검사라 하기에는 상처 하나 없이 너무나 매끄러운 손이었다.
“무사히 안드레아 님의 부제를 이끌고 와주어서 고맙네.”
“쟝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러나 블라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앞에 있는 사내의 겉모습이나 자신을 향한 공치사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잠들어있다고 하던데요.”
“······아마 저녁까지는 잠들어있을 걸세.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말이지.”
곤란한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귄터는 서랍 안에서 큼지막한 궐련 하나를 꺼내고는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무엇에 관한 조사입니까? 모시암은 아직 정화되지 않은 겁니까?”
“그것에 대해 제대로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교황청에 있겠지.”
폐 속 깊숙이 잡아당긴 연기가 천천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조사하러 온 사람들이고.”
“······.”
허공에 퍼지는 담배 연기가 안개를 피해 겨우 스며든 빛무리를 가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불명확한 도시.
주위에 떠도는 어두운 안개가 블라드로 하여금 자꾸 신녀가 보낸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부제 님을 데려가겠습니다.”
“그 아이는 북부정교회 소속이야. 자네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세.”
“저는 주교님으로부터 부제 님의 안위를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그 주교조차 우리 소속이지.”
탁-
살짝 내려친 책상 위로 단장이 끼고 있는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북부정교회에서도 단 두 명밖에 없다는 기사단장직을 뜻하는 반지.
아마 그 권위에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지금 이 자리에 아무도 없을 터였다.
“다시 한번 부제를 이곳까지 데려와 줘서 고맙네. 그 아이에 관한 모든 신변은 지금부터 우리가 맡도록 하지.”
“······.”
감히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려 하는 블라드를 보며 귄터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일개 기사로는 감히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로 고매(高邁)한 성기사들의 대장.
그러나 지금 블라드는 담배 연기 너머에서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중이었다.
“나가보게.”
“······도시 모시암은 북부연합의 땅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으나 완수하지 못했다.
주교 안드레아는 쟝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고 인도자인 블라드는 아직 어린 부제를 인계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블라드에게 있어 귄터가 갖는 권위는 그저 부차적일 뿐이었다.
“저는 북부연합에 소속된 바예지드의 기사로서 마땅히 자격이 있음을 압니다.”
“무슨 자격?”
블라드를 바라보는 귄터의 눈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눈앞에 있는 이 새파란 녀석은 자신의 앞에서도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었다.
“지금부터 수사권(搜査權)을 발동하겠습니다.”
“뭐?”
기사가 가지는 것은 의무와 책임만이 아니다.
기사가 가지는 고유한 권리들.
기사 블라드는 바예지드의 깃발이 나부끼는 이 땅 위에서만큼은 그 권리들을 행사할 자격이 있었다.
“저에게 쟝을 데려가려 하는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지 않으시니 이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거 소문보다 더하군.”
흐르는 담배 연기와 함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침묵의 주인인 귄터는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
“꼴통이라더니.”
“칭찬 감사합니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궐련이 황당한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하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주교 피에르가 발행한 면죄부조차 찢은 녀석이라고 했다.
※※※※
“블라드.”
“유스티아 님.”
시청을 나선 블라드와 니벨룬에게로 유스티아가 다가왔다.
“이제 돌아가시나요?”
“아니요.”
“하긴, 좀 쉬다 돌아가긴 해야겠죠.”
“······그건 아니고.”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지 블라드를 대하는 유스티아의 태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방금 귄터와 한 판 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 블라드였다.
“그나저나 쟝은 왜 아직도 깨어나지를 못하는 겁니까? 데려온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데요.”
“아아.”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갈지 헤매는 블라드를 보며 유스티아가 자연스레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자연스레 따라가기 시작하는 블라드와 니벨룬.
어두운 안개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백금발의 머리가 블라드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요. 저희도 모시암의 이변을 알아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이변이요?”
블라드의 물음에 뒤돌아본 유스티아가 물끄러미 니벨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아니요.”
“······.”
너무나 단호한 블라드의 대답에 유스티아는 할 수 없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홀로 안개 속에 서 있는 니벨룬은 뻘쭘한 듯 귀를 쫑긋거릴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가가 있을 때는 도시가 봉쇄되어 있어서 사정을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도 교황청이 나섰다 하길래 저희는 사특한 흔적 몇몇 정도만 남아있을 줄 알았죠.”
안개 너머에서 쫑긋거리는 니벨룬을 향해 눈짓으로 경고를 보낸 블라드는 귓속말로 전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희미하지만 사특한 존재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지만요.”
우트만 남작령에 선포된 성전(聖戰)은 규모만 보자면 대단한 것이었다.
북부연합을 일으키려 했던 강철공조차 움찔할 정도로.
하지만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뿌리가 자리 잡고 있었고 북부정교회는 이제야 그 뿌리의 실체를 확인한 참이었다.
“그래서 쟝은······.”
“그래서 당신이 데려온 부제를 조사해 봐야 해요.”
짙은 안개에 가려져 모든 것이 희미해진 지금, 성기사들의 앞에 있는 유일한 단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어린 부제뿐이었다.
“좋지 못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쟝이라는 부제는 저희가 찾는 근원과 연결이 되었어요. 아마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주 같은데······.”
결과가 있다면 시작이 있을 것이며 그것들이 연결된 실타래를 따라가는 것이 수사의 기본일 것이다.
아마 귄터는 쟝이라는 존재를 단서 삼아 모시암에 퍼져 있는 사특한 뿌리를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데.”
전할 것을 전한 유스티아는 이제는 아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넌지시 건네왔다.
그 의문은 방금 말한 저주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혹시 블라드도 이상한 꿈을 꾸었나요?”
“꿈이요?”
“네.”
성기사들이 이곳 모시암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조사는 아이들에게만 발생했던 기이한 전염병에 대한 조사였다.
해가 뜨면 잠들고 해가 지면 눈을 떴다던 모시암의 아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같은 꿈을 꿨다고 했었다.
“무슨 모닥불이 나오고, 아이들이 다들 노래를 부르고 있고. 그런 꿈이요.”
“······.”
“아이들이 죽기 전에 부모들에게 그런 꿈을 꿨다고 한 증언이 있거든요. 혹시라도 꿈을 꿨다면······.”
아이와 어른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꿨다는 꿈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신의 꿈을 떠올리며 블라드는 그만 아찔한 낭패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런 젠장.’
해가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아직도 잠들어있는 어린 부제.
안드레아가 부탁한 그 아이는 아직도 모시암의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
“좋아. 따로 말 안 해줘도 대충 사정은 알아들었지.”
유스티아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교회에서 여전히 잠들어있는 쟝을 확인한 블라드는 이제 여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안개가 가득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제 해가 지는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마법사라며 뭔가 짚히는 건 없어?”
“어, 음.”
블라드의 물음에도 니벨룬은 여전히 자신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안개처럼 잡을 수 없는 것에 저주를 숨긴 것 같습니다. 실체가 없으니 붙잡을 수도 없겠지요.”
“아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어트린 블라드는 이빨을 세우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방법 없냐고. 없으면 너는 내일 여기에서 바로 나가는 거야.”
“오! 안됩니다. 그건!”
블라드의 협박이 제대로 먹혔는지 니벨룬의 호박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실 저도 성기사들이 하는 방법을 추천 드립니다. 저주의 방식이 어찌 되었든 간에 쟝이라는 실체에 묶인 것이니까요.”
“그럼 쟝은?”
“쟝은 뭐······.”
블라드의 물음에 니벨룬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내버려 두면 좋지는 않겠지요.”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너 당장 나가.”
도움이 될까 싶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볼까 했더니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데리고 있을 필요는······.
뿍- 뿍뿍뿍-
“그거 뭐야.”
“훈증기입니다. 보통 벌을 쫓으려 양봉꾼들이 쓰는 물건이죠.”
협박에 몸이 달았는지 니벨룬이 서둘러 가방에서 꺼내든 물건은 블라드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건 왜?”
“안개란 본래 있는 것을 가리는 존재이지요. 의도가 뻔한 것입니다.”
뿍- 뿍뿍-
니벨룬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경망스러운 소리와 함께 훈증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설명과는 전혀 다르게 훈증기의 주둥이에서는 전혀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장 났어?”
“그런가 싶어 시험해 봤는데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손잡이를 당기는 것이 힘든 모양인지 니벨룬이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그가 굳이 왜 이런 수고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없어지네?”
“거짓된 안개라서 그렇습니다. 이 훈증기는 그런 용도라서요.”
아무도 없는 도시의 대로 한 가운데서 블라드는 있는 힘껏 훈증기를 흔드는 니벨룬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경망스러운 소리가 커질수록 점점 맑아지는 주변의 풍경.
고양이의 신기한 물건은 안개를 빨아들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3)
뾱뾱뾱-뾱!
누구는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했다.
그리고 지금 도시 모시암에서는 가장 어두울 시간에 무거운 안개를 헤치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아주 경망스러운 소리와 함께.
“이거 언제까지 당겨야 하는데?”
“찾을 때까지입니다.”
“언제 찾는데?”
“보일 때까지겠죠?”
“······.”
쉴 새 없이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블라드의 이마에는 이미 자그마한 혈관이 떠올라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훈증기였으나 무섭도록 뻑뻑한 것이 블라드의 악력으로도 오래 쥐고 있기는 힘든 물건이었다.
“어쨌거나 빨리 찾아야 한다고. 지금 우리 상태가 영 수상하거든.”
“동의하는 바입니다.”
블라드의 말처럼 지금 둘의 모습은 경비병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감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수상한 차림이었다.
기이해 보이는 까마귀 가면을 쓴 니벨룬과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블라드.
지금 이들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이나 둘에게도 이렇게 차려입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마스크는 벗으시면 안 됩니다. 훈증기 안에 있는 것은 독초(毒草)예요.”
“알았다니까.”
은근슬쩍 마스크를 벗으려 하는 블라드에게로 날카로운 경고가 날아들어 왔다.
거짓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그보다 악독(惡毒)한 것이 필요한 법.
거짓된 안개를 불태우는 훈증기 안에는 니벨룬이 특별히 제작한 독초 가루들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고양이 자식.’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지금과 같이 낯선 상황 앞에서는 블라드라 할지라도 길잡이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마법사인 니벨룬은 길잡이를 해낼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잠시만요.”
“찾았어?”
잠시 멈추라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기사의 자존심이 있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뻑뻑한 훈증기를 잡아당기는 일은 블라드로서도 충분히 버거운 일이었다.
“······네. 찾은 것 같습니다.”
니벨룬은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자그마한 봉제 인형.
만든 사람의 손재주가 영 좋지 않아 단추로 만든 눈이 덜렁거리고 있었으나 춤추는 움직임만큼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기로군요.”
“흠.”
춤추는 인형이 가리키고 있는 곳.
골목 벽에 바짝 기댄 블라드와 니벨룬은 인형의 뭉특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
두 사람의 시선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바람에 흔들려 천천히 삐걱거리고 있는 표지 하나가 있었다.
-성 포커스 공동 묘지-
거짓된 안개를 불태우며 인형의 안내를 따라온 그곳은 도시 모시암에 마련되어 있는 공동묘지였다.
“왜 안 들어가십니까?”
“계속 네가 앞장섰잖아.”
“목적지를 찾았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앞장서시죠.”
“······생각해보니까 나는 고양이가 싫었던 것 같아.”
역시 개가 최고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자리를 바꾼 블라드와 니벨룬.
묘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모시암의 아이들에게 퍼졌던 기이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증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깊은 잠, 같은 꿈, 그리고 점점 내려가는 체온.
그리고 여기, 지금 막 깨어난 어린 부제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추우세요? 이불 좀 가져다드릴까요?”
“흐으으으······. 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몸서리를 치는 쟝을 보며 주위에 있던 성기사들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곳 모시암에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가득했고 그들이 토해내듯 말하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 쟝이 보이는 행동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혹시 꿈속에서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는 못했나요?”
떨고 있는 쟝의 어깨를 감싸 안은 유스티아는 소년이 겁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 버렸다.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성기사들과 자신이 하는 말을 빠짐없이 적어 내리는 사람들.
아무리 멍청한 아이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그게.”
“말해보세요.”
유스티아의 목소리는 따뜻했으나 쟝의 입술은 그저 우물거리기만 할 뿐.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만 어린 부제는 낯익은 금발 머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도움을 구하는 듯한 소년의 눈빛에 블라드는 조용히 침대맡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해보세요. 부제님. 말하시지 않으면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블라드는 불안에 떠는 쟝의 어깨를 붙잡고는 곧은 눈빛으로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보세요. 저는 아직 부제 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아의 부탁으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해 준 인도자.
너는 아직 내 소관이라 말하는 블라드의 말에 흔들리던 쟝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사특한 기운은 잘 모르겠지만······.”
“네.”
“확실히 느껴지는 건 있었습니다.”
평범한 아이가 아닌 주교 안드레아의 직속 부제.
오랫동안 신의 품에서 자라온 소년이 증언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모닥불, 그 안에서는 분명 신성함이 느껴졌었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쟝의 대답에 질문하던 유스티아도,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귄터도 모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안락했던 모닥불.
어린 부제는 그 안에서 신성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신성한 기운이라니.”
“이게 도대체.”
불길한 꿈에 섞여 있는 신성한 기운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쟝의 대답에 모두가 동요하는 가운데 홀로 재빨리 움직이는 남자가 있었다.
“익!”
“수고하셨습니다.”
쟝은 갑작스레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쟝을 감싸 안은 블라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좀 쉬세요.”
“······네.”
당황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린 부제를 쓰다듬어주는 블라드의 손끝에는 어느새 축축이 젖어있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려있었다.
쟝의 머리카락이었다.
※※※※
“제가 건 저주가 가리키는 곳이니 확실합니다. 앞장서시죠.”
“알았다니까.”
지금도 춤추고 있는 인형에는 쟝의 머리카락이 묶여 있었다.
불길한 마법사, 죽음을 쫓는 역병 의사.
꿈으로 전염되는 저주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니벨룬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도 쟝에게 저주를 거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테니까요.”
“나도 안다니까.”
정체 모를 꿈의 끝에 자신의 실을 묶어낸 니벨룬은 블라드가 원한대로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방금 니벨룬이 말한 것처럼 블라드가 앞장서야 할 때였다.
‘지원을 불러올 수도 없고······.’
소속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였다.
모시암을 감도는 저주는 안개 속에 숨어 있었고 희미한 거품처럼 곳곳을 떠도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애써 찾아낸 이곳조차 조만간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저는 벽을 못 넘는데요?”
“너 고양이 아니야?”
“고양이가 아니라 수인족입니다.”
“······지랄을 하네. 진짜.”
날렵하게 공동묘지의 벽을 올라탄 블라드였지만 밑에 있던 니벨룬은 눈만 껌뻑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 중이었다.
“끄힉!”
“손 많이 가는 놈이네.”
니벨룬을 들쳐업다시피 해 벽을 넘은 블라드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방금의 짜증도 단박에 가라앉혀 버리는 공동묘지의 분위기.
자욱이 깔린 안개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안개가 더 짙어졌어.’
점점 짙어지는 불길함에 항상 정신한 구석이 빠져있는 니벨룬조차도 바짝 긴장한 채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딛고 있는 땅 아래에서 자그마한 진동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비석 사이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둘에게로 들려오는 주문 소리.
누가 들어도 수상한 주문은 묘지의 가장 안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가자.”
“네.”
저주를 풀고 싶은 기사와 죽음을 보고 싶은 마법사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들려오는 주문을 따라갈수록 인형의 춤사위도 격해지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다면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그 눈에도 현혹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셋, 넷?”
“제가 봤을 때는 넷입니다.”
동이 터오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의 공동묘지.
그곳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마법진이 있었다.
망자들의 땅을 겉도는 정체 모를 사내들이 그려놓은 마법진이었다.
“주문을 통해 진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완성하기 전에 막는 게 좋다는 말이군.”
희미하게 들리는 주문이 진행될수록 땅 위에 그려놓은 마법진이 점점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진이 빛날수록 블라드의 마음에도 조급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래도 적을 알고 상황을 파악해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어둠을 가르는 오귀스트의 가르침이 블라드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묘지를 떠도는 사내는 넷.
그중에서 진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둘.
그리고 마법진 안에 놓인 정체 모를 항아리 하나.
“저 항아리 깨트릴 수 있겠어?”
“항아리만이라면요.”
“좋아.”
블라드의 말에 이번에는 배낭에서 주섬주섬 새총을 꺼내 드는 니벨룬.
준비를 마쳤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는 그를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았다.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깊은 심호흡 속에서 예전 목소리가 해주었던 조언 하나가 블라드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감고 있는 블라드의 왼쪽 눈에는 그 어떤 색보다 화려한 황금빛이 깃들어 있었다.
※※※※
“······!”
“누구냐!”
이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 줄기 하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블라드의 일격은 사내들이 감히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컥!”
‘한 놈!’
진 밖에 있던 둘 중 하나를 베었다.
그는 블라드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막아!”
“아니! 주교님부터!”
진 안에 있던 남자가 다급히 검을 빼 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늦었다.
빠악-!
‘둘!’
두 번째 사내는 블라드가 오는 것은 보았으나 미처 검을 뽑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블라드의 색에 현혹되고 말았다.
“성물을 지켜라!”
-꺄아아아악!
일행의 대장인 듯한 남자가 서둘러 항아리를 가리켰으나 수상한 항아리는 니벨룬의 몫이었다.
쏘아낸 새총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쨍강-!
여인이 울부짖는듯한 소리와 함께 깨어진 항아리.
그 안에서부터 퍼지는 향기는 청명한 허브의 냄새였다.
“누군가 했더니!”
순식간에 넷 중 둘을 베어 넘기고 수상한 항아리까지 깨버린 블라드.
무리의 대장인듯한 남자의 앞에 선 블라드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겨눠진 검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는 블라드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피에르 주교!”
“이런 젠장!”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유일하게 제압되지 않은 사내가 다가가려 하였으나 이미 니벨룬의 새총이 그를 겨누는 중이었다.
“당신이 여기서 저주를 퍼트렸습니까!”
“나는 신실한 신의 종이자 교황청의 주교다! 그따위 일을 저질렀을 것 같나!”
“그러면 여기 왜 있는데!”
깨어진 항아리와 제압된 사내들.
그리고 점점 빛을 잃어가는 삼각형의 진까지.
피에르는 자신이 계획한 모든 일을 망쳐버린 블라드를 향해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 온 거란 말이다! 이 멍청한 녀석!”
“그 말을······.”
믿을 리가 있나.
당신은 거짓된 면죄부를 팔고 나에게 그 죄를 덮어씌운 사람인데.
두드드드득-
그러나 블라드는 입가에까지 다다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제 다 글렀다! 이게 네놈 때문이야!”
“······!”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삼각형의 진.
그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이 점점 커지며 기어이 블라드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당신 여기서 도대체 뭐한 거야!”
“끄아아악!”
블라드의 목소리마저 삼킬 정도로 거대한 진동.
그러나 그 진동마저 가르는 누군가의 비명이 있었다.
“살려줘!”
니벨룬의 새총이 겨누고 있던 사내.
그가 지금 허공에 들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의 발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 더미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다! 거꾸로 말하는 신의 뜻!”
기어이 망자들의 땅을 뚫고 나온 거대한 몸체.
가지는 땅으로 뿌리는 하늘로.
그리고 빛 대신 어둠을 먹는 잎사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세상의 법칙을 온통 거꾸로 매달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주교님-!”
파아아악!
허공에서 애처로이 울고 있던 사내가 기어이 뿌리를 따라 반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내장들이 깨어진 항아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저게 도대체······.”
“이제는 도망도 못 치겠군!”
블라드와 니벨룬, 그리고 피에르만이 서 있는 망자의 땅.
그 아래서 그려진 삼각형의 진은 그저 희미한 빛만을 내뿜고 있을 뿐.
“살아남고 싶으면 도와라! 진을 완성해야 해!”
“블라드 님! 빨리합시다! 여기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진을 완성해야 한다며 소리치는 피에르의 말에 사태를 파악한 니벨룬은 서둘러 블라드를 삼각형의 꼭짓점 한 곳에 세워놓았다.
“뭐 어쩌라고!”
“오러를 뿜어라!”
재빨리 깨어진 항아리 자리를 찾아 들어간 니벨룬.
자신이 베어 넘긴 사내의 자리에 서 있는 블라드.
“네놈이 그렇게 자랑하던 자신만의 세계를 불러일으키란 말이다!”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는 피에르.
삿된 나무 앞에 서 있는 세 사람.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릴지라도······.
목소리는 말했었다.
사특한 저주를 깨트릴 방법은 오직 세 가지뿐이라고.
-당신과 함께한다면 나를 지켜보는 그 눈에도 현혹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
그리고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서 외치는 기도문이 모시암의 안개를 따라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빛나는 삼각형의 진.
그것은 삿된 존재를 내쫓는 퇴마진(退魔陳)이었다.
맞닿은 세계
마땅한 주인이 없어 슬픈 도시가 있었다.
일곱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도시.
아이 잃은 부모들조차도 숨죽여 우는 도시였지만 그곳에는 밤 깊은 지금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집무실이 하나 있었다.
“······찾을 수가 없군.”
흐릿한 촛불 아래서 눈을 찌푸리고 있던 귄터.
그는 지금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를 펼친 채 무엇을 찾느라 집중하는 중이었다.
“도저히 맞는 것들이 없어.”
그가 지금 펼친 두툼한 책은 구마전서(舊魔全書)라는 것으로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마(魔)들을 기록해놓은 책이었다.
그러나 교단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책을 뒤적이면서도 귄터의 표정은 도통 풀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마(魔)인가?”
모든 사특한 것들은 그 흔적을 남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할 수 있고 의도를 통해 숨길 수 있지만, 그 본류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귄터는 구마전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모시암을 감도는 사특한 기운은 교단의 긴 역사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존재라는 것을.
쿠우우우웅-!
“큿!”
책을 덮으며 한숨을 내쉰 귄터는 순간 발밑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진동에 비틀거리며 책상을 붙잡고 말았다.
“지진인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떨어져 내리는 집무실의 집기들.
그러나 귄터는 지금 발밑에서 울리는 진동보다도 안개를 타고 퍼지는 섬찟한 기운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
다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본 귄터.
그가 창문을 열자 처음으로 맞이한 것은 따끔하게 달라붙는 안개의 느낌이었다.
마치 날이 선 듯한 그 느낌에 귄터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갑작스러운 사태에 서둘러 성기사들을 깨우려 했던 귄터였지만 이윽고 벌어진 광경은 그조차도 그만 넋을 놓게 만드는 것이었다.
“장엄······구마(莊嚴驅魔)?”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저 멀리 도시의 변두리에서 그 어둠을 꿰뚫는 빛의 기둥이 있었다.
아직은 옅고 가늘었지만 분명 하늘에 닿은 그 기둥은 안개로 만들어진 바다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등대였다.
※※※※
“······!”
입으로는 쉼 없이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피에르의 눈만큼은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비천한 수인족 마법사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금발 녀석.
그러나 둘을 바라보는 피에르의 눈에는 분노가 아닌 그저 색다른 이채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피에르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땅속에서 갑작스레 튀어 오른 사특한 나무도 그랬지만 그것보다 피에르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빛의 기둥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라고!”
여기까지 뻗으리라 상정한 퇴마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퇴마진 위로 떠 오른 장엄구마의 기둥은 피에르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빛나는 것이었다.
“저희가 서 있는 이 진(陣)은 일종의 증폭진입니다! 모서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입니다!”
당황스럽기는 니벨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신비를 쫓는 마법사는 지금 자신이 밟고 있는 진(陣)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베라는 것이지요! 저놈을요!”
피에르의 기도가 커질수록 장엄구마의 빛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깨어진 항아리를 보며 눈치껏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니벨룬은 서둘러 수인(手印)을 짚으며 신성의 빛을 신비의 선으로 잇기 시작했다.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점과 선이 맞닿고 선과 점이 이어지는 삼각형.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는 마지막 모서리에는 바로 블라드가 서 있었다.
‘끄으으으!’
잡고 있는 세계수의 검이 뜨거워진다.
다만 그 뜨거움은 고통이 아닌 깨어지려 하는 껍질의 울부짖음이었을 뿐.
커다란 진동이 울리는 것은 도시 모시암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계를 접한 블라드의 세계도 지금 함께 흔들리는 참이었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안팎으로 맞닥뜨린 사태에 블라드는 덜컥 겁이 났지만 그렇다 해서 쥐고 있던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끄르르르아아아---!
이변을 알아챈 거꾸로 선 나무가 울부짖기 시작했으니까.
안개를 구름으로, 땅을 하늘로 삼은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는 옳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빛의 기둥을 향해 날카로운 뿌리를 치켜들었다.
“블라드 님!”
“이 멍청한 녀석! 빨리 휘둘러라!”
기도문과 주문식 사이에서 피에르와 니벨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과 신비의 세계는 내면에 있었고 다가오는 위협은 현실에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쳐 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파랗게 달아오른 블라드의 검뿐이었다.
“이런 젠장!”
어둠보다 더 짙은 뿌리의 그림자.
머리 위로 드리워진 파멸의 시작을 본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검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새까맣게 다가오는 세상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존재였다.
[······!]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아직은 어색한 나에게도.
[세계의 경계면을 접어라! 서로가 기대게 해!]
“······!”
경계에 접한 신성과 신비 덕분에 마구 뒤흔들리던 블라드의 세계.
그 세계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거품 하나가 드디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흔적만이 남아있는 그 세계의 이름은 바로 목소리였다.
[너의 세계에 높이를 더해라!]
나의 세계는 점.
너와 닿은 것은 선.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면.
그것들이 기대면 만들어지는 것은 또 다른 세계.
소년의 세계는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읏!”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의 조언을 따라 블라드의 세계가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접해진 면을 따라 신성을 접고 신비를 접고 나의 세계를 접어 만들어낸 삼각뿔.
그렇게 하늘을 향해 올라서는 블라드의 세계는 마치 나무의 형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크아아아-!
하늘에 닿았던 장엄구마의 빛이 급격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마치 삼각뿔의 가장 높은 곳에 맺히는 빛무리처럼.
그러나 좁혀진 만큼 날카로워진 빛은 여전히 블라드의 검 끝에 매달려 있었다.
“끄으으으!”
태산보다 무거운 빛을 짊어진 블라드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자그마한 조언과 격려일 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누구라도 옳게 휘두를 수 있다.
"으아아아!"
검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가느다란 선.
하늘에 닿았던 빛이 도시 모시암의 위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하나의 반원을 만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신성에서 시작해 신비가 이끌고 가능성이 그어낸 궤적.
온통 거꾸로 되어있는 나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향해 가련한 뿌리들을 내뻗을 뿐이었다.
촤악-!
동이 터오는 도시의 공동묘지 위.
그곳에는 지금 검붉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통 거꾸로 되어있었으나 흐르는 피만큼은 온전히 땅을 향해 내리고 있었다.
※※※※
“······이건 도대체.”
서둘러 성기사들을 이끌고 공동묘지에 도착한 귄터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온통 검붉은 핏물로 가득한 공동묘지.
딛는 땅이며, 보이는 묘비며 모조리 새빨갛게 칠해진 땅 위에서 귄터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블라드 경.”
“끄응.”
터오르는 동이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는 퇴마진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세 사람.
그 셋 중에서도 가장 큰 부담을 짊어졌던 블라드는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누워서 귄터를 맞이했다.
“범인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범인?”
“아이들을 데려간 범인이요.”
귄터는 블라드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반쯤 갈라져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마치 백 년은 자란 것만 같은 커다란 나무였다.
“······숨을 쉰다?”
그러나 귄터는 그 나무를 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핏물을 뱉어내는 그 나무는 이곳에 있는 성기사들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쿨럭······. 흐. 이 멍청한 녀석.”
성기사들 모두가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에 정신이 팔린 사이, 피에르 주교는 기어 오듯 지친 몸을 이끌고 와 조용히 블라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옛날 소드마스터는 신의 뜻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는데, 너는 고작 주교 한 사람의 신성조차 감당하지 못했구나.”
“······.”
나무를 갈랐으니 기뻤고 살았으니 다행이었으나 블라드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숨어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끄집어내기 쉽지 않을 거다. 이제 어쩔 거냐?”
“좀 닥치시지.”
지금도 피를 토해내고 있는 뿌리의 옆에는 짙게 자리 잡은 핏자국이 하나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잡아끈 듯 주욱 늘어진 핏자국 끝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이 하나 파여 있었다.
감히 쳐다보기도 두려운 그 깊은 구멍은 온통 거꾸로 된 나무가 기어올랐던 곳이기도 했다.
“······후.”
불안의 구멍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나무는 놓치고 옆에 있는 피에르는 이죽거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블라드는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잘했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
지금은 다시 들리지 않지만 아직 귓가에 남아있는 목소리의 격려는 분명 잘했다고 말해주었었다.
가만히 그 소리를 되새겨 본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떠오르는 오늘의 아침 해가 블라드의 금발에 머무르고 있었다.
※※※※
제국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그 숲이 있었다.
정확히는 북부의 우트만 남작령과 도브레치티가 있는 중부 변경지대를 접하는 숲.
마치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 정확히 두 지역을 가르던 그 숲은 너무나 넓고 깊어 모험가들조차 들어가기를 꺼리는 그런 곳이었다.
“아아······.”
그곳 한가운데 있는 무너져 가는 저택에서 어느 여인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모으던 중이었다.
“도대체 누가 내 아이들을 괴롭혔을까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들인데.”
정당한 거래를 통해 겨우 뿌린 씨앗이었건만.
북쪽을 향해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다친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 되겠어요. 제가 직접 가봐야겠어요.”
분명 서 있었으나 땅을 딛지 않은 그녀의 발끝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묶인 듯 둥실 떠 있는 그녀의 발끝은 살아있는 것들이 거쳐야 할 땅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같이 가주실 거죠? 저기 북쪽에는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것도 있답니다.”
무너져 가는 저택 안에는 죽었어도 죽지 않은 자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자는 따로 있었다.
“저기 용이 있어요. 당신이 죽이려 했던 그 용이요.”
“······.”
속삭이듯 전하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뜨는 남자.
그러나 그가 눈을 뜨는 이유는 같이 가자 말하는 그녀의 말보다 귓가에 들려오는 하나의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
“그래요. 용이요.”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잔뜩 갈라져 있는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듣기에는 거북했어도 외치는 단어만은 확실했으니.
용이라는 단어에 감았던 눈을 뜬 남자.
새하얀 백발이 가리고 있는 그 눈에는 아무런 빛도 담지 못한 회백색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사람들 (1)
텅 비어있는 감옥 안에서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겨울의 차가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돌바닥이었지만 그럼에도 경건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주교 피에르는 감옥 안에 자그맣게 뚫려 있는 창을 보며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이 일을 드라굴리아가 방조하고 있었다라.”
창살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귄터는 피에르의 마지막 대답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겠으나 주교 피에르는 지금의 사태와 깊숙이 연관된 인물이기도 했다.
“맹약에 묶여 있는 자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질문할 차례인 것 같은데.”
기도를 마친 피에르가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못다 한 일을 마치기 위해 모시암으로 돌아온 교황청의 주교.
껑충하게 솟아오른 그의 등 뒤로 자그마한 아침의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다.
“혹시 바예지드의 애송이에게 알려주었소?”
“무엇을 말입니까?”
“장엄한 신의 뜻. 마(魔)를 물리치는 신실한 자의 칼날.”
창살 앞에 선 피에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취조나 고문 같은 허튼 시도 대신 질문과 대답을 나누기로 한 피에르와 귄터.
귄터의 물음에 솔직히 대답한 피에르는 이제 약속에 따라 하나의 질문을 건네는 중이었다.
“나는 지금 북부정교회가 블라드라는 녀석에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정수를 가르쳤냐 묻고 있소.”
“······.”
어제의 어두웠던 새벽.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솟아오른 장엄한 신의 뜻이 있었다.
정작 그 술식을 준비한 피에르조차도 놀랄 만큼 곧고 높은 빛의 기둥이었다.
“나눌 것을 나누셨어야지. 본교에서 애써 독립해 나가 하는 짓이 고작 귀족들의 주구 노릇이오?”
그렇기에 피에르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 블라드가 보였던 일검은 일개 기사의 임기응변으로 해냈다기에는 너무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배우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합일(合一)의 정수가 분명 애송이의 검 끝에 맺혀 있었다.
“무언가를 팔고 싶었으면 차라리 면죄부를 파셨어야지. 그렇게 교회의 정수까지 내줘버리면······.”
“저희는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가르친 적이 없다고?”
그러나 그의 분노는 대상을 잘못 지정하고 있었다.
귄터의 말처럼 북부정교회는 절대 외부인에게 일체의 정수를 가르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혹시 안드레아가?”
“안드레아 주교님은 구마 사제가 아니십니다. 저희의 기술을 아실 리가 없지요.”
결과는 있었으나 원인이 없다.
피에르는 분명 블라드의 검 끝에 깃들었던 세계의 합일을 목격했었으나 정작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바예지드의 애송이에게 그 길을 인도해주었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정통한 근원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정수.
그 정수가 오롯이 서 있기 위해서는 모든 세계를 받쳐주는 바닥 면이 있어야만 했다.
‘옳게 받쳐주는 자가 없다면 쓸 수 없는 기술일진데······.’
피에르의 신성, 니벨룬의 신비, 블라드의 오러.
그리고 이것들을 받쳐주는 가장 밑바닥의 근원.
피에르는 도대체 어떤 이의 세계가 그 밑을 받치고 있었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애송이의 세계는 자신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정통한 자에게서부터 근원 했으리라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어제 블라드가 휘두른 빛이 악독한 역천(逆天)의 나무를 베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
벽난로를 때워 온기가 가득한 방이었으나 정작 침대 위에 누워있는 쟝의 입술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있었다.
파래진 입술만큼이나 점점 얕아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제 3일 정도 남은 겁니까?”
“아마도요. 지금 단장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저주에 감염되었던 아이들은 공통된 증상을 보이며 죽어갔다고 했다.
깊은 잠, 같은 꿈, 그리고 점점 떨어지는 체온.
해가 뜰 때는 하염없이 잠들었다가 해가 졌을 때야 깨어나 오한에 떨던 아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일주일은 버티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쟝이 저주에 걸려든 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어린 부제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던 안드레아를 떠올리며 블라드는 그만 우울해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빌어먹을 나무를 그때 끝냈어야 했었다.
그렇게만 했었다면 지금 쟝이 다시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
유스티아는 쟝의 곁을 떠나지 않는 블라드를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휴식을 취해야 함에도 자신을 몰아세우는 블라드는 분명 자신을 자책하는 중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 누구라도 처음 그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블라드 경만큼 해내지도 못했을 거예요.”
문가에 어색히 서 있던 니벨룬도 유스티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블라드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쁘신가?”
“힉!”
순간, 침묵만이 가득한 방으로 갑작스레 귄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 서 있던 니벨룬조차도 느끼지 못한 그의 기척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 번에 쏠리고 말았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둘이서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잘 빗어놓았으나 조금은 헝클어진 머리가 귄터의 고민을 가늠케 했다.
그러나 붉게 충혈된 블라드의 눈가 또한 보기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같은 고민을 지니고 있던 둘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사과하지. 쟝의 신변을 억지로 가져오려 했던 것은 충분히 우리의 힘으로 저주를 파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네.”
복도로 나온 블라드와 귄터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 만남은 조금 어긋났다 할지라도 지금의 둘은 서로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이였으니까.
“내 모자람을 인정하지.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 튀어나왔어.”
“이해합니다.”
“좋아. 그럼 우리 둘 사이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으로 봐도 되겠나?”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요.”
귄터 정도 되는 위치라면 일개 기사인 블라드에게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쇼아라의 블라드는 역천(逆天)의 상징인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를 베어낸 사람이었으니 이것은 귄터 나름대로 존중의 의미를 담은 행동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해. 조만간 도시를 봉쇄할걸세. 소개령을 내리고 이 근방을 비울 생각이야.”
“쟝은요?”
“바로 그게 문제야.”
현재 모시암뿐만 아니라 우트만 남작령을 병들게 하는 원인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클리포트의 나무일 것이다.
서로 지키려 하는 것은 조금 달랐지만 귄터와 블라드는 그 빌어먹을 나무를 끝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 나무가 도망간 구멍은 이미 신의 뜻이 닿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렸네. 물리적으로는 닿을 수 없다는 뜻일세.”
성기사들을 통해 조사한 묘지의 구멍은 이미 끝도 없이 뚫려버린 무저갱과도 같은 것이었다.
입구같이 생겼으나 결국은 속임수.
도시를 둘러싼 희미한 안개와도 같이 실체 없는 그 구멍을 통해서는 절대 역천의 나무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떡합니까? 단장님께서도 전혀 방법이 없습니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귄터는 그 말과 함께 블라드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럽다는 듯 지켜보는 그의 눈빛에 블라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이지?”
“갑자기 그건 왜······.”
“중요한 거니까 빨리 대답해보게.”
질문은 평범했으나 거기에 따른 박력만큼은 상당했다.
확신과 대안이 있는 자만이 뿜을 수 있는 그런 기세였다.
“스물입니다.”
“지금 나이 말이야.”
“두 달 모자란 스물······.”
“아직 열아홉이로군.”
뒷골목의 버릇대로 나이를 올려쳐 본 블라드였으나 북부정교회의 단장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슬아슬하군.”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자리라니.
귄터는 블라드의 어린 나이가 새삼 다가왔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알맞은 나이이기도 했다.
“갑자기 나이는 왜 물어보십니까.”
“아직 열려있는 입구가 하나 보여서 말이지.”
지금도 어린 부제와 남작령을 좀 먹고 있는 역천의 나무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물리적으로는 통할 수 없고, 이미 어둠 속에 숨어 밝힐 수도 없다.
그러나 귄터는 그 나무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어린아이만 걸렸던 저주야.”
귄터는 턱 끝으로 쟝이 누워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지금 내 앞에는 어림과 젊음 사이에 걸쳐 있는 기사가 한 명 서 있군.”
그리고 이번에는 블라드를 향해서.
지금 귄터의 앞에는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성숙했고 청년이라 하기에는 아직 어린 묘한 인상의 기사가 서 있었다.
“꿈을 통해서라면 그 나무에 접근할 수 있을걸세.”
“······!”
귄터의 말에 블라드는 모시암에서 겪었던 꿈을 기억해 내었다.
어머니의 품과 같았던 어둠과 저 멀리서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
목소리의 도움으로 탈출했던 그 꿈은 분명 쟝이 꾸었다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입구는 아직은 어리다 할 수 있는 자네만이 통과할 수 있는 작은 것이겠지.”
“······이해했습니다.”
귄터의 손짓에 복도에 서 있던 성기사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와 들고 있던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 안에는 보기에도 뭉툭해 보이는 주사기와 함께 찰랑거리는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쟝에게서 추출한 저주일세. 다급했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것이라면 자네의 세계가 쟝에게도 연결될 수 있을걸세.”
귄터의 예상은 정확했고 겪어봤기에 확신한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입구가 희미해져 있었지만 귄터의 말처럼 아직 나무에게 닿을 수 있는 입구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 입구의 이름은 쟝.
어린 부제와 역천의 나무는 여전히 꿈이라는 실로 연결된 상태였다.
“강요하지는 않겠네.”
주사기 안에서 찰랑거리는 검은 액체가 불길하다.
마치 아이를 찾아 헤매던 여인의 눈물과도 같은 색.
그 익숙한 색을 보면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하시죠.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 주사기를 쥐어 드는 것에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진창 위에 서 있던 자신처럼 떨고 있을 지금의 쟝에게도 기댈만한 빛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야 주교님께 받은 이름값을 할 수 있겠네요.”
“알겠네.”
블라드의 각오를 확인한 귄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 강단은 있어야 어린 나이에 지금 같은 명성을 쌓을 수 있었겠지.
“확실히 준비하고 오겠네. 잠시만 기다려주게.”
귄터의 손짓과 함께 다시금 방의 문이 열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스티아와 니벨룬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워 희미한 숨을 뱉고 있는 쟝의 모습까지도.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쟝이 누워있는 침대를 향해 걸어간 블라드는 어린 부제의 손을 잡아보았다.
다시금 맞잡은 쟝의 손은 아까보다 조금은 더 차갑게 식어있었다.
아마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영영 굳어 버릴 작은 손이었다.
※※※※
시간은 없었고 각오는 굳혔으며 준비는 완료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실행하는 것뿐.
쟝의 옆에 나란히 누운 블라드는 귄터가 직접 외우는 기도문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블라드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는 귄터가 고르고 골라온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가득했다.
눈을 떠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유스티아도 이들과 함께 지금 들리는 기도문을 읊고 있을 것이다.
“큭!”
갑작스레 목덜미에 느껴지는 둔탁한 감각.
그 감각과 함께 블라드는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묘하게 따뜻한 그 느낌은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으나 핏속에서 출렁이는 서늘함은 블라드를 끊임없이 몸서리치게 만드는 중이었다.
"흐으으······."
따뜻한 만큼 끔찍했던 감각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옆에 있던 쟝도, 들리던 기도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새까만 어둠.
“······맞게 오긴 했네.”
그때 보았던 모닥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옳게 왔음을 느낀 블라드는 조용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음?”
그때와 마찬가지로 주위에는 온통 어둠뿐이었으나 조금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빛 하나.
그것은 마치 새까만 구름을 뚫고 내려온 별빛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그곳에서 가야 할 곳을 잃었다면 내가 보내는 빛을 따라오게.
귄터는 모든 부담을 블라드에게만 지우지 않았다.
저주의 세계를 헤맬 블라드를 위해 귄터는 기꺼이 자신이 길잡이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아마 그는 지금도 별빛을 유지하기 위해 블라드의 옆에서 조용히 기도문을 읊는 중일 것이다.
“끄응.”
아직 몸을 감도는 오한에 굳은 몸을 풀지 못한 블라드.
그러나 블라드는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를 보며 다시금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도망치라고 했잖냐.]
불쑥 튀어나온 손과 함께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블라드는 자그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쩌겠어요. 빚진 건 갚아야지.”
[하여간 기사 놈들은 말 안 듣기로 유명하지.]
받은 은혜가 있고 하겠다고 외친 맹세가 있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목소리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온 블라드를 일으켜 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 바닥을 뒹굴고 있는 이 녀석은 내가 한 말 때문에 돌아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가자. 안내해주마.]
“손으로 직접 잡으니까 기분이 새롭네요.”
듣기만 했던 목소리를 직접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하다는 듯 웃는 블라드.
목소리는 그런 어린 녀석을 보며 자신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멍청한 녀석.]
이제야 맞닿은 두 세계는 그렇게 서로를 맞잡고 있었다.
처음 계약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밤하늘에 맺힌 별빛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
이 세상 모든 세계는 존귀하나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지킬 수는 없는 법.
그러나 너희는 지키기 위해 맹세한 자들이니.
만약 너희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면 해야 할 순간에 서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그것이 나의 두 번째 규율일지니.
맹세를 따라 어둠을 밝힐 횃불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 나의 기사들아.
다시 돌아온 사람들 (2)
남자는 걷고 소년은 뒤따른다.
어둠을 헤쳐나가는 남자의 발자국 뒤로 새로이 소년의 발자국이 겹치고 있었다.
둘의 뒤를 따르고 있는 별빛만이 겹쳐져 있는 발자국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그 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래?]
낯선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고 앞서 있는 목소리의 뒷모습은 신기하리만큼 가까워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마저 희미하게 느껴질 때 문득 별빛에 반짝이는 검 하나가 블라드의 시야로 들어왔다.
색색의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은색의 검.
그러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익숙한 형태만큼은 블라드의 기억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데. 그거 그쪽 거에요?”
[그쪽이라니. 굉장히 없어 보이는 호칭인데.]
“그럼 어떡해요. 딱히 뭐라 부를만한 이름이 없는데.”
어깨를 으쓱이는 블라드를 보며 목소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직 이름조차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여전히 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글쎄.]
“뒤통수를 맞아도 아주 세게 맞으신 모양이네. 이러면 여기저기 찾아다닌 보람이 없어요.”
[그럼 한번 말해봐라. 여태껏 네가 찾아본 내가 누구였는지.]
앞서가던 목소리가 우뚝 멈춰서며 블라드를 돌아보았다.
가까이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희미해 보이는 그의 모습.
촛불같이 일렁이는 그의 모습에 블라드는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은 정령들이랑 관계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당신은 길 잃은 정령들을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 같거든요.”
[계속해봐.]
대답을 유도하는 목소리를 따라 블라드는 생각에 빠진 채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멀기만 하던 그의 뒷모습이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다른 종족들이랑도 관계가 있어요. 엘프나 드워프들이요. 당신의 흔적이 거기까지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데어마르의 하얀 뱀이 그쪽을 알아본 걸 봐서는 하이날의 초대 가주와도 연관이 있어요.”
대답을 하면 할수록 블라드의 발걸음이 천천히 목소리를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블라드는 대답하는데 정신이 쏠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와의 거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블라드는 그동안 항상 생각해왔었다.
목소리는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검은 번개를 타고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제가 쓰는 검술이요.”
[응.]
“이거 황실에서 쓰는 검술이라던데요?”
[그래? 그게 그렇게 되었나?]
정체 모를 목소리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검술은 황실의 기사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귀하디귀한 검술.
황실의 검이라는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목소리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입술을 우물거리고 말았다.
“저기 혹시······. 아니죠?”
[뭐가.]
차마 밖으로 내뱉기에는 너무 대단한 단어 하나가 블라드의 목구멍에 걸려있었다.
여태까지의 여정을 통해 얻은 단서들은 다들 하나같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내가 실수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큭!”
[다 왔다.]
한참 고민하던 블라드는 어느새 바짝 다다른 그의 등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남자와의 거리는 이제 겨우 발걸음 하나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마터면 나도 길을 잃을 뻔했다. 누가 이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거칠게 붙여놓았어.]
바로 앞에 있는 목소리의 등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블라드는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나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지는 땅으로 뿌리는 사납게 하늘로 솟구친 괴이한 형상의 나무였다.
“······방금까지는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타자(他者)의 존재라는 것이 그래. 바로 옆에 있어도 안 보일 수 있고 저 멀리 있어도 선명할 수 있거든.]
나라는 세계에 경계까지 와닿은 블라드는 그제야 맞닿은 다른 세계를 넘볼 수 있었다.
그곳은 잠들어 있는 쟝의 세계.
현실에서는 바로 옆에 누워있었으나 인연을 따라온 어린 부제의 세계는 이토록 멀리 있었다.
[내 이름은 키하노다.]
“네?”
[그냥 키하노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다른 이름들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거든.]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악수를 건네는 목소리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의 이름을 찾은 사내는 자신을 키하노라 소개하고 있었다.
“······블라드예요.”
[그래. 블라드. 만나게 되어 반갑군.]
온통 뒤틀려버린 나무 앞에서 남자와 소년이 이름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 어느 한 곳에서도 겹칠 수 없는 둘이었지만 맞닿은 세계에서만큼은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
[우리가 쟝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알아챌 거다. 너도 그랬잖아.]
“저는 그쪽이 말을 걸어서 안 거였든요.”
[키하노라니까. 그쪽이 아니라.]
쟝의 세계 앞에 선 두 명의 기사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세계의 경계면으로 발을 내디뎠다.
키하노는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큰 위험을 내포하는 행동이라고.
“가죠.”
[그래.]
하지만 가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지금도 쟝의 세계에 떠 있는 기이한 나무는 천천히 내려앉으며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여긴 뭐야.”
[현혹되지 마라.]
굳은 각오와 함께 내디딘 발끝.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건만 주위는 어느새 회백색 벽돌로 가득한 복도가 되어있었다.
[교회로군. 하긴 부제라고 했으니.]
“바르나의 교회 같아요. 한 번 와본 적이 있거든요.”
[잘 아는 건물이냐.]
“······지하 정도만?”
[모르는 곳이군.]
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바르나의 교회였다.
평생을 부제로 살아온 쟝에게 있어서 가장 선명한 장소는 바르나의 교회일 테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교회 하면 예배실이겠지.]
“쟝이 그곳에 있을까요?”
[그거야 가봐야 알겠지.]
지금의 둘에게 있어 가장 최우선인 목표는 바로 쟝의 안전일 것이다.
3일 후면 먹혀버릴 어린 부제의 세계는 지금도 어딘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일단 가보자.]
“예배실은 1층이에요.”
구조를 통해 자신들이 지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둘은 서둘러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장설게요!”
[그래.]
바르나의 교회는 블라드에게 있어서도 의미 있는 곳이었다.
안드레아에게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을 건네받은 곳이기도 했으니까.
블라드는 저주받은 여인의 관을 옮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서둘러 계단이 있는 위치를 찾아내었다.
“저기요!”
[좋아.]
기억보다 훨씬 길어져 있는 복도 끝에 다다른 블라드는 익숙한 문을 박찼다.
쾅!
이미 알아챘을 테니 조심스러운 태도는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빠른 행동일 뿐.
나가떨어지는 문짝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나선형의 돌계단.
그러나 그 모습은 블라드의 기억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높아?”
[아무래도 쟝이라는 아이는 지하를 무서워했나 보다.]
끝없이 위로 솟아있는 돌계단은 블라드가 관을 들고 내려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마치 1층과 지하를 아예 갈라놓는 듯한 계단의 모습에 블라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일단 올라가자.]
어린 부제가 간직한 공포만큼이나 길어진 돌계단을 두 명의 기사가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계단의 끝으로 어느새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돌자, 돌자, 주위를 돌자.
-성냥이 전부 타 버릴 때까지.
[아무래도 찬송가는 아닌 것 같지?]
“꿈속에서 들어 본 노래 같네요.”
길고 긴 계단이었으나 마침내 계단의 끝까지 다다른 둘은 마주한 문 너머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조심스레 검을 잡아들기 시작했다.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는 제가 했잖아요.”
[젊은 놈이 패기가 없군.]
문고리를 통해 밀어본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은 감옥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키하노는 서둘러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저기, 키하노.”
[왜?]
“재촉하는 건 아닌데 빨리했으면 좋겠어요.”
[왜?]
“지금 밑이 심상치가 않거든요.”
키하노가 준비하는 동안 계단 밑을 내려다본 블라드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어두운 안개.
그 안개를 따라 블라드도 키하노도 아는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 관에 못까지 박아줬는데?”
[부제는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나 보다!]
저 아래서부터 검은 눈물을 흘리며 올라오는 여인이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찾으며 요제프에게 달라붙었던 여인.
아무래도 어린 쟝에게 있어 그날의 기억은 감당하기 힘든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빨리요!”
[잠깐만 이거 오랜만에 하려니까 좀 힘든데.]
한 번 고개를 갸웃한 키하노는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파직- 파지직-!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번개의 잔상들.
뽑아낸 은빛의 검에서부터 그에 걸맞은 색깔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찬란히 빛나는 하얀색의 세계.
지금 눈물을 흘리며 기어 오는 여인조차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빛이었다.
[흐읍!]
키하노의 심호흡과 함께 잘려나간 커다란 문.
먼지 하나 들썩이지 않은 채 예리하게 잘려나간 단면을 보며 블라드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런 기술은 안 알려준 것 같은데?”
[이건 기술이 아니라 그냥 실력이다.]
처음으로 마주한 키하노의 검을 보며 놀란 블라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은 눈물의 여인이 따라올까 뒤를 돌아보았다.
“······!”
그러나 그곳에는 어느새 새롭게 생겨난 문이 지하를 가로막은 채 서 있었을 뿐.
마치 방금의 일격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 그렇게 서 있는 모습에 그제야 블라드는 자신이 꿈속 세상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다.
[예배실, 예배실. 예배실이 어디지?]
“따라오세요!”
한 번밖에 들어오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블라드는 뒷골목의 버릇대로 길을 파악해놓았었고 예배실로 향하는 복도만큼은 아직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있었다.
“여기요!”
[좋아. 여기에 부제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예배실에 안쪽에서는 아까 들었던 기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지만, 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디 이곳에 쟝의 모습이 있기를 바랄 뿐.
“으아······.”
그러나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둘이 기다리고 있던 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까맣게 물든 수많은 시선이 있었을 뿐.
“얘네들이 왜 다 여기에 있죠?”
[이미 저주가 파고든 것 같다. 당연히 부제의 세계에는 없는 아이들이겠지.]
예배실 안에 있던 것은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깔끔한 옷차림과 함께 곱게 빗은 머리가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블라드와 키하노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공허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거지?]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키하노는 예배실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올려보았다.
색유리로 화려하게 치장된 예배실 가장 높은 자리.
여태껏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었을 그곳에는 불길한 모습으로 뒤집힌 교회의 문양이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보았던 문양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안개 가득한 모시암의 성문 앞.
그곳을 향해 다가오는 행렬이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호위하는 한 대의 마차.
마치 귀족이라도 모시는 듯한 모습의 행렬이었지만 기이한 것은 이곳에 있던 어떤 경비병도 그들이 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지! 앞에 있는 행렬은 정지하시오!”
점점 안개가 짙어 지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행렬이 안개를 내뿜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는 바로 옆에 있는 병사들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에서 경비대장은 직접 나서 신원미상의 행렬을 멈춰 세우기로 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마차는 마치 관이라도 되는 온통 새까만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러나 불길한 색과는 달리 만들어진 이음새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소속을 밝히시지 않는다면 들여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나서 대답할 법하건만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행렬의 모습.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몇몇 경비병들이 천천히 쥐고 있는 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다들 고향에 돌아왔다고 기뻐하네요.”
마차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경비대장은 귀를 기울였다.
정작 기대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안개를 따라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는 누구라도 귀를 기울일법한 맑고 고운 소리였다.
“그래. 이제 우리 내릴까? 여기가 모시암이란다.”
“잠시만······.”
마차에서 내리려 하는 소리에 경비대장은 서둘러 제지하려 했으나 순간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끼이이익-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경첩 소리.
그러나 경비대장은 천천히 열리는 마차의 문보다는 그 밑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건······.”
시선을 땅으로 내린 경비대장은 그제야 이들이 어떻게 소리 하나 없이 성문까지 다다랐는지 알 수 있었다.
땅과 맞닿아 있어야 할 마차의 바퀴.
그러나 지금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 마차의 바퀴는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내리는 여인의 발끝까지도.
다시 돌아온 사람들 (3)
-내가 어두운 골짜기를 건널 때라도 두렵지 아니한 것은 그분께서 나를 인도함을 알기 때문이니.
목소리는 각자 달랐으나 외우는 기도문은 하나.
정교회의 사제들이 외우는 기도 소리를 따라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향(香)이 있었다.
향로에 꽂혀 있는 것은 고작 하나의 향이었으나 그것이 만들어 낸 연기는 짙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블라드와 쟝이 누워있는 침대 주위를 메꾸는 중이었다.
마치 주위에 가득한 안개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
순간, 한참 기도문을 외우고 있던 귄터는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이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
기도를 위해 꽉 잡은 손등 위로 어느새 솜털이 쭈뼛 올라와 있었다.
평생을 통해 쌓아 올린 본능이 외치는 경고였다.
“······단장님!”
가지런한 기도 소리를 뚫으며 귄터의 부관이 나지막이 외치며 다가왔다.
의식을 위해 문밖을 지키기로 했던 그는 지금 잔뜩 초조한 얼굴로 귄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밖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언제나 냉정하게 사태를 대하던 부관이었으나 지금 그의 말끝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알았다.”
자그맣게 말하기는 부관의 보고를 들은 사람은 귄터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의 바로 곁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유스티아는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려는 귄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해주게. 지금 나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네뿐이야.”
블라드를 쫓아 쟝의 꿈까지 따라온 별빛이 있었다.
길을 잃지 않게 보여주는 이정표였고, 놓아서는 안 될 끈이었지만 지금 그 별빛은 조금씩 흔들리는 중이었다.
도시 모시암의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여인이 탄 마차 안에서부터 갑작스레 쏟아져 나오는 작은 그림자들과 함께.
-찾아가렴. 너희들의 집으로.
마차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모시암에 기뻐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이들의 고향이었고 또한 그리워하던 곳이었으니까.
※※※※
쿠우웅-!
“큭!”
블라드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진동에 휘청이고 말았다.
“뭐죠?”
[내려앉았군.]
예배실의 문을 등으로 틀어막던 키하노는 우스스 떨어지는 돌가루들을 보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뭐가 내려앉아요?”
[너도 아까 봤잖냐. 허공에 떠 있던 나무 말이다.]
쟝의 꿈은 천천히 잠식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저주의 주체인 역천의 나무가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온통 거꾸로 되어있던 나무의 가지는 기어이 쟝의 꿈에 닿고 말았다.
“3일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전부 계산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지.]
탕탕탕탕탕-!
블라드는 갑작스레 악화된 상황에 한 마디 불평이라도 토해내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울림에 다시금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도대체 몇 명이나 안에 있던 거야!”
[물리적인 숫자는 의미가 없대도 그러네.]
마치 우박이라도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
수없이 많은 작은 손바닥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예배실의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혹은 두 사람을 잡아채기 위해서.
“내가 여기서 나가면 이 저주 만든 자식 반드시 죽여버릴 거예요.”
[······분노도 때로는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지.]
저주에 능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귓가로 퍼지는 손바닥 소리만큼이나 아이들이 죽어갔으리라는 것을.
등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진동 하나하나를 느끼며 점점 블라드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있었다.
[일단 저곳에 네가 찾는 부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
그러나 타오르는 분노도 때에 따라 펼쳐야만 효과가 있는 것일 테다.
사태의 본질을 짚는 키하노의 물음에 블라드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시선이 닿는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러나 1층이나 지하와는 달리 교회의 다른 공간은 가본 적이 없던 블라드로서는 마땅히 어디라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쟝이라는 부제는 너무 무섭고 고달픈 거야. 네가 만약 그 아이라면 어디로 찾아갈래?]
키하노는 누구를 찾아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블라드였다.
길이 없는 꿈에서 어린 부제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연결된 끈을 떠올려야만 했다.
“······저라면 안드레아 님이요.”
[좋아.]
그리고 블라드는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잔뜩 뒤틀려 가는 쟝의 꿈 안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런데 저는 그분이 어디 계실지는······.”
[네가 이미 떠올렸으니 나머지는 부제의 꿈이 알려줄 거다.]
“네?”
키하노의 손끝이 블라드의 가슴팍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키하노의 손가락을 따라 내려다본 그곳.
블라드의 가슴에는 어느새 자그마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네 이름을 따라가 봐라.]
진실된 사제가 건네주었고 어린 부제가 증인이 되어준 소중한 이름.
모든 것이 뒤틀려 가는 이곳에서 블라드의 신분패가 찬찬히 빛나고 있었다.
소중한 만큼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이름이었다.
※※※※
“횃불이랑 횃불은 전부 꺼내와라! 안개를 몰아내야 한다!”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모시암의 교회가 타오르듯 빛나기 시작했다.
본디 가진 화력보다 더 크게 타오르는 횃불 안에는 사제들이 축문으로 빚은 신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북부정교회에서도 단 두 명밖에 없는 기사단장인 귄터.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지금 보이는 것은 평생을 통틀어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악의의 물결이었다.
-아빠, 엄마! 나 왔어요!
-문 좀 열어봐! 엄마! 나야!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새까만 그림자들이 있었다.
작고 희미했으나 문을 두들길 기력만큼은 있던 그것들은 생전의 기억을 따라 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부모들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면서.
잔뜩 웅크려 있는 자신들을 안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순수한 악의(惡意)······. 이 지독한 자식들.”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자식들의 목소리에 황급히 문을 열고 만 부모들의 문소리를.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안개 너머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하나둘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어 나오셨군.”
사나운 표정과 함께 왼쪽 눈을 감고 있던 귄터는 안개 저 너머에서부터 떠오르는 기이한 형상을 보았다.
꿈틀거리며 떠오른 그것은 정확하게 절반이 갈라져 있는 나무였다.
이 세상의 법칙을 모조리 무시하듯 온통 거꾸로 되어있는 역천(逆天)의 나무.
쟝의 꿈에서처럼 떠오른 나무의 가지 끝이 천천히 도시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늘로 뻗어야 할 것이 땅으로 가라앉자 이제야 부모들을 찾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려 가는 쟝의 꿈은 점점 바르나의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천장에 있어야 할 샹들리에가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얌전히 벽에 붙어 있어야 하는 계단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나 멀미 날 것 같아요!”
[물리적인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그러네!]
시커먼 바다 위에서도 멀미 한번 한 적 없던 블라드였지만 뱀의 등처럼 꾸물거리는 계단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정작 물리적인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하는 키하노조차도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블라드와 판박일 정도였다.
“도대체 몇 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건데!”
[소리치지 마라! 골 아프니까!]
손에 쥔 신분패가 가리키는 황금빛 실타래를 따라 위로 올라온 블라드와 키하노는 저 앞에 맞닿은 복도를 발견하고서야 계단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와······. 씨.”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왕년에는 안 이랬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블라드는 시선을 내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이 있던 1층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왔건만 저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한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운 것이었다.
“끄억.”
식도까지 차오른 신물을 집어삼킨 블라드는 바로 앞에 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여긴 또 멀쩡하네.”
[아직 침식당하지 않은 거지.]
드드드득-
그러나 키하노가 말하기가 무섭게 복도의 벽들에서부터 검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
새파란 안색으로 서로를 마주 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금색 실타래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입이 방정이지 진짜!”
[······말한 순간이 공교로웠을 뿐이야.]
쩌저저적-!
마치 아가리를 벌리듯 벽의 균열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새까만 균열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은 어느새 쟝의 꿈을 파고들어 있던 나뭇가지들.
하늘 위에서 내려앉은 가지들 속에서 기이한 잎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기다!]
균열을 피해 달리던 둘의 앞으로 자그마한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금색 실타래가 이어져 있는 반들반들한 문 위에는 사제 안드레아라는 명패가 적혀있었다.
“이번에도 문이 안 열리면······!”
지하에서의 일을 기억한 블라드는 서둘러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쟝의 꿈에서부터 블라드의 세계가 감돌자 뒤따라오던 균열들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지하에 있던 문은 쟝의 공포를 가로막은 문.
-어서 들어오게!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문은 진실된 사제가 있는 문이었으니까.
자그마한 방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새하얀 법복을 입은 늙은 사제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어서 들어오라 블라드에게 손짓하는 그였다.
“이익!”
복도 끝, 사제가 열어준 자그마한 문을 향해 꼭 닮은 모습의 황금색과 하얀색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검은 균열은 최선을 다해 가지를 뻗어보았으나 전장을 간파하는 의외성들을 결국 붙잡지 못했다.
사제가 열어준 품으로 황금색이 먼저 들어가고.
[흡!]
그 뒤를 보호하듯 뒤따랐던 하얀색마저 들어오자 늙은 사제는 기다렸다는 듯 자그마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콰아앙-!
자그마한 문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충격이 와닿고 말았다.
그러나 키하노가 말했듯 물리적인 것들은 이 안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아.
떨고 있는 쟝을 끌어안은 안드레아의 기억.
그것은 작았으나 단단했고 어린 부제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보루를 훌륭히 지키고 있었다.
파도처럼 짓쳐 든 검은 균열조차도 쉽사리 부술 수 없는 그런 따뜻함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었구나.
미끄러지듯 들어와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웃음 짓는 안드레아를 보았다.
주교의 옷이 아닌 새하얀 법복을 입고 있는 그는 추웠던 겨울날 하얀 밀빵을 나눠주었던 그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제가 지키겠다고 했잖아요."
블라드의 대답에 웃음 짓는 안드레아.
그의 뒤로 새하얀 법복을 붙잡고 있는 쟝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조금은 더 어려진 것 같은 어린 부제는 자신을 위해 되돌아온 기사를 보며 자그맣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부탁받은 나의 어린 부제.
가능성 있는 어린 쟝을 위해 꿈속으로 돌아온 기사들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모시암의 성문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체들.
마치 지금이라도 붙이면 붙을 것 같이 예리하게 갈라진 시체의 단면에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내장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시체들 앞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기술이 아닌 실력을 담은 검 끝에는 흐르는 핏방울 하나조차 맺혀 있지 않았다.
“······용이 있고.”
저 앞에 죽여야 할 것이 있고.
“정령······들이 있고.”
그 옆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안개 가득한 곳에서 길을 잃은 듯 서 있던 남자는 저 앞에 찬란히 타오르는 교회의 불빛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기사들.
목 없는 사내들.
시작은 푸르렀으나 끝은 검어진 머리의 여인이 그런 그들을 보며 기도하듯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못다 한 것이 있으면 돌아와야겠죠.”
안개 속에 떠오른 나무처럼 새하얀 머리의 남자와 목 없는 기사들은 거꾸로 된 길을 걷고 있었다.
못다 한 일을 마치기 위해서, 혹은 후회되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충분히 돌아갈 자격이 있어요.”
도시 곳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정체 모를 여인은 웃고 있었다.
생(生)과 사(死),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난 순수한 존재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안개 가득한 도시.
그녀는 지금껏 이런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신의 뜻 아래서 성냥의 끝처럼 새빨갛게 타올랐던 그런 마을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흔적 (1)
유스티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블라드와 쟝을 보며 가만히 둘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축축한 식은땀의 느낌.
푹신한 침대였으나 둘의 표정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블라드는 간헐적으로 몸을 뒤트는 중이었다.
마치 심한 악몽이라도 꾸는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
유스티아는 뒤척이는 블라드의 금발을 쓸어주고는 마지막으로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을 바라보았다.
북부정교회가 아직 산 로지노였을 시절, 어린 종자를 위해 직접 지어준 문구.
그때도 블라드는 마을의 아이들을 위해 교회에 가장 높은 첨탑을 향해 기어 올라갔었다.
그리고 유스티아는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시작하죠.”
“하지만 유스티아 님······.”
괴로워하는 블라드를 보며 각오를 굳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스티아.
그런 그녀를 보며 옆에 있던 사제가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 빠져들어 갈지라도 그분이 나와 함께 임하심을 믿을 수밖에.
“들어가겠어요.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제들로 가득했던 방이었으나 지금은 유스티아를 따르는 몇몇만 남아있을 뿐.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자들은 해야 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분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날 때를 아시니 저 멀리서도 나를 위한 생각을 밝히시리라.
귓가에 퍼지는 잔잔한 기도문을 들으며 유스티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천천히 쟝의 꿈속으로 침잠하던 유스티아.
그녀는 비록 귄터처럼 빛나는 별은 되어주지 못했지만, 스스로가 더 가까이 내려가 밝게 빛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기로 했다.
“······.”
현실을 떠나 새까만 어둠 속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고 약해지는 유스티아.
그러나 어두울수록 빛나는 그녀의 백금발만큼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으니.
마침내 어두운 구름을 뚫고 꿈의 세계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
-여기로 나가시게.
꿈속의 안드레아는 흔들리는 방문을 온몸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거친 진동에 의해 쉼 없이 흔들리는 그의 손끝은 바로 앞에 있던 책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문이 아닌데요?”
[몇 번을 말하냐 이놈아······.]
눈을 동그랗게 뜨는 블라드를 보며 키하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고 말았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음에도 블라드는 아직 꿈의 세계에 대해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경을 뽑아보게. 그 안에 길이 있을 테니.
꿈의 세계는 상징과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 쟝이 마지막으로 찾은 피난처가 안드레아의 방이었듯 무너져 가는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눈으로 보이는 문과 길이 아닌 가슴속에 품은 하나의 뜻일 것이다.
촤르르륵-
“······힉!”
다급히 책장에 꽂혀 있던 성경을 뽑아 든 블라드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손에 쥔 낡은 성경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알아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으니까.
쾅쾅쾅쾅쾅!
-읽어보게. 그 안에 길이 있을 테니.
점점 삐걱대기 시작하는 문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열려있는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빽빽한 글씨로 수많은 구절이 적혀있었지만 마치 이것을 읽어보라는 듯 굵게 적힌 문장 하나가 블라드의 시야로 확연히 잡히고 있었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것은 어둠 속에 있는 빛이요. 노래일지니?”
쿠구구궁-
블라드가 더듬거리며 성경 구절을 읽자마자 벽에 있던 책장이 마치 종이처럼 천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놀란 블라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바라본 그곳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은하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그게 출구다. 어서 나가자!]
꿈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
검은 바다 위에 뿌려진 새하얀 모래처럼 희미한 길 하나가 블라드의 앞에 놓여 있었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좁고 얕았기에 내쉬는 숨 한번에도 흩어질 것만 같은 그런 연약한 길이었다.
[어서!]
“······!”
키하노의 재촉에 서둘러 쟝을 들쳐 엎은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무너지는 쟝의 꿈속에서 어서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안드레아.
마지막까지 어린 부제의 세계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은 스승이 전한 한 줄기 가르침이었다.
“감사합니다!”
쟝을 바짝 끌어안은 블라드는 키하노를 따라 안드레아가 알려준 길을 향해 뛰쳐나갔다.
머리 위에 하늘은 어두웠으나 발끝에 닿은 별빛들만큼은 백사장의 모래처럼 부드러운 것이었다.
우르르르릉-!
일행이 빠져나가자마자 안드레아의 방은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는 듯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안드레아의 방뿐만이 아니었다.
“교회가 무너져요!”
[그러니까 달려!]
마치 유리병이 깨어지듯 산산조각 나는 바르나의 교회.
무너지는 잔해 뒤로 사납게 뿌리를 세운 역천의 나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어디야! 어디로 가요!”
[귄터인가 뭔가 하는 놈이 별빛을 따라오라 했지 않았냐!]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것은 빛이자 노래일지니.
그러나 밟고 있는 길은 밝았어도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빛 하나 없이 온통 새까말 뿐이었다.
[저기다!]
“······어?”
뒤로는 울부짖는 나무.
걷는 길은 바람에 흩어지는 새하얀 모래길.
그곳에서 잠시 방향을 잃은 둘은 당황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짙은 구름을 뚫고 빛 하나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새?”
귄터가 따라오라 한 것은 별빛이었으나 지금 블라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새 한 마리였다.
백금발의 깃발을 세운 채 어둠을 헤치고 오는 카나리아.
“······유스티아.”
보이는 모습은 새였으나 담고 있는 존재는 익숙한 이였다.
지금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존재를 알아본 블라드는 그만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어둠을 헤치며 힘겹게 날아오는 작은 새의 모습은 마치 세계수의 신녀가 전해주었던 그림 속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으니까.
※※※※
“이런 빌어먹을······.”
귄터의 시선이 안개 위,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발아래는 검은 눈물을 흘리며 바둥거리는 사내가 깔려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사들을 가로막은 정체 모를 여인일 뿐이었다.
푸욱-!
바둥거리던 몸짓을 끝내주자 추욱 늘어지고 마는 남자.
다만 그는 눈물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애타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 아들······. 내 아들 노아야.
애타게 부르던 그 이름은 남자가 잃고 만 아이의 이름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비극은 결국 남자의 몸짓과 함께 멈추고 말았다.
“너는 누구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안타깝지도 않으셨나요?”
“어이가 없군. 이 모든 게 당신이 만든 비극 아니었나?”
귄터의 주위에 다다른 성기사들이 서둘러 방진을 형성하며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을 향해 검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
지금까지 온갖 사특한 존재들을 베어왔던 기사들이었으나 정체 모를 여인을 앞에 둔 지금만큼은 긴장된 모습을 숨길 수가 없었다.
신의 세계로 살펴본 그녀의 모습은 감히 입으로 내뱉기도 어려울 만큼 온통 뒤틀려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행복했을 거예요.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테니까.”
“두 번 묻지 않겠다.”
감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신의 세계.
두 눈을 똑바로 뜬 성기사의 앞에는 신의 품조차 밟지 않는 사특한 존재가 서 있을 뿐이었다.
“북부정교회의 제2 기사단장인 나 귄터는 지금부터 이곳에 대한 모든 비극의 책임을 너에게 묻도록 하겠다.”
어느새 베어낸 귄터의 엄지손가락에는 그의 피가 가득했다.
그러나 맺혔을지언정 떨어지지 않는 그의 핏방울은 천천히 그어가는 대로 허공에 새겨지고 있었으니.
“천상 군대의 영광스러운 지휘관이시자 신의 옆에 계신 성(聖) 로지노시여······.”
사특한 존재를 앞에 두고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는 죄인일지니 부디 저희에게 잔혹한 상처를 부과하소서.
“적을 부수기 전에는 영원히 끝낼 수 없을 상처(stigma)를 그어주소서,”
“끄으으으!”
“흐읍!”
귄터의 핏방울이 하나의 술식이 되어 완성되자, 주위에 있던 성기사들의 이마에 잔혹한 상처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치 칼날로 그어놓은 듯한 상처는 위축되어 있던 기사들의 정신을 명료하게 했고 쥐고 있던 검에 흐르는 오러를 더욱 밝게 만들고 있었다.
“기사들은 두려워하지 마라. 신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니.”
언제나 함께하는 축복을 성흔(聖痕) 삼아 이마에 새겨넣은 성기사들.
격렬히 느껴지는 아픔과 함께 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한 그들이 안개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술식이네요. 제 앞에 계신 분은 고귀한 기사셨군요.”
“오늘 너를 불태우고 이 저주를 끝내겠다.”
내가 함께하는 세계는 신의 세계.
내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그분의 뜻으로 만들어졌으니 나는 왼쪽 눈을 감지 않아도 온전한 세계를 보리라.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점점 다가오는 성기사들을 보며 목 없는 기사들이 마주 나오기 시작했다.
역천의 나무로 향하려는 성기사들과 그들을 제지하려는 목 없는 기사들.
“그 성흔의 술식.”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두 무리.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만큼은 너무나 비슷한 것이었다.
“그거 제가 만든 거랍니다.”
우렁찬 귄터의 돌격 명령에 여인의 마지막 말만큼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가까이 다가서게 되면 보이게 될 테니까.
당신들이 따르고 있는 신의 뜻이 얼마나 무정한 것인지를 말이다.
깡-! 까가강-!
요란히 맞부딪히는 검의 궤적 속에서 성기사들이 성흔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목 없는 기사들의 잘린 목에서도 빛나는 상처가 있었으니.
크으아악!
단장님! 성흔이 먹히고 있습니다!
신의 축복을 먹이 삼아 천천히 타오르고 있는 상처를 보며 여인이 웃고 있었다.
기사단장 귄터는 빛나는 별이었으나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은 그보다 더 빛나봤던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차갑게 식고 말았지만 말이다.
※※※※
“헉, 헉······.”
멀리도 뛰어왔다 생각했지만 새하얀 모래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업고 있는 쟝의 무게도, 끝없는 길에 지친 발걸음도 모두 무거운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조급함이 블라드를 애태우고 있었다.
‘빨리 가야 돼! 빨리!’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지쳐가는 카나리아.
유스티아의 머리 색을 꼭 닮은 작은 새는 지금도 허덕이는 날개짓을 멈추지 않은 채 일행의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점점 지쳐가는 유스티아와 그런 그녀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블라드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수의 신녀가 그려준 모습과 똑 닮아가고 있었다.
[저기! 보인다!]
“······!”
그런 블라드의 조급한 마음을 달래주듯 저 앞에 희미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의 끝을 알리듯 오로라처럼 빛나는 황금색의 물결들.
유스티아의 힘겨운 인도는 기어이 블라드를 세계의 경계까지 이끌고 왔고, 이제 저 앞에 보이는 곳까지만 가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터였다.
-······!
그러나 순간 휘청이기 시작하는 작은 새.
“유스티아!”
무언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터져나가는 깃털들과 함께 자그마한 카나리아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블라드는 점점 땅으로 떨어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움켜쥔 것은 자그마한 깃털 조각들 뿐.
그나마도 천천히 녹아 없어지는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두근-!
“이게, 도대체 무슨······.”
[달려라! 블라드! 멈추면 안 돼!]
불길한 사라짐을 따라 크게 울리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 소리.
그러나 블라드는 허무하게 사라진 유스티아의 상징을 보고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길이 끊겼다! 이제는 네가 스스로 찾아가야만 해!]
“······!”
뒤돌아본 블라드는 저 멀리 어둠끝에서부터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역천의 나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유스티아와 함께였을 때는 저 멀리서 보이지도 않았던 존재였건만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만 녀석이었다.
[바로 앞까지 왔다! 오른쪽 눈을 감아라!]
감은 왼쪽 눈으로는 나의 세계를.
뜨고 있는 오른쪽 눈으로는 현실의 세계를.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반대로.
“흐읍!”
더 이상 걷거나 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곳은 꿈의 세계이며 닿은 것은 상징일 뿐이었으니까.
‘유스티아!’
두근-!
점점 박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를 오른쪽 눈을 감았다.
업고 있던 쟝을 앞으로 들쳐맨 블라드는 가만히 정신을 집중한 채 자신과 어린 부제를 세계의 경계면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
바로 뒤까지 다가온 섬찟한 기운.
그리고 그 앞에서 누군가가 휘두르고 있는 검의 울림.
기어이 기어 온 뿌리 끝이 블라드의 목덜미를 더듬고 있었으나 이미 블라드는 감은 오른쪽 눈으로 현실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현실의 문턱까지 블라드를 인도해주었으니까.
“······크으.”
그리하여 마침내 닿은 나의 세계.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블라드는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백금발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스티아······?”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느낀 것은 누군가의 환영이 아닌 그저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
두근-! 두근-!
그리고 더는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박동만이 느껴질 뿐.
“끄아아아······.”
블라드는 잔뜩 굳어버린 목을 억지로 쥐어짜며 신음같은 울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마치 블라드를 가리듯 쓰러져 있는 유스티아.
그녀의 등에는 지금도 새빨간 핏물들이 흐르고 있었으나 떨리는 블라드의 두 손은 점점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유스티아를 붙잡지도 못하고 있었다.
“깨어났나. 어린 용.”
“흐으으······.”
이제야 맞춰진 초점 사이로 창가에 기대어 서 있는 백발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검 끝에는 막 흐르기 시작한 선명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너 이 자식······.”
“그러나 바로 잠들겠군.”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으나 검을 쥐고 있는 사내의 두 손에는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느껴진다.
그러나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음에도 마주 뛰고 있는 심장만큼은 같은 피처럼 똑 닮아 있었으니.
“으아아아아!”
기어이 침대 밑으로 흘러내리고 마는 유스티아.
블라드는 그런 그녀를 잡지도 못한 채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공포 속에서 그만 울부짖고 말았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이 개자식아!”
“······역시 용이 맞구나.”
눈앞에서 파닥이는 어린 용을 보며 가장 위대한 용살자가 웃음 짓고 있었다.
블라드가 버둥거릴 때마다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그의 몸을 천천히 데우기 시작했다.
오직 용의 앞에서만 뛸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심장이었다.
가장 위대한 흔적 (2)
용은 죽여도 죽지 않는 것이다.
갈가리 찢어 세상 곳곳에 던져 놓았음에도 완벽한 만큼 질긴 용의 의지는 여전히 곳곳에서 살아 숨 쉴 테니까.
그것은 태초부터 그렇게 태어난 존재였다.
그때가 오면 어떡하지.
내가 없을 그때 저주받을 용이 다시 기어 나오면.
그때의 기사들은 과연 나처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미래의 그들을 위해 씨앗을 뿌리고 다닌다 할지라도 말이다.
※※※※
[블라드! 블라드 정신 차려라!]
여전히 돌처럼 굳은 채 억눌린 신음만 내고 있는 블라드.
내면 안의 키하노는 계속해서 블라드를 깨우기 위해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블라드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끄으으으-!”
두근-! 두근-!
검사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압박과 피를 타고 흐르는 본능이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대항하면 죽는다.
그러니 납작 엎드려 있어라.
“살고 싶나?”
안개와 함께 찾아온 남자는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심장에 억지로 박아넣은 조각 하나가 어린 용의 발버둥과 함께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빌어봐라. 예전 그때처럼.”
거꾸로 걷고 있었기에 내일이 아닌 과거를 향해 걸어가는 남자. 프라우센.
그는 누군가와 똑 닮은 블라드의 푸른 눈을 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엿······이나 먹······어.”
그러나 눈앞의 어린 용은 그때의 용과는 다르게 살려달라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
프라우센은 자신을 향해 힘겹게 올려낸 블라드의 가운뎃손가락을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기개 하나는 쓸만한 놈이군.”
안에 있는 키하노와 밖에 있는 프라우센은 서로 보는 방향은 달랐으나 느끼는 것만은 같았다.
떠오르는 별들을 아끼는 소드마스터는 예전부터 도전하는 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용이라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할지라도 눈앞에 있는 것은 용.
누군가의 가능성을 먹고 자라는 만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기에 사내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맞지 않는 그의 검집에서부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라드라니까.”
그러나 자신을 프라우센이라 소개한 남자는 이윽고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들려오는 블라드의 목소리 속에 기이한 진동이 감춰져 있었으니까.
“용이 아니라······ 블라드라고, 이 새끼야.”
가장 위대한 용살자라는 세계가 지금 블라드의 앞에 있었다.
그 어떤 기사라 할지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거대한 존재.
그러나 블라드는 그 대단한 존재 앞에서도 조금씩 검을 향해 손을 내뻗는 중이었다.
“흐읍!”
여기서 꼼짝없이 죽고 만다면 유스티아의 희생은 누가 갚아준단 말인가.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는 그녀가 선물해 준 글귀가 적혀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종자였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 불러주었다.
“······!”
[······!]
기어이 맞닿은 검의 끝에서 블라드의 세계가 퍼지기 시작했다.
오직 나만이 볼 수 있었던 꽃 한 송이.
이제는 감지 않은 두 눈을 통해서도 보이는 세계가 지금 블라드의 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소년이 꿈꾸던 세계가 아주 조금씩 피비린내 가득한 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을 향해 가능성을 표출할 수 있는 어린 것들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검 끝에 맺힌 소년이 꿈꾸던 세계를 엿보며 키하노와 프라우센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용 앞에서 나는 이것을 지키고 싶었노라고.
“그래. 블라드.”
내면의 세계가 아닌 이제는 세상 밖으로 흐르는 블라드의 세계.
그러나 부들거리고 있는 본인은 아직 자신의 세계가 껍질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위험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지금의 순간.
그래서 나는 이 순간을 지켜달라 기사들에게 당부했었다.
“이만 죽어라.”
키하노의 눈에는 블라드가 빚어낸 세계가 보였지만 프라우센의 귀에는 용의 발톱 아래 짓밟혔던 수많은 별들의 비명이 선명하게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음?”
치켜세운 검 끝이 번뜩인다.
그러나 잠시간의 망설임 때문이었을까.
바짝 치켜세운 그의 검 끝은 어린 용의 목덜미로 날아들지 못했다.
“큭!”
갑작스레 누워 있던 블라드가 외마디 외침과 함께 침대 밑으로 푹 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만 흘러나오던 블라드의 세계.
마치 침대가 욕조라도 된다는 양 퐁당 하며 빠져드는 블라드의 모습에 프라우센의 두 눈이 커지고 말았다.
“······이런.”
의외성을 다루는 검사조차도 당황하고만 상식 밖의 상황.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고 지켜보아도 방금까지 누워 있던 블라드와 어린 부제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을 뿐.
지금도 그들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침대보만이 펄럭이며 잔물결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어느 시대에서나 마법사라는 놈들은 당황스럽기 그지없군.”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프라우센은 허탈하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망설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이러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는데.
“신비 속에 숨어봤자 잠시일 뿐이다. 어린 용아.”
블라드가 멀어지자마자 다시금 표정이 사라져버린 프라우센은 건조한 눈빛으로 침대 밑의 바닥을 노려보았다.
쓰러져 있는 성기사의 핏자국만이 가득한 그곳.
아무리 감아도 보이지 않는 그의 공허한 세계가 지금까지 울리고 있는 자그마한 물결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
끝없이 추락하는 아찔한 낙하감에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건 뭐야!’
4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2층으로.
기묘한 느낌과 함께 끊임없이 추락하는 도중이었으나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 있던 어린 부제만은 꽉 안아 들었다.
자신을 프라우센이라 소개한 남자와 멀어질수록 꽁꽁 얼어있던 블라드의 손마디는 점점 풀리는 중이었다.
“크윽!”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만 블라드와 쟝.
그곳에는 내려오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니벨룬이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
서둘러 주문을 외었으나 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 법.
쿠웅-!
“······워 져야 했었는데 주문이 좀 길었습니다.”
요란한 갑옷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은 그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끄아아······.”
“뭡니까. 도대체?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바닥에 떨어져 아파서 그러는지 아니면 아직 몸이 굳어있어서 그러는지 블라드는 쉽사리 바닥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제 평생 이만한 영압(霊圧)을 가진 존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블라드에게서 쟝을 받아든 니벨룬은 서둘러 품속을 뒤지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블라드를 향해 이상한 물건을 들이대었다.
“이게 뭔데?”
“뒤틀림 표시기입니다. 신비나, 세계, 신성을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블라드에게 들이밀자 마치 고장 나기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뱅뱅 돌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 끝.
“엥? 이거 왜 이래?”
그 모습을 보며 니벨룬은 당황한 듯 나침반을 툭툭 쳐댔으나 정작 나침반은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으으으······.”
그러나 뒹굴고 있는 블라드는 아직 프라우센의 주박에서 채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
질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아직도 꿈틀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감옥 안에서 껑충한 그림자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압도당했군.”
그는 귄터에 의해 교회 지하에 구류 당해있던 피에르였다.
사특한 존재를 많이 경험해 봤던 피에르는 블라드의 상태를 단숨에 알아채고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미리 말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으?”
“아니, 조금은 있나.”
한참 오한과도 같은 마비에 괴로워하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내려치는 피에르를 보며 기겁했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미몽의 안개를 물리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뜻일지니!
탕-! 탕-! 탕-!
감옥 안에서 울려 퍼지는 세 번의 내리침.
머리를 내쳤음에도 영롱하게 울리는 그 소리와 함께 블라드가 벌떡 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머릿속에 뿌리내렸던 기운을 내쫓았을 뿐이다.”
피에르의 가차 없는 가격에 블라드의 골이 팽팽 올리고 있었지만, 과연 그의 말처럼 아까와는 다르게 멀쩡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피에르는 씨익 웃으며 블라드 앞에 자그마한 법봉을 까닥여 대었다.
판사들이 쓰는 것 같은 작은 법봉에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희미한 핏자국들이 가득해 보였다.
콰직-!
콰지직-!
그러나 원망의 한마디를 내뱉을 겨를도 없이 감옥의 천장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하를 향해 내려오는 누군가의 주먹질이 모시암의 교회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중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따라오는 것 같은데요!”
“어때 해볼 만하더냐?”
새파랗게 질린 니벨룬과는 달리 피에르는 결전을 준비해 볼 요량이었지만 정작 검이 되어줄 블라드는 분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압도당했겠지.”
“······.”
피에르의 힐난에도 블라드는 감히 변명할 자격이 없었다.
아직도 블라드의 갑옷 곳곳에는 유스티아가 흘린 핏방울이 묻어 있었으니까.
껍질 안의 어린 새가 세상 밖으로 쪼아낸 구멍은 아직 확인하기에는 너무나 작을 뿐이었다.
“일단 나갈까요?”
“어떻게?”
천장을 울리는 진동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지하였으니 1층으로 빠져나간다면 필히 정체 모를 존재와 마주하게 될 터.
나가자고 말하는 니벨룬의 말에 피에르가 반문할 법도 한 상황이었다.
“신비는 언제 어디서나 길을 알려주는 법이죠.”
“흥. 수인족 녀석들은 언제나 이런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는 하지.”
이죽대는 피에르를 가볍게 무신한 니벨룬은 서둘러 배낭에서 기다란 양탄자 하나를 뽑아내었다.
도저히 배낭 안에 들어 있을 수 없는 부피였지만 쑥하고 뽑아내는 모양새가 아주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걸 벽에 걸고.”
니벨룬의 양탄자를 감옥 벽에 붙이자 마치 못이라도 박아넣은 듯 착 달라 붙어버렸다.
“방향을 맞춰서······. 이제 됐다.”
다 되었다는 듯 양손을 두들긴 니벨룬이 양탄자를 들춰내었다.
블라드와 피에르는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양탄자 밖으로 보이는 것은 감옥의 벽이 아닌 안개 가득한 모시암의 길목이었다.
“가시죠. 이거 얼마 못 버텨요.”
“······.”
“······.”
도저히 이어질 수가 없는 두 장소를 연결한 니벨룬을 보며 신실한 사제와 세계를 갖춘 기사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쾅-! 쾅-!
과연 안전할까 싶기도 했으나 이제는 돌가루마저 떨어지는 천장을 보며 블라드와 피에르는 서둘러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만든 지금을 헛되이 쓰지 마라. 세상에는 목숨값보다 귀하고 비싼 것은 없는 거다.]
‘······알겠어요.’
아직 잠들어 있는 쟝을 업은 블라드는 점점 다가오는 누군가를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분노를 터트리고 싶었지만 방금 본 상대라면 아무리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필패일 것이다.
계획 없는 각오는 그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을 뿐.
목소리의 말처럼 블라드는 유스티아가 살려준 자신의 목숨을 그토록 허무하게 내던질 생각은 없었다.
“블라드 님!”
바깥에서 나지막이 외치는 니벨룬의 목소리를 따라 블라드는 양탄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란한 진동이 곧 그들이 있는 감옥까지 다다랐으나 쏙 삐져나온 니벨룬의 팔이 재빨리 걸려 있는 양탄자를 회수하자 곧 감옥 안에는 누구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도망쳤군.”
공허한 세계에서부터 일행을 구해낸 니벨룬의 신비.
그러나 추적자인 프라우센은 그런 니벨룬에게 딱히 불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인족이 끝끝내 놓지 않은 신비 또한 그가 지켜내려 했던 세계 중 하나였을 테니까.
※※※※
안개 가득한 공터에서 희끄무레한 비석이 보였다.
그 비석과 함께 자신이 어느 곳에 서 있는지를 알아챈 블라드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는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도망친 건 좋은데 왜 하필이면 여기야!”
“기억나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는걸요.”
뒷머리를 긁적이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분통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 때문에 빠져나온 것도 사실.
“이 난리에 꼭 공동묘지로 다시 돌아와야겠어?”
“역시 공동묘지보다 교회가 낫겠죠?”
“미쳤냐!”
블라드는 다시금 양탄자를 펼치려는 니벨룬을 보며 서둘러 그의 배낭을 걷어차 버렸다.
“아오 씨! 뭐야!”
“배낭 안에 든 게 많거든요. 보기보다 꽤 무겁습니다.”
그러나 걷어찬 배낭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을 뿐.
그러나 정작 무겁다고 말하면서도 니벨룬은 아무렇지 않게 배낭을 짊어질 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
니벨룬의 질문에 업고 있던 쟝을 바짝 당긴 블라드는 서둘러 공동묘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묘지는 도시의 외각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바로 옆에는 성벽이 있어야 할 테지만 지금 블라드의 눈에는 안개만이 가득할 뿐 어떠한 주변 시설도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는 못 나갈 거다. 이미 마경화(魔境化)가 진행된 것 같군.”
아마 지금이라면 밖에서도 들어올 수 없을 거라 말한 피에르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피에르는 들고 있던 법봉을 다 잡고는 묘지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모시암이 이리된 것은 안개를 통해 움직이는 사특한 저주 때문이지.”
저주는 흑마법이 자랑하는 강력한 술법이었지만 정작 그 근원을 해제한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공통적인 약점이 있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근원을 부수면 되는 거다.”
“그 근원이 뭔데요?”
블라드의 말에 천천히 움직이는 피에르의 법봉.
그 법봉을 보며 슬쩍 물러선 블라드였지만 정작 피에르의 손끝은 저 멀리에 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중이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저 녀석이겠지.”
“······.”
도시 한 가운데, 바다 같은 안개 위에 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블라드가 갈라내어 반쪽밖에 남지 않은 녀석이었지만 역천의 나무는 지금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비명을 먹으며 안개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
“크으으으!”
안개 속에서 힘겹게 방진을 유지하고 있는 성기사들.
그러나 미처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몇몇 기사들은 이미 진형 밖에서 사정없이 갈라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참이었다.
이마에 그은 성흔이 무색할 정도로 앞에 있는 목 없는 자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무슨 사특한 수를······.”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귄터에게는 낭패했다는 표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단순히 검과 검의 맞부딪힘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힘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은 지금도 성기사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중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익숙한 방법을 통해서.
“어쩐지 구마전서에도 적혀 있지 않더라니······.”
이제야 조금이나마 여인의 정체를 알아챈 귄터의 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분명 사특한 존재였으나 마(魔)에게서 태어난 존재는 아니었다.
“배교자(背敎者)!”
신의 뜻을 저 버린 배반자.
그것도 보통 영성을 쌓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지금의 이적(異跡)들.
“이름을 밝혀라! 이 간악한 것아!”
증오를 가득 담아 씹어 내뱉듯 외치는 귄터였으나 정작 그를 보고 있는 여인의 미소는 포근할 뿐이었다.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어차피 쓸어내면 지워질 것들인데.”
희미한 웃음을 지은 여인은 곧 두 손을 모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역천의 나무.
그리고 바로 앞에는 피 흘리고 있는 신실한 신의 종들.
모두가 그녀가 바라마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저 멀리 안개 밖에 있는 하늘을 향해 여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곧이어 퍼지는 신에게 바치는 찬송가.
“······뭐?”
너무나 곱고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에 성기사들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다만 기이한 것은 아름다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들려오는 찬송가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불길했다는 것이었다.
익숙한 운율 속에서 거꾸로 외우는 가사 소리를 들으며 성기사들조차 그만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가장 위대한 흔적 (3)
안개 가득한 도시를 가르는 세 명의 사내가 있다.
가장 앞장선 것은 검이며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신성과 신비.
나이도 종족도 속한 곳도 모두 다른 세 명의 사내였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향하는 곳만은 같았다.
도시 한 가운데 거꾸로 떠 있는 역천의 나무를 향해서였다.
“조금 있으면 도착이다!”
들고 있던 피에르의 법봉이 광장으로 다가갈수록 떨리고 있었다.
사특한 존재를 거부하는 이단심문관의 법봉은 이미 광장 안에 있는 존재들을 눈치채고는 거친 분노를 표현하는 중이었다.
“그럼 일단 나무부터······. 윽!”
그러나 일행이 광장으로 다가갈수록 안개를 따라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으아아······.”
제일 먼저 주저앉은 것은 니벨룬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주저앉은 사람은 청각이 예민한 블라드.
쫑긋거리고 있는 둘의 귀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노랫소리가 맴도는 중이었다.
‘뭔 놈의 노래가!’
영혼을 뒤흔드는 것만 같은 소리.
들리는 목소리는 청아해 관심을 기울이게 했지만, 운율 속에 담겨 있는 슬픔과 분노는 마음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있던 찌꺼기들을 수면 위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안 되겠군!”
같은 신의 뜻을 좇지만 걷는 길은 다른 사제들.
이단심문관이자 구마사제인 피에르는 자신이 노래에 대항할 마땅한 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법봉을 블라드와 니벨룬의 머리에 겨누기 시작했다.
“한방이면 되겠지.”
그러나 법봉을 내려치려는 그 순간 블라드의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가느다란 노랫소리.
-참으로 아름답구나. 떠오르는 아침 해는.
“음?”
이제야 정신을 차린 어린 부제가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온전히 대항하는 것은 불가했으나 최선을 다한 쟝의 노래는 적어도 일행을 지킬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봉우리. 내 아버지가 지으신 그 솜씨가 깊구나.
기이했으나 분명 찬송가에 기반하고 있는 여인의 노래.
쟝은 그 운율에 사이사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꿰어가며 일행을 사특한 저주로부터 건져 올리고 있었다.
“······나도 부제나 하나 키워둘 걸 그랬군.”
쟝의 노래가 시작되자 귀를 막고 있던 블라드와 니벨룬의 두 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라앉는 감정의 찌꺼기들만큼이나 점점 명료해지기 시작하는 정신.
앞서 있던 것은 블라드의 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린 부제의 신성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
“크으으윽!”
지금도 성기사들의 귓가에는 계속해서 거짓된 찬송가가 들려왔다.
몇몇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고막을 터트리기까지 했지만, 정작 그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영혼을 통해 닿는 것.
괴로워하는 기사들을 보며 땅에 닿지 않는 여인이 빙긋 웃고 있었다.
‘꽁꽁 막혀 버렸군!’
꽉 다물고 있는 귄터의 입술 사이로 뜨끈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사특한 존재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큰 힘을 발휘하는 그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상성에 의해 완벽히 틀어막히고 말았다.
“······다들 잘 들어라.”
스스로를 성벽으로 삼아 두터운 진형 안에 숨은 성기사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확실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귄터는 자신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그 순간이 오기 전,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보기로 했다.
“크게 모아 한 번에 후려치겠다. 신성의 끈을 모아 나에게 연결해다오.”
“하지만 단장님!”
“지금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건 나다.”
주위의 기사들은 귄터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챘지만 이미 그의 의지는 굳게 세워졌다.
파멸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자세일 것이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이 일을 알려라.”
누군가의 희생을 피할 수 없다면 내가 한다.
천천히 검을 세워 성흔이 새겨진 이마에 가져다 댄 귄터.
스스로를 교회의 문양으로 만들어 하나의 상징이 되려 하는 그를 보며 성기사들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래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시겠죠.”
그리고 저 멀리서 귄터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
그녀는 귄터의 자세를 보며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목 없는 기사들을 모아 진형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분께 다가가도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으시더이다.”
모든 길이 막혀 버린 인간은 결국 신의 은총을 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걸어봤기에 안다.
신의 뜻은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멀고 원한만큼 쉽게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천상 군대의 지휘관인 성(聖) 로지노시여.
귄터의 기도에 따라 성기사들의 검이 하나씩 서로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그분께 가는 영광의 길을 인도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검을 통해 전해지는 각자의 신성.
자신의 세계가 아닌 신의 세계를 담은 그들의 신성은 조금의 무리 없이 검을 타고 흘러가 귄터의 검 끝에 찬란한 빛으로 맺히기 시작했다.
-바칩니다. 저를 통해. 무한한 영광을.
희생을 통해 신에게로 나아가는 첫걸음. 아인 소프(Ain soph).
성기사들이 만드는 신성이 빛나는 계단이 되어 귄터를 천상 군대의 지휘관 옆으로 보내고 있었다.
-지금······!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더 위의 세계로 승천하려는 귄터.
아주 잠깐 땅 위에 머물 빛으로 사특한 존재들을 불태울 생각이었으나.
-응?
순간, 그의 눈으로 반짝이는 별빛 하나가 보였다.
새까만 밤하늘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분명 환하게 빛나고 있는 별빛이었다.
“더 이상은 못 버텨요! 셋은 너무 무겁다구요!”
“그래도 가야지 어쩔 거야!”
양탄자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새하얗게 질려 있는 피에르와 양탄자의 깃을 움켜쥔 채 애써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니벨룬.
감옥에서 사용했던 양탄자와는 다르게 훨씬 크고 화려한 그것은 조금씩 허공에 떠 있는 역천의 나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곧바로 하늘을 날아서.
“······여기라면 떨어져도 닿겠지.”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나무를 본 블라드는 결심을 굳혔다는 듯 조용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역천의 나무를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 황금색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갑니다!”
“이런 젠장!”
밑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꽉 감은 피에르에게서 자그마한 기도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에르에게서 니벨룬으로 그리고 다시 블라드에게로.
도저히 겹치지 않을 것만 같은 세 개의 세계가 다시 한번 천천히 서로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부터.”
[기선제압은?]
목소리의 물음에 따라 조용히 대답하는 블라드.
그의 가르침을 깊은 곳에서 떠올릴수록 블라드의 황금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좋아.]
신성과 신비의 빛을 넘겨받은 블라드가 양탄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닿을 곳 없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별빛 하나.
높디높은 곳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 새까만 밤하늘을 가르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안 돼!”
누구의 시선이라도 잡아끌 듯한 화려한 황금색.
저 밑에서 보고 있는 여인이 당황한 듯 크게 외쳤지만 이미 니벨룬의 신비는 그녀의 눈을 속이고 별빛 하나를 땅 밑으로 보낸 뒤였다.
“흐으으으으!”
날개 없기에 추락하지만 떨어지는 검 끝만은 내가 세웠다.
시작은 작은 반짝임이었으나 마주쳤을 때는 커다란 빛무리로.
세계와 세계의 만남은 때로는 거대한 투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도대체! 애들은! 왜!”
분노를 통해 날카롭게 세운 블라드의 삼각뿔이 촉수를 휘젓는 나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신성과 신비, 검의 세계가 기대어 있는 삼각뿔.
그리고 뿔의 가장 밑에는 그 어떤 세계보다 정당한 하얀색의 세계가 받쳐주고 있었다.
“죽인 거냐! 이 개자식아!”
날카롭기에 막을 수 없고 정당하기에 거부할 수 없다.
그아아아아-!
대애애애애애엥-!
기사의 검이 내리꽂힌 그곳에서부터 거대한 안개의 물결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는 종탑의 종이 깨어질 듯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물결이었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나니.
안 되는 이유 대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블라드의 검 끝이 기어이 여인의 안개를 뚫고 역천의 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응? 저건 뭐야?
천천히 낙하하던 블라드는 저 아래에서 나무의 주위를 돌고 있는 새까만 아이들을 보았다.
계속해서 나무 주위를 돌고 있던 아이들은 끈적한 어둠을 헤치고 내려오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또 꿈속이에요?”
[아니, 여기는 나무의 세계다.]
이번에는 쟝의 꿈속이 아닌 나무의 세계 안.
키하노는 지금 블라드가 저주의 근원에 온전히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요?”
[베어야지. 저놈을.]
저 아래서 나갈 곳 없어 빙빙 돌고 있던 아이들이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블라드를 보며 눈이 부신 듯 손바닥을 들어 올린 아이들.
그러나 바라보고 있는 시선만큼은 오롯이 빛나는 블라드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를 베면요? 아이들은 어떻게 돼요?”
[······같이 잘려나가겠지.]
블라드가 키하노에게 아이들을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의 발목마다 얽혀 있는 나무의 가지.
안타깝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영혼은 이미 나무의 가지에 강하게 얽혀 있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저주의 주박이었다.
[여기서 베지 않으면 저주는 계속해서 퍼질 거다. 북부 전체를 이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겠지?]
“······”
아이들까지 같이 베어야 한다는 키하노의 말에 블라드의 검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하.]
키하노의 한숨은 깊었지만 블라드는 단순한 정의감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거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블라드는 오직 아이들만이 꿀 수 있는 꿈에 초대받은 사람.
여전히 무언가가 되기를 꿈꾸기에 소년일 수 있는 블라드는 가혹한 현실 대신 또 다른 가능성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업이다.]
그렇다면 알려줘야겠지.
굳이 자신이 굽히지 않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겠다는데.
[나라는 존재는 곧 하나의 세계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귀한 가능성이다.]
세계의 시작점은 나에서부터.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부터.
[검은 곧 붓이다. 휘두름으로 칠하는 색색의 색깔들은 너라는 사람을 표현해주는 도구가 된다.]
세계의 시작선은 검에서부터.
검을 통해 나라는 세계가 여기 있다 알리는 것이 바로 기사의 시작.
“크으으으!”
꿈틀거리는 촉수를 피해낸 블라드는 천천히 검을 들어 역천의 나무를 향해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어이 닿은 검 끝에서부터 삿된 나무의 비명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너의 색을 칠해왔다면 이제는 완성할 때.]
점과 선을 통해 도화지를 만들어내었다면 이제부터는 그곳에 나만의 색깔을 칠해야 할 때.
그렇게 그려낸 세계를 밖으로 꺼내놓을 수만 있다면 나만의 것이었던 세계는 모두가 알아보는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세계를 똑바로 세상 위의 완성할 수 있는 자. 그 사람을 바로 소드마스터(Sword Master)라 부른다.]
“······!”
들려오는 말은 가르침이었으나 느껴지는 것은 이끎이었다.
블라드는 키하노의 말을 따라 나무에 밀어 넣은 검 손잡이를 힘껏 돌리기 시작했다.
온통 거꾸로 반전된 세상을 똑바로 놓기 위해서.
“끄아아아!”
그아아아아아-!
이 어둡고 깜깜한 세계에서 스스로를 불태우는 어린아이들은 가엾다.
비록 되살리지는 못할지라도 이 아이들을 바른 방향으로 보내는 것이 내가 그리는 세계다.
우드드드득-!
블라드가 돌리는 방향에 따라 깊숙이 박혀 있던 가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로 솟아 있던 뿌리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밀어 넣은 검을 통해 세상을 반전시키려는 블라드의 몸짓이 있었다.
여인이 칠해버린 새까만 세상을 긁어내 본래의 색을 되찾으려는 기사의 몸부림이었다.
※※※※
콰르르릉-!
새까맣기만 하던 모시암의 하늘 위로 조금씩 어둠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다다른 것은 본래 이곳에 있어야 할 비구름들.
“이건 도대체······.”
신성한 빛으로 감싸여 있던 귄터였지만 지금 이곳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안돼!”
세차게 내리는 비와 함께 안개가 씻겨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리는 비 밑에서부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나무 한 그루.
“내 아이들을 돌려줘!”
“지금이다! 전원 돌격!”
서둘러 수인을 짚어보는 여인이었지만 이제야 기회를 잡은 성기사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오늘만큼 하늘에 가까이 닿은 적 없다는 듯 귄터의 온몸이 신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뿌리는 땅으로 가지는 하늘로.
모두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천천히 기울어지는 나무를 따라 이제야 하늘로 향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용. 블라드.”
여인이 그려놓은 새까만 그림 위로 블라드의 세계가 덧칠되고 있었다.
위상(位相)의 실현(實現).
블라드가 그려낸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모시암의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황금색이었기에 저 멀리에 있는 백발의 남자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흔적.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어른들끼리 이야기해 볼까.]
들고 있는 검은 세계수의 검이었으나 그려낸 것은 은색의 검.
힘이 빠져 잠들고만 블라드를 대신해 일어선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블라드를 대신해 그가 그린 하늘에서는 어느새 하얀색의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하나지만 다른 둘
아주 오래된 맹약이 있었다.
제국의 시작과도 같이했던 그 맹약은 한 남자의 핏줄과 의지가 끊기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새하얀 바닥 위로 퍼지는 붉은 빛의 액체.
갑작스레 찾아온 날카로운 통증에 사르누스는 목을 감싸 쥔 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컥!”
갈 곳 잃은 손짓에 따라 무너져 내리는 장식장의 술병들.
무언가를 벗겨내려는 듯, 다급하게 목덜미를 긁어내는 그의 손톱 끝에는 이미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끄으으······!”
가장 오래된 용의 목덜미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기이한 문신들.
뱀처럼 타고 오른 새까만 문신은 마치 교수대의 그것처럼 사르누스의 목줄을 죄며 천천히 그의 숨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건······. 이럴 리가······.”
핏발 선 사르누스의 두 눈이 창밖을 넘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일 리가 없었지만 볼 수밖에 없는 광경.
저 멀리 북쪽에서부터 몰려든 폭풍우 속에서 새하얀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 선명하디 선명한 하얀색은 사르누스의 영혼 속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기억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기억과 함께 박혀 있는 것은 제국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남자의 이름.
제국의 건국왕이자 위대한 용살자. 그리고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남자.
“······프라우센!”
저 멀리서 내리치는 하얀 번개를 보며 가장 오래된 용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너는 약속을 지켰느냐 비겁한 용아.
살려달라 구걸하며 내 앞에서 조아렸던 그때의 약속을 지켰느냐.
※※※※
우르르르릉-!
도시 모시암의 위로 새하얀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낙뢰는 새까맣기만 하던 도시에 자신만의 색을 더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인데?]
블라드는, 아니 블라드를 대신한 키하노는 목 없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싱긋 웃고 있었다.
[하는 짓도 똑 닮았고 말이야.]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아이들의 숨결을 수확하던 삿된 신부.
그와 똑같은 모습의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키하노의 차가운 분노가 치켜세워졌다.
[너였구나.]
“······!”
그리고 키하노가 가리킨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시작은 푸르렀으나 끝은 검은 여인.
그녀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속에 깃든 거대한 존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뛰지 않는 심장이라 할지라도 느낄 수 있는 공포가 그곳에 있었다.
“저 남자를 당장······!”
여인은 키하노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기사들을 부르려 하였으나 이미 키하노의 오른쪽 눈에서는 그만의 세계가 맺히고 난 뒤였다.
[나를 뭐?]
“······!”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새하얀 빛이요, 그다음으로 닿은 것은 소리이니.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도 키하노가 있었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도 키하노였다.
저 뒤에서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키하노의 잔상만이 여전히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쾅-! 콰앙! 쾅쾅쾅!
“너무 빨······!”
“끄아아악!”
뒤늦게 와 닿은 굉음을 따라 목 없는 기사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블라드가 그렸으나 키하노가 칠하는 세계.
난생처음 그려낸 어설픈 블라드의 세계는 키하노의 속도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꺄으으윽-!”
여인은 자신의 복부로 와 닿은 묵직한 충격에 그만 아찔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살아있지 않기에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몸.
그러나 그녀는 지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법칙을 뛰어넘은 존재감이 그녀라는 실체 자체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대애애애앵-!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광장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연기 위에서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오직 블라드가 바로 세운 황금색의 나무뿐.
그 위에서 날뛰는 하얀색의 세계가 크게 포효하기 시작했다.
[힘없고 죄 없는 자들을 위해 세운 나의 땅 위에서!]
내뻗는 검로 하나마다 높다란 건물들이 갈라지고 키하노가 내딛는 발걸음 하나마다 지면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여인이 그려낸 새까만 세계 하나하나를 거칠게 벗겨내는 키하노의 몸짓이었다.
[도대체 네놈들은 뭘 하고 있던 거냐!]
“꺄으아아악!”
키하노라는 거대한 세계에 짓눌려 온전히 땅에 닿고 만 그녀의 두 발.
여태껏 외면하고 있던 신의 존재를 느끼며 여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이들은 왜 죽이고 다닌 거냐!]
“죽인 게 아니야!”
웃고 있던 여인이 울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히는 것은 검은색의 눈물.
누구도 닦아줄 수 없는 아이 잃은 어미의 원망이 다시금 그녀의 세계 안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보호해주려고 그랬던 거야!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부터!”
새까맣게 타오르던 아이들 위로 꽂혀 있던 교회의 문양이 있었다.
단순히 누군가의 명분만으로 쓸려버리고 만 아이들의 무덤 옆에서 슬피 울던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고귀했으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던 사람이었다.
“내가 지켜줄 거야!”
그러나 지금 울부짖고 있는 것은 후회와 망집에 사로잡혀 끔찍하게 갈라지고 만 그녀의 성대.
차마 흘려내지 못해 온통 새까맣게 번져버린 여인의 두 눈으로 검은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신이 아닌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
현실과 과거를 구분하지 못한 여인의 절규가 안개 너머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까아아앙-!
[큭!]
“흡!”
검과 검이 부딪히며 요란하게 터져 나가는 불꽃.
그와 동시에 키하노의 세계가 그려낸 은색의 검이 무언가 혼란스럽다는 듯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
“······.”
놀란 표정의 키하노와 딱딱히 굳어 있는 프라우센.
안개와 함께 나타난 남자는 겨우 기억을 찾은 키하노도 익히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안배는 제대로 작동한 것 같군.”
마주치는 눈동자로 서로의 모습이 비친다.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얄궂은 운명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둘을 세워놓고 말았다.
“역시 어린 놈치고 심상치 않은 녀석이긴 했지.”
까아아앙-!
혼란스러워하는 은색의 검이 떨고 있다.
가장 위대한 검사와 가장 위대한 용살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기에.
누구를 향해 뻗어야 할지 모르는 검 끝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안 죽일 건가.”
[누구를.]
애써 말을 돌리는 키하노를 보며 프라우센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용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
[······여기에 용이 어디 있나.]
용이란 완벽했기에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
산산이 조각내었지만 모이기만 하면 부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이었고 남자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것을 두려워했다.
[내가 품은 것은 별인데.]
그러나 누구는 소년은 통해 불길한 용을 보지만 누구는 소년을 통해 찬란한 별을 봤다.
같은 것을 보았지만 지금 둘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
나라는 존재의 기반은 무엇인가.
떨어져 있던 기간만큼이나 다른 기억을 지니고 있던 둘은 방금의 대화로 키하노와 프라우센이라는 존재로 확연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식이 잘못되었나 보군.”
가능성을 꿈꾸는 키하노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돌아온 프라우센은 이제 망설임 없이 서로에게 검을 겨눌 수 있었다.
이 앞에 있는 자는 내가 아니니까.
까아아앙-!
감고 있는 오른쪽과 왼쪽 눈이 같은 세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은 같았을지라도 그리는 모양은 다른 세계.
“끄으읍!”
[흐아아압!]
완벽히 닮은 필살의 일격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아득히 높은 수준의 세계들이었다.
쾅-! 콰앙!
“이러려고 돌아온 것이 아닐 텐데!”
[아니!]
맞부딪히는 움직임 한 번에 어김없이 무너지는 건물 하나.
[이러려고 돌아온 거다!]
황금색의 나무와 울고 있는 여인을 뒤로한 남자들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천상 군대의 지휘관을 영접하던 귄터와 성기사들은 멍한 눈빛으로 무너지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두 남자의 대결.
보기만 해도 전율이 도는 그 광경에 누구도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검들이 맞부딪힐 때마다 튀어 오른 불꽃들이 새까만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점점 제 색을 찾기 시작하는 모시암의 하늘.
그곳에서 비쳐오는 햇빛이 귄터의 눈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술식을 돌리겠다!”
마치 계시와도 같은 햇빛이었다.
귄터를 스쳐 지난 햇빛이 똑바른 길을 그리며 이번에는 황금색의 나무를 비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 색과 꼭 닮은 황금색의 나무.
신의 세계로 살펴본 그곳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 이제야 보이는 햇살이 눈 부신지 손바닥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훌륭하다 블라드!”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기적일 것이다.
잔뜩 뒤틀려버린 도시에서 간절히 원했던 기사의 염원이 기적과도 같은 무언가를 불러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아이들을 도와주소서.
천상 군대의 지휘관을 영접하기 위해 모았던 신성이 하늘이 아닌 블라드의 나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무너지는 도시, 가라앉는 성벽.
그러나 그곳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성기사들의 기도 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죄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여겨주소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기도. 종부성사(終傅聖事).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신의 기사들이 땅 위에 황금색과 하늘 아래 하얀색을 통해 길을 열어내고 있었다.
“안 돼! 내 아이들!”
여인의 검은 눈물이 그것을 가로막으려 하였지만 이미 신께서는 가련한 아이들을 보셨다.
그리하여 열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통한 문.
찬란한 구원의 빛이 모시암 아래로 비치고 있었다.
※※※※
“저건?”
일곱 가문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군대의 진형.
잔뜩 긴장해 있는 기사들 앞으로 심상치 않은 빛기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안개에 가려져 있던 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현상(奇現象)이었다.
“오오······. 저 빛은.”
“저 빛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북부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할 수 있는 강철공 티무르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을 높여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 빛은 갈 곳 잃은 영혼들을 인도하는 고귀한 기도입니다.”
한눈에 모시암 위로 깃든 빛무리의 정체를 간파한 노인.
북부정교회의 수장인 콘라드 교황은 지금 모시암의 위로 비치는 빛무리가 승천의 의식을 위한 종부성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안에 있던 저의 기사들이 신께 향한 길을 연 것 같습니다.”
“성기사들이······.”
이 또한 신의 은총이라 말하며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콘라드 교황.
그러나 그의 설명에도 티무르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두 달이나 지났는데 저 안에 아직도 생존자가 있었단 말인가?’
너무나도 자욱했던 여인의 안개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렇기에 안에 있던 시간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밖에서는 이미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간.
그렇기에 지금 티무르가 가지는 의심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기도 했다.
우르르르릉-!
“공작님!”
“봤다.”
저 앞에서 모시암의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터지기라도 한 듯 처참하게.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음에도 무너져내리는 성벽을 보며 북부연합의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들······. 각 가문에서 보낸 기사들을 모아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 티무르.
그는 당황감을 감추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지시했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자들만으로 모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티무르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무너져 내린 성벽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북부 최강의 기사조차 당황하게 만든 세계의 울림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마치 소드마스터라도 뛰쳐나온 것 같군.”
높은 경지에 있었기에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세계의 울림.
그 울림에 압도당하고 만 티무르는 서둘러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세계를 불러일으키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압박감.
지금 누가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경지에 서 있는 모든 기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
“이런.”
자욱한 연기 속에서 서 있는 백발의 남자.
프라우센은 도시 밖에 느껴지는 기사들의 기척을 감지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들.
그중에서도 하나만큼은 자신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갖춘 자였다.
[끄응!]
성벽 잔해를 들추고 나온 키하노가 웃기 시작했다.
돌가루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만 심각한 표정의 프라우센과는 달리 그는 웃을 수 있었다.
[여기 북부에는 이 녀석 친구들이 많거든.]
“······.”
[나 포함해서 전부 감당할 수 있겠어?]
프라우센의 시선이 떨리고 있는 키하노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이 좋군.”
[이 녀석이 또 운이 좋아.]
키하노는 필사적으로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둘의 의지는 동등했으나 그것을 담는 그릇의 차이만큼은 확연할 수밖에 없는 지금,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한 것은 본연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프라우센이었다.
“잊지 마라. 내가 어떠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는가를.”
찬란히 비치는 빛무리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는 여인.
지금도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를 둘러업은 프라우센은 마지막으로 키하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용을 죽이기 위해 돌아온 거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
천천히 물러가는 안개의 파도와 함께 도시 모시암의 위로 조금씩 오늘의 태양이 물들기 시작했다.
[용이 아니라 블라드라니까······.]
프라우센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점점 기울어져 가는 키하노의 시야.
쓰러져가는 그에게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빛나고 있는 황금색의 나무.
이제 은색의 검이 아닌 제 색을 찾은 블라드의 검 위로 반짝이는 가루들이 재잘거리며 블라드의 나무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황금색의 기사 (1)
안개가 걷히고 난 뒤의 모시암은 깊이 새겨진 상처만 가득한 곳이었다.
단단했던 성벽은 무너지고 도시의 중심지였던 광장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가버린 상황.
모시암에서 발생한 변고에 다급히 달려온 북부연합군을 맞이했던 것은 거의 반파(半破)되었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히 쓰러져 있던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광경이 고작 두 명이 벌인 일이라고?”
온갖 잔해가 휘날리는 도시를 보며 강철공은 가만히 눈썹을 긁어대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보고였다.
군대가 들어와서 부숴도 이 정도로 할 수는 없을 텐데 그것도 단둘이서 한 일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바예지드의 애송이고 말이지?”
“······정교회의 기사단장인 귄터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볼코프의 보고를 들은 강철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믿기 힘든 말이라 할지라도 북부정교회의 기사단장이 똑똑히 증언하고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건물이었던 잔해를 밟고 있던 티무르는 저 멀리 보이는 모시암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 처참한 잔해 위에서 홀로 꿋꿋이 서 있는 황금색의 나무.
온통 색을 잃어버린 이 도시에서 홀로 확연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성기사들의 단장인 귄터는 증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도시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 기사가 있었다고.
이제는 북부 최고의 권력자도 확실히 기억할 그의 이름.
그 기사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했다.
※※※※
“그래서 피에르 주교는?”
창틀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던 블라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는 찻잔 하나 들어 올리기 버거워 보였지만 보이는 눈빛만큼은 온전히 제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게요.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네가 마지막까지 같이 있지 않았어?”
“그렇기는 했었지요.”
뾱뾱뾱-
사용했던 훈증기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니벨룬은 마법 도구들을 배낭 안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들어갈 리 없는 부피였건만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는 배낭을 보며 블라드가 수상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연합군을 보고서는 화장실 가신다고 사라지셨는데 아직까지 안 오시네요.”
“튀었네.”
음미하며 마셔야 할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은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생긴 것은 목석이었으나 하는 짓은 여우 같은 노인네.
면죄부 사건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있어야 확실한 내막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블라드의 말처럼 닥쳐온 사태는 어찌 해결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정작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전혀 알아낸 것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도시를 망쳤어야 할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이름까지도.
아쉽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이 품속을 뒤적거렸다.
“사실 이런 게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는데요.”
“이게 뭔데.”
신비를 쫓는 마법사인 니벨룬.
본디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신비의 단서들을 보물처럼 생각하며 쉽사리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나 니벨룬은 블라드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범상치는 않아 보이더군요.”
니벨룬이 건넨 것은 유리 조각같이 생긴 무언가의 파편들이었다.
마치 깨어져 나간 구슬같이 생긴 조각들은 왜인지 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것이었다.
“한참 조사 중인데 함부로 가져와도 되는 거야?”
“땅에 떨어진 것은 본래 주인이 없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참으로 수인족다운 대답이었고 뒷골목 출신다운 납득이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고?”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처참히 깨져나가서요.”
들여다본다고 알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료했던 블라드는 햇빛에 유리 조각들을 비추어보았다.
반짝이는 조각 안에는 선명한 파란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씨앗이로군.]
“음?”
깨어졌으나 오묘한 빛을 머금고 있는 유리 조각.
블라드의 시야를 통해 그것을 바라본 키하노는 단번에 파편의 정체를 간파해내었다.
[세계로 바라봐라. 다른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알아볼 수 있겠지.]
평범한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키하노의 세계에 영향을 받은 블라드라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말에 가만히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는 내면의 세계를 통해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내뻗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은 블라드의 세계.
“응?”
그 세계로 바라본 유리 파편에는 하나의 장면이 깃들어 있었다.
짙푸른 바다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의 모습들.
바다 끝 절벽 위에 서 있던 나무는 파도 아래서 헤엄치고 있는 어린 정령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벤이 알려주었던 오징어라는 생물처럼 생긴 정령들이었다.
“이거······.”
짧았으나 강렬한 파란색으로 다가오는 파편의 기억.
그 장면을 마주한 블라드는 마치 하이날의 가보에서 보았던 그때의 느낌과도 흡사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나무라 생각했건만 역시 이런 방법이었군.]
키하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언가의 파편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얀색 뱀이 있던 데어마르의 언덕.
하이날의 가보였던 노란색 호박석.
그리고 도브레치티의 숲에서 목 없는 트롤이 서 있던 곳.
그 모든 곳에는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여자 꼭 잡아야겠다.”
“네?”
정령들을 품어주던 나무들처럼 거꾸로 선 나무 또한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품어주던 것이었다.
비록 방향은 잘못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처참히 깨어져 나간 정령수(精靈樹)의 핵을 보며 블라드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움켜쥐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정작 방의 주인도 아니었건만 들어오라 말하는 니벨룬의 말에 빼꼼히 문이 열렸다.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방문을 두드린 것은 안드레아의 어린 부제인 쟝이었다.
새하얀 법복을 차려입은 쟝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부제님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어야지요.”
쑥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한 게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블라드는 여인의 노랫소리에 대항했던 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준비되었다고 알려드리러 왔어요. 혹시 아직 몸이 불편하시면······.”
“아닙니다.”
블라드는 끄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갑옷을 향해 손을 뻗은 블라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쟝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스티아 님의 마지막 모습일 테니 꼭 배웅해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가겠다 말했으나 여전히 끙끙거리는 블라드에게 다가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는 어린 부제.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샛노란 햇빛이 둘의 등 뒤로 내려앉고 있었다.
가만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니벨룬은 저 멀리 보이는 교회를 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대애엥- 댕-
정갈히 갑옷을 차려입은 성기사가 울리는 모시암의 종.
비록 종탑에서 떨어져 내려 찌그러진 종이었으나 그래도 본연의 역할만은 다하고 있었다.
“다 날아가 버렸군요.”
“그래도 1층만큼은 온전하게 남아 있어요. 다행인 일이죠.”
2층 위부터는 아예 날아가 버린 교회였으나 쟝의 말처럼 예배실이 있는 1층만큼은 기적처럼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천천히 줄을 서시오!
-부상 당한 사람들은 옆으로!
그렇기에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은 그곳밖에는 없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아직도 모시암에 이렇게나 많은 생존자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블라드 님이십니다. 길을 열어주세요.”
쟝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놀란 듯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변에 있던 모시암의 주민들까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길을 열어주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절도 있었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고작 하룻밤이었으나 밖에 있던 그들에게는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내막을 잘 모르는 병사들은 지금 블라드를 그 긴 시간 동안 마(魔)에게서 모시암을 지켜낸 영웅으로 오해하는 중이었다.
“왔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교회 앞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강철공 티무르는 그런 오해를 굳이 해소하려 하지 않았다.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기쁨이 있어야 할 테니까.
도시 모시암은 무너지고 북부의 위신이 크게 떨어진 이때, 크게 흔들리는 민심을 잠재울만한 돌파구는 오직 정교회의 성기사들과 블라드라는 기사의 이름 이 둘 뿐이었다.
“소문이 자자한 북부의 신성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는군. 물론 그동안 볼코프에게서 귀가 닳도록 듣기는 했지만 말이야.”
블라드는 티무르 옆에 서 있는 기사를 알아보고는 자그맣게 목례를 건넸다.
지금 티무르를 수행하고 있는 그는 과거 린드부름의 토벌에서 본 적 있던 투창의 볼코프였다.
“들어가지.”
“네.”
스스럼없이 어깨를 감싸 안는 티무르였지만 블라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고귀한 공작의 기꺼움보다도 자신을 위해 검을 막아주었던 유스티아의 마지막 모습만이 가득했으니까.
-바라노프 공작님 입장하십니다!
아직 채 치워내지 못한 잔해들을 따라 들어선 예배실에는 이미 갑옷 입은 자들이 가득 서 있었다.
북부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일곱 가문의 기사들.
이미 안면이 있던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기사들이 강철공 티무르와 함께 들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
“······.”
자격이 있다는 티무르의 말에 블라드는 그만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언제나 당당할 자격을 찾던 블라드였으나 지금만큼은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정말 자격이 있는 자들은 지금 저 앞에서 가지런히 누워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말이다.
-오늘 우리는 고귀한 뜻으로 행한 이들을 그분의 곁에 보내기 위해 이곳에 서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유일한 북부의 공작이었으며 앞에 있는 노인은 고귀한 정교회의 교황.
누구라도 원할 거대한 인맥들이었으나 블라드는 그저 저 앞에 누워있는 하나의 관을 향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햇빛을 따라 반짝이는 그녀의 백금발은 처음 만났던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거대한 악(惡) 앞에서도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 이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교황의 집전 아래 시행되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장례식.
그러나 천천히 퍼져나가는 교황의 목소리만큼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충분히 닿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모시암에 있는 모두를 위한 자리였기에.
“······.”
저 앞에서는 교황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멍하니 유스티아의 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 안은 채 죽어가던 고귀한 성기사.
많은 인연을 쌓지는 않았으나 블라드는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았고 그리고 이제는 그 빚들을 갚을 기회조차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세.”
“네.”
새겨진 상처가 깊은 만큼 그에 대한 어루만짐은 최대한 격식이 있었다.
북부의 기사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를 마치자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강철공과 블라드 뿐.
“너무 놀라지 마시고.”
“네?”
계단을 오르던 블라드는 넌지시 건네오는 티무르의 말에 반문했으나 그는 그저 웃으며 앞에 있는 교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겠다고 하시니 감사히 받으시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티무르는 들고 있던 꽃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누워있는 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
쟝과 블라드를 위해 기도 올리던 사제들과 사특한 여인을 향해 검을 치켜들던 성기사들.
그들을 위해 하나씩 꽃을 내려놓던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유스티아의 관 앞에서 멈춰 섰다.
“고마웠어요. 유스티아.”
안나의 검은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도 그녀는 블라드의 뒤에 서 있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앞에 누워있는 그녀를 위해 블라드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꽃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예전 그녀가 깎아주었던 사과의 짠맛이 혀끝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바예지드의 블라드. 모시암을 지켜낸 기사.”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꽃을 조심스레 유스티아에게 내려놓은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교황을 보았다.
오랫동안 지은 미소만큼이나 자연스레 자리 잡은 주름들.
“슬픈가?”
“네?”
지금도 쉼 없이 출렁이는 블라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늙은 교황이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떠나게 되는 법이지.”
블라드에게 다가온 교황은 가만히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남기고 가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네?”
교황의 손끝이 어느새 블라드의 갑옷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은 갑옷을 바꿨음에도 굳이 매달아두었던 블라드의 자부심이 있던 자리였다.
“이 글귀를 꼭 자네에게 전해야 한다고 유스티아가 말했었지.”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산 로지노에서 선물한 글귀는 아직도 블라드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세찬 비를 뚫으며 종탑을 향해 기어올랐던 소년을 향해 유스티아가 선물해 준 글귀였다.
“유스티아는 그분의 곁으로 갔어도 결국 무언가를 남기고 가게 되었군.”
치이이익-
글귀를 덮은 교황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뜨겁게 달아오르는 갑옷을 느끼며 블라드는 당황했지만, 정작 이적(異蹟)을 만드는 교황의 표정은 평온할 뿐이었다.
“부디 자네가 죽어간 모든 이들을 위한 증거가 되어주기를 바라네.”
죽은 자들은 떠나지만 남아있는 자들은 짊어져야 하는 법.
콘라드 교황은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이들을 위해 블라드의 가슴에 또 하나의 글귀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죽음이 지금의 이름 아래서 찬란히 빛날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렇게 해주리라 나는 믿고 있네. 쇼아라의 블라드.”
“······교황님,”
블라드는 뜨거워진 자신의 흉갑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새하얀 연기가 걷히고 나자 보이는 것은 유스티아가 선물한 글귀 아래 새로이 새겨진 두 개의 단어.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블라드.
블라드 아우레오(áureo).
“태어난 이름은 블라드이겠으나 그분의 이름 아래서는 아우레오일지니.”
가진바 이름조차 제대로 외치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단어 하나가 따라붙게 되었으니.
일곱 가문의 기사들을 증인으로 삼은 그 단어는 블라드의 피를 따라 영원히 이어질 이름이었다.
황금색의 기사 (2)
아우레오(áureo).
블라드의 머리색과 꼭 어울리는 그 성(姓)은 폐허 위에 자리 잡은 황금색의 나무를 보며 교황이 직접 생각한 것이라 했다.
“북부에 오래 남았으면 하는 아주 귀한 성이 될 거야. 교황이 직접 하사한 성은 제국 역사를 뒤져봐도 몇 없거든.”
“저 또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블라드는 굳이 찻잔 위에다 술을 들이붓는 티무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세월에 의해 하얗게 센 백발이었으나 목 주위로 꿈틀거리는 근육.
블라드보다도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큰 그의 덩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페테르 바예지드가 날카롭게 벼린 검 같은 분위기였다면 강철공 티무르는 뭐든지 깨부술 것만 같은 단단한 도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황실은 인정해주지 않겠지만 말이야.”
술병을 탈탈 털어낸 티무르는 블라드와 눈을 마주치며 빙긋이 웃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있어서는 귀하며 소중한 명예겠지만 결국은 지엽적일 뿐이라는 뜻이지.”
“······그렇습니까.”
블라드는 티무르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 아니기에 제국 명부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며 대립교황(Antipope)이 내린 성이니만큼 교황청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이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 북부에서만큼은 존귀하게 불릴 이름이겠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곳 북부에서만큼은 아우레오라는 이름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시게.”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블라드를 향해 티무르가 손끝으로 술이 담긴 찻잔을 밀어냈다.
제국에 넷뿐인 고귀한 공작이 직접 내미는 술잔.
그 술잔 끝에 앉아 있는 젊은 귀족은 아직 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 열릴 북부 회의에 오시게. 영주들과 나란히 앉을 자리는 아니더라도 자네를 위한 의자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둘 테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북부가 낳았고 바예지드가 키웠으며 정교회가 귀하다고 인정하는 남자. 블라드.
건네는 술잔을 통해 그를 후원하겠다 말한 티무르는 까만 말 뒤에 메여져 있는 블라드의 작은 깃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차게도 모았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작은 깃발 하나.
오래된 전통을 따라 온갖 가문들의 인장이 박혀 있는 그 깃발에는 아직 문장 하나 정도 새겨 넣을 자리는 남아있어 보였다.
※※※※
“흠흠.”
티무르의 천막에서 나온 블라드는 자신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막심! 여기 있었네요?”
“흐흐. 어쩌다 보니 말이야.”
반삭 머리에 새겨진 길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
지금 멋쩍게 웃고 있는 남자는 교황청의 병사들 앞에서 장미의 미소를 지켜주었던 기사 막심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감히 후배라고 부르지도 못하겠군. 블라드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블라드라고 불러요. 뭐 제대로 가진 것도 없는데.”
비록 성을 하사받은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영지는커녕 장원도 없는 신세였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하벤의 배를 사는 데 다 써버렸고, 딱히 투자한 곳이라고는 쇼아라에 있는 장미의 미소뿐.
그러나 텅텅 비어있는 두 손일지라도 뭐라도 잡을 자격을 갖췄다는 것 자체가 기사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명예이자 수확일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 나리이신데 함부로 이름을 불러댈 수야 있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그럼.”
느슨한 분위기를 파악한 막심이 실실 웃어대자 둘의 곁으로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귀족 나으리. 어쩐지 데스웜 때부터 잘 뛰어다닌다 생각하고는 했었지요. 제가.”
“나중에 잘 풀리시더라도 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이슈트반 놈한테서 이길 수 있는 필살의 대검 파훼술을 가르쳐 드렸지 않습니까.”
“그거 가르치느라 얻어맞은 것까지 기억해내면 오히려 손해 아닌가요?”
과장된 몸짓으로 손바닥을 비벼대는 선배 기사들을 보며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유스티아의 죽음으로 침울해져 있던 블라드가 실로 오랜만에 짓는 미소이기도 했다.
“태어나기를 애초에 쇼아라에서 태어났다니까! 순혈 바예지드 출신이야!”
“외부에서 유망주들 영입하는 다른 가문들이랑 다르다 이거야. 우리는 직접 키운다고!”
그러나 블라드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커지는 목소리.
대로에서 소리치는 기사들의 행동이 비록 눈꼴 사납기는 하였으나 그들도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평을 듣고 있던 바예지드 가문이었으니 일곱 가문의 기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지금만큼이나 바예지드의 건재함을 알릴 기회는 몇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같이 너절대지 말고 빨리 가서 그 녀석부터 잡아둬라. 옛말에도 쓸만한 고양이는 매우 귀한 법이라고 했다.]
‘알았다니까요.’
애써 선배들을 무시한 블라드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떠들썩한 기사들의 말처럼 바예지드의 자랑이 된 블라드는 이것저것 준비해야만 할 일이 많았다.
※※※※
폐허가 된 도시에서 대접할만한 마땅한 것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 블라드와 니벨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살짝 금이 간 나무잔에 담긴 물 한잔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의 대화를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벌써 가려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까요.”
블라드는 방 한구석에 놓인 니벨룬의 배낭을 보며 아쉽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진득하게 잡아보고 싶었지만, 방랑자답게 니벨룬의 행동은 조금의 막힘도 없어 보였다.
“어디로 가려고?”
“오라 하는 곳은 없지만, 발걸음 닿는 곳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갈 곳 없다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를 쫓아 평생을 헤매고 다니는 수인족 마법사들.
그들의 고단한 인생을 이미 키하노에게 들어 알고 있던 블라드는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비를 찾아다니는 거지?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뭐 그런 거.”
“그렇지요. 신비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의 향상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니벨룬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의 눈이 빛났다.
호르헤는 말했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라고.
“그럼 이런 건 어때? 돛 없는 배라던가.”
“네?”
그리고 지금 블라드는 니벨룬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돛이 없는데 막 움직여. 물을 끓이면 알아서 앞으로 나간다고 하더라고.”
고양이는 본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
거기다 마법사라는 단어까지 합치면 더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배에 달린 바퀴를 묘사하는 블라드의 손짓에 니벨룬은 흥미가 생겼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조만간 드워프들의 섬으로 초대받을 것 같거든. 드워프들 모여 사는 곳이 아직까지 안 알려진 거 알지? 가이다르가 그렇게 이 잡듯이 뒤졌어도 못 찾은 섬 말이야.”
“오오.”
니벨룬에게 계약을 제안하려 하는 블라드는 최대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았고, 숨기려 했던 비밀까지 쥔 채 나를 흔들어대었던 요제프를.
비록 요제프가 가진 무게감까지 담아내지는 못했으나 나고 자라왔던 뒷골목의 방식이 블라드의 입안에서부터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엘프들이랑도 좀 알거든. 그쪽 장로들이랑은 편지도 주고받는 사이야.”
“오오오.”
난생처음 듣는 배의 존재와 여태껏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드워프들의 섬.
그리고 모든 방문자를 거부한다는 신비를 간직한 엘프들의 숲까지.
인간들의 도시조차 들어가기 어려운 니벨룬에게 있어서는 꿈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장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소개해주면 같이 들어갈 수도 있을 거야. 신비를 찾아다닌다며? 이런 데야말로 신비가 가득하지 않겠어?”
“그럼요. 그렇지요.”
전인미답의 땅들을 들먹이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신비를 찾아다니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런 맛 좋은 미끼들이었다.
“뭐, 마법사가 귀하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통하면 소개 못 받을 것도 없거든. 그래도 한번 손발 맞춰본 사람이랑 하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말이야.”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등을 깊게 기대는 블라드의 모습에는 속마음과는 달리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뒷골목의 양아치가 부리는 협잡과 거짓된 여유는 키하노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페테르 옆에는 조언자 라그무스가.
루트거의 옆에는 마법사 도로테아가.
입지가 부족했던 요제프조차도 마법사 하나씩은 어떻게든 구해 옆에 두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제 블라드도 마법사 한 명 정도는 데리고 있어야 할 만한 시기였다.
“······진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엘프랑 드워프랑······.”
“그뿐인가? 야만족, 정교회, 북부 귀족들의 땅.”
어느새 몸을 크게 기울이고 있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확실한 일격을 날려보았다.
“다 된다니까. 네가 당분간 내 마법사만 해주면.”
“하겠습니다. 제발 하게 해주십시오.”
실실 웃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여대고 말았다.
아직 땅이 없기에 이리저리 방랑할 수 있는 귀족이자 기사.
그러나 빛나는 명예만큼은 확실한 블라드라는 존재는 확실히 니벨룬의 입장에서는 거부하기 힘든 존재였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여기 네 방 아니잖아.”
“제가 대신 말해드린 겁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또다시 주인 대신 들어오라 외치는 니벨룬이었지만 블라드는 딱히 나무라지는 않았다.
방금의 태도로 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블라드 아우레오 님.”
그렇게 니벨룬의 허락을 통해 들어선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은 기사였다.
“아아. 우리 그때······.”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하이날 가문의 기사 바스트로입니다. 블라드님과는 가이다르 군과 함께 싸운 적이 있지요.”
정중한 자세로 문가에 서 있는 그는 하이날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다.
“하이날도 여기에 와 있었나 보군요.”
“저희도 이제는 북부의 가문이니까요. 소집에 응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스트로라고 소개한 기사는 이제는 귀족이 되어 있는 블라드를 보며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교황님께 성을 하사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알리시아 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분께는 갚아야 할 게 아직도 많지요. 한 번 찾아봬야 하는데.”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하이날과의 관계가 돈독함을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바스트로는 조심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가능하시다면······. 이번에 열릴 북부 회의 때 저희 남작님을 앞에서 이끌어 주실 수(escort) 있으시겠습니까?”
“음?”
블라드는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는 바스트로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당당한 귀족이신 알리시아 님을 제가 왜······.”
“북부의 세계는 거친 기사들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블라드 님도 아시다시피······.”
난처하게 웃고 마는 바스트로.
스스로 속해 있는 가문과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기사는 민망한 듯 웃으며 크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블라드 님.”
“······.”
북부 회의에 들어설 일곱 개의 가문 중에는 하이날의 무게감이 제일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야 막 엘프들과의 교류를 시작하는 참이었지만 내세울 만한 사업도, 기사도 없는 곳이 바로 하이날이었으니까.
“알리시아님은 아마 지금쯤이면 쇼아라쯤에는 당도해 계실 겁니다.”
[알리시아 남작이 쇼아라라······. 이거 왠지 불안한데.]
키하노의 말처럼 괜스레 불안감을 느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품속 깊이 넣어놓은 두 장의 손수건.
여전히 맞붙어 있는 손수건들의 감촉을 확인한 블라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여기인가 보네요.”
아직 저녁도 아니었건만 쇼아라 뒷골목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뒷골목의 너저분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품있는 모습.
늙은 기사의 호위 속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런 후미진 곳에 있어도 무려 4층이나 쌓아 올렸네요.”
“쇼아라는 북부 물류의 중심지나 다름없는 도시이니까요. 뭐든지 큼직큼직하겠지요.”
한적한 데어마르와는 달리 모든 것이 활발한 쇼아라를 보며 알리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한 영지의 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조금씩 그녀를 자극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곳은 고귀한 레이디가 들어서기에는 알맞은 곳이 아닙니다.”
“그래요?”
노기사 던칸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알리시아를 당장이라도 돌리고 싶은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던칸의 말과는 다르게 알리시아의 앞에 있는 건물은 주위에 어떤 곳보다도 고풍스러웠고 훌륭한 곳이었다.
“그래도 한번 보고 싶네요. 블라드 경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는데.”
“······그렇습니까.”
어차피 스쳐 지나가야 하는 쇼아라라면 꼭 한번 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기사 블라드가 가장 아끼는 곳이라는 장미의 미소.
블라드의 옛 추억을 엿보려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그러나 지금 이곳의 주인은 블라드가 아닌 또 다른 레이디.
문 앞에 서 있는 고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미의 여관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저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리시아 남작님.”
현관에 서 있는 알리시아를 향해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오는 한 명의 여자.
이곳의 주인인 그녀는 알리시아와는 다르게 타오르는 것만 같은 붉은 머리를 지닌 여자였다.
장미 전쟁 (1)
언제나 높게 쌓여있는 서류뭉치가 방문자들을 반기는 곳이 있었다.
알싸하게 풍기는 위스키의 향과 함께 눈그늘 짙은 남자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던 장소였다.
“빌모시 님. 계속 이렇게 마법 전보를 날려도 되겠습니까?”
“······.”
그러나 요제프가 떠난 지금의 시장실에 가득한 것은 누군가의 불안한 눈빛뿐.
페테르에 의해 새로이 부임 된 시장은 계속해서 반짝이는 마법구의 불빛들을 보며 불태워질 금화들을 걱정하는 참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전보를 쓰는 것은 제 평생 처음······.”
“당신한테까지 떠넘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리 쇼아라의 시장이라 할지라도 차 한잔 마실 시간에 수백 골드를 태워버리면 초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지금도 누군가를 향해 마구 전보를 날리는 중이었다.
“지금의 전보는 가주님께서도 충분히 공감하실 사항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아아.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쇼아라의 시장.
그를 바라보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는 코웃음과 함께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임 시장과는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남자로군.’
금화는 분명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저 너머의 것들이 있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진짜이기에 가치 있는 것.
그러나 눈앞의 시장은 그런 것들을 알아볼 안목이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할수록 아쉽군. 얌전히 경쟁에서 내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제프에 대한 아쉬움을 떠올림과 동시에 새로운 시장에 대한 평가를 마친 남자는 무심한 눈빛으로 다음에 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짝이기 시작하는 마법구.
-돌아올 새를 위해 붉은 장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 것. 조만간 도착할 예정.
“흐음.”
마법사가 적어온 쪽지를 보며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대명사와 복잡한 암호문으로 적혀있는 쪽지였지만 빌모시라 불린 남자는 단번에 전보에 대한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전에 말해두었던 대로 장미의 미소에 대한 자료들이 필요한데.”
받아든 전보를 버릇처럼 촛불에 태우기 시작하는 흉터투성이의 남자.
그 촛불 아래에는 미처 태워지지 못한 낯선 이름 하나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마담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말이오.”
반짝이는 금화로도 살 수 없을 황금색 이름.
그 이름 앞에는 분명 블라드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
현재 쇼아라에서 가장 화제인 장소를 하나 꼽아보라 한다면 누구나 같은 곳을 꼽을 것이다.
뒷골목에 자리 잡은 장미의 미소.
질 좋은 음식들과 함께 새로이 선보인 맥주라는 술이 인상적인 이곳은 그 무엇보다 쇼아라의 블라드가 지키는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내부 또한 훌륭한 곳이군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알리시아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을 안내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레이디 제미나.’
몸집은 작았으나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 색만큼은 화려한 여자.
과연 누추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장미의 미소라는 건물만은 아니었다.
“블라드 경에게 관심을 두다 보니 자연스레 장미의 미소라는 곳에도 눈길이 가더군요.”
“······그러셨군요.”
블라드에게 관심 있다 말하는 알리시아였으나 제미나는 그저 한 호흡만을 참았을 뿐이었다.
두 명의 레이디는 먼 곳에 있었을 때부터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블라드 경의 어린 시절을 따라 걷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네요. 그때 이야기에 대해서도 많이 듣고 싶어요.”
많은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알리시아와는 달리 제미나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이 공유했던 추억들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가져가고 싶다는 알리시아의 말에 앞서 있던 제미나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입니다. 특별한 손님들을 모시기 위한 별실이에요.”
싸움을 걸었다면 받아줘야 한다.
그것이 뒷골목의 법칙이었으니까.
물러서면 죽고 마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블라드뿐만은 아니었다.
“오······.”
“······.”
화려하게 장식된 3층의 별실을 보며 노기사 던칸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마르셀라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촌구석 영지에서나 살던 두 사람이 침묵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곳이었다.
“······중앙의 유행을 따른 벽지들이네요. 구하기가 쉽지 않으셨겠어요.”
“과연 말씀처럼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옥사나 백작 부인께서 힘을 써주셨답니다.”
이곳은 장미의 미소. 레이디 제미나의 공간.
제미나는 마르셀라가 한 땀 한 땀 새겨준 무기들을 알리시아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다.
“옥사나 백작 부인?”
북부의 추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벽지라 말하고 싶었으나 옥사나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알리시아는 조용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고귀한 귀족인 알리시아라 할지라도 옥사나라는 존재 앞에서는 태양 앞에 촛불과도 같은 신세였으니까.
“······백작부인과도 알고 지내시는 사이이신가요?”
“직접적으로는 아닙니다만.”
방긋 웃는 제미나의 뒤로 여급들이 들어와 조심스레 식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미모를 지닌 그녀들은 한때는 쇼아라의 뒷골목을 화려하게 수놓은 장미들이었다.
“아무래도 요제프 님과 블라드 경을 통해 그분의 관심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참 과분한 관심이지요.”
아들이 다스리는 땅에 있는 아들의 기사가 보호하는 여관.
멀리 있던 아들을 그리워하던 어미가 힘을 실어 줄 만할 장소로는 장미의 미소만 한 곳이 없을 터.
전임 마담인 마르셀라는 그런 지원을 꿀꺽꿀꺽 받아먹으며 쇼아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새로워진 뒷골목의 모습은 고스란히 요제프의 성과로 이어졌었다.
“그렇군요.”
옥사나라는 이름과 함께 바로 앞에 놓이는 접시들을 보며 알리시아는 무어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내려놓는 식기들의 모양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화려한 접시들을 통해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귀부인들의 세계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일이었다.
“······소문이 자자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훌륭한 곳일지는 몰랐네요. 과연 찾아온 보람이 있군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남작님.”
알리시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레이디 제미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당돌하고 매서운 여자였다.
어찌 보면 블라드의 기질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기대되네요. 이 접시에 담길 요리까지도요.”
그러나 알리시아가 가지고 있는 차가운 푸른 피는 제미나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정도의 도발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을 겪어온 사람이었다.
“부디 이 가게에서 가장 자신 있는 메뉴로 준비해주시겠어요?”
고작 뒷골목 여인에게서 남자 하나 가져가지 못한다면 영지를 다스릴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블라드의 추억을 존중해 최대한 좋은 말로 구슬려 볼 생각이었던 알리시아였으나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덤벼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북부의 흥취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었으면 좋겠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작님.”
그러나 제미나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알리시아의 확신을 굳히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 와 보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기사로서의 블라드는 알았으나 남자로서의 블라드는 잘 알지 못했던 알리시아는 지금의 제미나를 보며 도리어 확신할 수 있었다.
귀족인 자신에게 대항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남자가 바로 블라드라는 것을.
황혼녁에 비치는 햇빛과 함께 부모님의 묘비를 닦아주었던 남자.
알리시아는 이제 그 남자까지 가져보기로 했다.
※※※※
“주문은······. 가장 자신 있는 메뉴.”
1층이 아닌 4층에 마련되어 있는 주방.
그곳에 서 있던 마르셀라는 앞에 놓인 쪽지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잘했네. 제미나.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마르셀라의 혼잣말에 뒤에 서 있던 몇몇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마르셀라는 이제 진짜로 은퇴해도 되겠네. 다음 마담도 만만치가 않아.”
“나는 걔가 이렇게까지 자랄 줄 몰랐다니까.”
“블라드도 그렇고 하벤도 그렇고 저 세대 애들은 뭔가 있나 봐.”
오래된 뒷골목의 여인들은 제미나가 가져온 첫 번째 승전보를 보며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평생을 구겨진 채 이리 뜯기고 저리 맞으며 살아왔던 그녀들.
그러나 그녀들은 지금 귀족 앞에서도 당당해지려는 제미나의 태도에 크게 이입하는 중이었다.
“······오늘 이 요리를 마지막으로 진짜 은퇴해야겠네.”
마른 천으로 조용히 식칼을 닦아낸 마르셀라는 제미나의 분전에 흡족해하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북부의 흥취를 느낄 수 있는 요리라면 역시 이거지.”
입맛을 돋울 가벼운 전채부터 본 요리와 디저트까지.
한 번에 음식을 내놓으면 식고 마는 북부의 특성상 이곳의 귀족들은 여러 번 요리가 나오는 식사 방식을 즐기고는 했었다.
다시 말해 뒷골목 가게의 여력 따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요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오늘은 재료값 따위 신경 안 써도 되겠지?”
그러나 오늘 마르셀라가 데려온 뒷골목의 요리사들은 모두가 20년의 경력은 너끈히 가지고 있는 여인들.
험하디험한 뒷골목에서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살아남은 여인들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오늘에야말로 은퇴할 뒷골목의 장미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
푸르르륵-
차가운 길바닥에 서 있는 검은 말과 나귀가 있었다.
푸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김을 내뱉은 누아르는 저 멀리에 보이는 쇼아라를 보며 왜 빨리 안 들어가냐는 듯 성질을 내고 있었지만, 정작 고삐를 잡고 있던 블라드는 가만히 멈춘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물이 3분의 1쯤은 차 있는 투명한 유리병.
차가운 땅 위에 기이하게 거꾸로 서 있는 유리병을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이야?”
“그럼요. 마법이지요”
니벨룬은 힘겹게 거꾸로 서 있던 유리병을 집어 들고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집어 던졌다.
차악-!
빙글빙글거리며 높이 떠올랐던 유리병이 낙하하자 보이는 광경.
그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와 뭐지 이거.”
높게 던졌기에 제대로 서 있어도 신기할 지경인데 아예 거꾸로 서 있다니.
그것도 수십 번을 던져도 똑같이 서 있는 모습에 이제는 블라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도시에 들어가면 아주 흉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블라드 님의 자문 마법사로 조언하건대 여기서 하루만 묵다 가시죠.”
“바로 앞에 도시가 있는데 야영을 하자고? 이 겨울에?”
안개와 함께 갇혀 있던 모시암은 블라드에게 두 달이라는 시간을 앗아가 버렸고 그로 인해 지금의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지금 니벨룬은 쇼아라가 보이는 바로 앞에서 야영을 하자 말하는 중이었다.
“물론 결정이야 블라드 님이 하시는 거긴 하지만요.”
“······.”
결정을 넘기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신비란 말 그대로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확률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한 상황에 블라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쇼아라로 들어가면 아주 불길해진다는 거지?”
“저의 점괘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쇼아라에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맞닥뜨리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언과 점괘라는 것입니다.”
상세한 것은 가봐야 안다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가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사기꾼은 아닌데.’
길거리 사기꾼이 이렇게 말했다면 한 대 후려치고 말았겠으나 신비를 쫓는 니벨룬의 실력은 오히려 블라드 본인이 보증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들어가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운세는 지침일 뿐 나가야 할 방향은 되지 않는다.
신비한 유리병을 집어 든 니벨룬이 되물어 보았으나 이미 블라드는 결심을 굳혔다.
“불길하다며. 그럼 더 빨리 가봐야지.”
흉악한 점괘가 가리키는 도시는 블라드의 고향이었고 그곳에는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불길함이 어느 쪽을 향해 뻗어 드는지 모르겠으나 블라드는 서둘러 달려가 그들 옆에 서기로 했다.
“그 나귀 빨리 달릴 수 있는 종인가?”
“본래 나귀는 달리려고 준비된 말이 아닙니다.”
“그럼 오늘만 어떻게 잘 해봐.”
누아르는 자신의 등 뒤로 올라탄 블라드를 느끼며 거칠게 투레질을 해대었다.
초원의 아들인 누아르는 붉은 머리 여인이 빗겨주는 솔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장미 전쟁 (2)
도시 쇼아라를 대표하는 여관인 장미의 미소.
평소라면 향긋한 음식 냄새와 함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공기만이 감돌 뿐이었다.
“맥주 말고 더 시킬 건 없어요?”
“없어.”
“형도 없어?”
“음.”
“하······. 오늘 온 손님들은 다들 왜 이러지?”
검은 피부의 소년, 네드는 달랑 맥주 한 잔씩만을 시킨 하벤과 오타르를 보며 짜증이 난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요즘 잘 나간다면서 왜들 이렇게 적게 쓰는지.
“그럼 팁이라도 좀 줘요. 뭐라도 안 시키면 성과급 안 준단 말이야.”
“팁? 옜다.”
하벤은 네드의 투덜거림에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오늘은 손님들한테 팁 달라고 들이대지 마라. 이게 바로 내가 주는 팁이야.”
“엿 같네. 증말.”
행동은 장난스러웠으나 목소리만큼은 진지한 하벤을 보며 네드는 그저 이맛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블라드만큼은 아니었어도 하벤이라는 존재는 이제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블라드 말처럼 저놈 소매치기 계속했으면 오래는 못 살았겠어.”
“으음······.”
오타르는 씩씩대며 떠나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나름대로 행동은 기민했으나 눈치만큼은 그에 따라오지 못했던 소년은 오늘 장미의 미소를 감돌고 있는 기이한 긴장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거 옛날 생각나는데.”
맥주잔을 들어 올린 하벤은 흘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외팔이 잭과 호르헤가 있었을 때나 이랬을까.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장미의 미소를 감싸고 있었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구만.”
이곳의 주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오늘 장미의 미소에 온 손님들은 자연스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간단히 맥주 한 잔씩만을 시킨 채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비록 네드는 알아보지 못했겠으나 그들 모두는 북부를 대표하는 상회의 상인들이었다.
“세상 바쁘신 분들이 죄다 모여계시네.”
“음.”
하벤의 말처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촌각을 세우고 있는 곳은 제미나와 알리시아가 있는 3층의 별실이었다.
쇼아라일 것인가, 데어마르일 것인가.
엘프와 드워프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교역이 펼쳐질 장소는.
바예지드일 것인가, 하이날일 것인가.
정교회가 인정하고 강철공이 후원하는 블라드라는 기사가 머무를 곳은.
“나는 제미나한테 걸었어.”
“음. 나도.”
단순한 치정 싸움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이권과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소리 없는 전쟁.
선장모를 고쳐 쓴 하벤은 저 반대편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선장들을 향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붉은 장미와 푸른 장미의 편으로 갈라져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하벤이 앉아 있는 곳은 붉은 장미의 편이 있는 곳이었다.
※※※※
“훌륭한 맛이네요.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을 제 저택으로 초빙하고 싶을 정도로요.”
뒷골목 출신 여자와 고귀한 귀족 여인과의 싸움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평소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겠으나 블라드라는 주제에만 국한한다면 정말 모를 일이었다.
‘바예지드는 이 여자를 이용할 속셈인가 보네.’
고귀한 귀족이었으나 한미한 남작 가문의 여식이기도 했던 알리시아는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먹은 음식의 수준은 단순히 돈과 요리 실력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특히 고기의 질이 훌륭하네요.”
“칸노르 가문이 제공하는 고기에요. 모두가 건강히 초원을 뛰놀았던 녀석들이랍니다.”
고기뿐만이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감히 살 수 없는 각종 진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비호를 받는 여관 장미의 미소.
지금 제미나는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화려한 음식들을 통해 보여주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원을 뛰놀았다 한들 결국 울타리 안에 갇혀 키워졌겠죠.”
그러나 알리시아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보면서도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바예지드라는 땅은 갇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넓은 땅이니까요.”
“······그런가요.”
이 여자는 알까.
자신이 바예지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굳이 존중해줄 가치는 없을 것이다.
“계약이 끝나 자유로워진 블라드 경이 이렇게 묶이는 신세가 될까 걱정스럽네요.”
포크에 찍힌 고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미소짓고 있는 알리시아.
그러나 그 미소 끝에 누군가를 향한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남작님께서도 블라드 경을 본인의 품에 두려 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맞아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작은 울타리보다는 차라리 넓은 땅에 있는 것이 안심될 것 같네요.”
알리시아의 말에 조용히 대꾸하며 고기 위에 소스를 뿌려주는 제미나.
보이는 행동은 나무랄 것 없이 정중했으나 에둘러 말하는 발언만큼은 아찔할 정도로 무례한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너무 좁은 울타리 안에서는 맘껏 뛰놀 수 없을 테니까요.”
“······.”
기묘한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회한 던칸조차도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을 정도.
그 누구도 버티기 힘든 여인들의 기 싸움은 방 안의 공기를 끝없이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비록 제가 가진 것이 작기는 해도 누군가를 가두려는 울타리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뿐이죠.”
대답과 함께 고기를 자르는 나이프의 소리가 스산하다.
“누군가와는 다르게 말이죠.”
제미나를 블라드를 가두려는 울타리에 비유하고 있는 알리시아.
그 어떤 모욕보다도 강렬히 다가오는 그 말에 제미나는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작님도.”
“저는 적어도 가두려 하지는 않을 거랍니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알리시아는 제미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냉정한 귀족의 푸른 피는 바로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었다.
“오히려 내주면 내주었지.”
알리시아는 그 말과 여기 좀 보라는 듯 잔뜩 내온 음식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것들 전부 다 누군가에게 빌린 것들이겠지요. 이 안에 온전한 당신만의 것이 있기는 한가요?”
“······.”
알리시아의 날카로운 일침에 침묵하고 마는 제미나.
과연 그녀의 말대로 제미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바예지드가 빌려주고 허락한 것들뿐이었다.
“하이날은 당신의 말처럼 작고도 한미한 가문이지만 저는 적어도 블라드 경에게 많은 것을 약속해줄 수 있어요.”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격차는 말로 꺼내기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것이지만 블라드 한 명에 대한 지원만이라면 알리시아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해줄 수도 있어요. 무려 제 선조님들이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죠.”
일개 기사에게 내어주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었으나 알리시아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홀로 가문의 이름을 지켜야만 하는 여군주.
후계와 상속 문제에 있어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하는 그녀에게 있어 배경 없는 유망한 기사인 블라드는 이제는 놓칠 수 없는 가장 훌륭한 대안이었다.
“바예지드가 블라드 경에게 무엇을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아마 저만큼은 내어줄 수는 없을 거예요.”
"······."
제미나는 자신의 곁을 내어주겠다고까지 말하는 알리시아를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연 모든 것을 나누겠다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바예지드가 쇼아라라도 내놓지 않는 이상 그만한 조건을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그러니 그만 놓아줘요.”
레이디 제미나는 블라드의 과거를 가졌지만 레이디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미래를 확신한다.
서로 같은 남자를 바라보지만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두 여자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가능성이 아깝지도 않나요? 블라드 경이 이곳에 있어 봤자 그저 평생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기사가 될 뿐이에요.”
기사를 넘어 저 높은 곳의 군주까지.
너는 그저 족쇄가 될 뿐이겠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가 되어 줄 수 있다고 알리시아는 말하고 있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이 고작 이런 여관 따위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
알리시아의 말을 들은 제미나의 눈빛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이날보다야 당연히 바예지드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나온다면 제미나로서도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묶고 있는 건가?’
언제나 블라드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미나.
그러나 이제는 앞서가 버린 블라드는 자신과 같이 진창 위에 서서 장식 없는 검을 바라보던 소년이 아니었다.
“······.”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본 제미나는 생각했다.
진창 옆에 있던 소년에게는 어울렸겠으나 지금의 블라드에게는 과연 어울릴 발자국인지를.
지금의 자신이 블라드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
쇼아라의 성문 앞.
블라드는 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남자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마커스 님.”
“······지금 이름은 빌모시이긴 한데.”
얼굴 가득히 흉터를 새긴 남자는 자신을 끝까지 마커스라 부르는 블라드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턱 끝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잘됐군. 잠깐 나랑 여기서 누구 좀 기다리다 가지.”
불길한 운세 뒤에 맞이한 기묘한 분위기의 남자.
블라드는 지금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빨리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마침 저기 오시는군.”
블라드는 마커스의 고갯짓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멀리 언덕에서부터 보이는 깃발들.
스투르마의 성벽을 새겨넣은 그 깃발들은 저 멀리서 서부 관문에서 돌아온 바예지드 군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그 소문이 자자한 블라드 아.우.레.오. 님이 아니신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트거 님.”
가장 앞서 다가온 깃발 밑에는 호쾌하게 웃고 있는 루트거와 그의 마법사인 도로테아가 있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안 그래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요제프와의 관계 덕분에 불편하다면 불편할 수도 있는 둘의 사이였지만 루트거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블라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대었다.
“벌써 그곳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소문은 멀리 나는 새니까 말이지.”
양손을 둥글게만 루트거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자신의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마법사라는 어디서나 통하는 귀도 있고.”
루트거의 말이 끝나자 서로의 신비를 알아본 니벨룬과 도로테아가 인사하기 시작했다.
정착할 곳 없어 평생을 방랑하는 수인족들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끈끈한 종족 간의 관계라는 것이 있었다.
“이제 막 복귀하신 모양이네요.”
“마링겐 가문에게 순번을 넘기고 왔지. 그 사람들이 조금 늦게 와서 고생했달까.”
서부의 건조한 흙먼지는 이제 지겹다며 너스레를 떠는 루트거.
그런 그를 보며 블라드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였으나 요제프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그였다.
-쇼아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두 기사들을 향해 쇼아라의 경비병들이 힘차게 외쳤다.
이런 환대를 처음 접해본 니벨룬의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정도의 함성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데 말이지. 이대로 시청에 가서 한 잔 나누는 건 어때?”
손으로 만든 술잔을 까닥이며 웃고 있는 루트거.
당장이라도 장미의 미소로 가고 싶었던 블라드였으나 루트거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차악-!
저기 저 앞에서 거꾸로 선 물병만 아니었다면.
“오······.”
“······!”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루트거에게 있어서는 그저 신기한 일이었겠으나 그 물병에 담긴 신비의 무게를 알아본 도로테아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는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응?”
루트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블라드의 말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해도 바예지드의 유일한 계승자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어디, 어디 가는데?”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마커스까지 동원했건만.
그러나 마법사의 경고를 알아본 블라드는 서둘러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고는 행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감히 가문의 계승자이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의 제안을 뿌리친 블라드.
루트거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서둘러 달려나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라도 같이 가드릴까요?”
“······.”
그리하여 블라드가 떠나간 자리에는 난생처음 보는 고양이 한 마리뿐.
루트거는 주섬주섬 배낭의 입구를 닫는 니벨룬을 보고는 당황한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블라드는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알리시아의 지적은 매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네가 블라드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냐는 물음에 제미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누구라도 흔들릴만한 뒷골목이었지만 블라드가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그러나 제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블라드에게 있어 남의 것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소년과 같이 진창 위에 서 있던 소녀는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남작님이 내어주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거예요.”
소년이 원했던 것은 5골드짜리 검이 아니라 그 검만이 가지고 있던 반짝임이었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블라드는 온전한 자신의 것만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남의 것이 아닌 오직 나만의 것.
블라드라는 사람이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갖기 위해 분투해 왔다는 사실을 제미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드르르륵-!
두 여인이 만든 침묵 너머로 다급히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헉헉. 혹시 무슨 일 없었죠?”
황급히 문을 열고는 뛰어오듯 들어온 남자.
“······분위기, 분위기가 왜 이러지?”
블라드의 앞에서만큼은 동등해져 버린 두 여자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흉험한 그녀들의 눈빛을 보며 블라드는 니벨룬이 말했던 흉악한 점괘가 절로 떠오르고 말았다.
아우레오의 가치 (1)
블라드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찌할 줄 모른 채 앉아 있던 노기사 던칸이었다.
“오, 오오······.”
그동안 감당하기 힘든 긴장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던칸은 문을 열고 들어온 블라드를 보고는 그제야 겨우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혹시 여기에 무슨 일 없었죠?”
새하얗게 질려 있던 던칸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노회한 기사까지 잔뜩 움츠리게 만든 것이 방금까지 이 방 안에 있었음을 눈치챘으니까.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워.’
검을 다루는 검사이기에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의 잔향.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확연한 적의 흔적이 아닌,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두 명의 여자뿐이었다.
둘 다 평소보다 훨씬 짙은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뛰어왔나 보네. 숨까지 헐떡이는 걸 보면.”
“이거 마시고 숨 좀 돌리세요. 블라드 경.”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동시에 내미는 두 잔의 물잔을 보았다.
둘이 어째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목이 말랐던 블라드는 무심코 두 잔 중 한 잔을 향해 손을 내뻗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가깝다 믿었기에 경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차갑게 번뜩이는 두 여자의 시선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울려 퍼지는 키하노의 경고.
블라드는 머릿속에서 뇌성처럼 울려 퍼지는 키하노의 목소리에 그만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거 중에 하나라도 잡는 순간 너는 진짜 큰일 날 거다.]
‘왜요?’
[주위를 둘러봐라.]
경험해보아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공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키하노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을 빨리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영웅에게 있어 여난(女難)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재난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고양이가 말한 불길한 점괘는 지금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
직접 그 순간에 와닿아야만 알 수 있는 예언과 계시.
버릇처럼 방 안을 둘러본 블라드는 그제야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제미나와 알리시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뒷골목을 헤치며 살아온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이성보다는 본능이 외치는 판단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하시던 말씀마저 나누시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겠다는 듯 아예 두 손을 들어버린 블라드.
앞에 놓인 두 잔의 물잔에서 서둘러 떨어지려 하는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기민했다.
“이거 안 마실 거야?”
“내려가서 마실게.”
“여기 제가 따라놨는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소매치기는 눈치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손을 뻗어도 되는 순간인지 혹은 아닌지를.
그리고 블라드는 지금까지 훌륭히 살아남은 소매치기 중 한 명이었다.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조용히 닫히는 문과 함께 정중히 고개 숙인 금발의 기사.
누가 봐도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깔끔한 퇴장에 두 명의 여인들이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블라드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
[그 고양이한테 잘해줘야겠다. 진짜 쓸만한 녀석이네.]
‘그러게요.’
지옥에서 빠져나왔다는 듯 계단을 내려가는 블라드의 움직임이 재빨랐다.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다시 한번 아까의 상황을 상기해 본 블라드는 자신이 느낀 긴장감의 종류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빠져나가는 모습이 꽤 익숙하던데?]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키하노의 물음에 블라드는 옛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제미나가 그동안 휘어잡은 여자애들 머리채만 수십일걸요.’
[어쩐지 그 아가씨가 딱히 밀린 느낌이 안 들긴 했지.]
비록 귀족의 앞이었지만 제미나가 나름대로 받아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를 향해 발버둥 치던 소년만큼이나 그 옆을 지키려던 소녀의 투쟁 또한 만만치는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왜 알리시아 님이랑······.’
그러나 어째서 고귀한 귀족인 알리시아와 제미나 사이에서 그런 긴장감이 만들어졌는지는 블라드로서도 여전히 의문이었다.
남녀 간의 신호에 무지하지 않았던 블라드였기에 오히려 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너도 이제는 본인의 가치를 깨달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
고귀한 귀족인 알리시아가 굳이 뒷골목의 여자인 제미나와 기 싸움을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물음은 지금 블라드가 내려다보는 광경이 답하고 있었다.
“······.”
블라드의 등장과 함께 동시에 일어서기 시작하는 상인들.
마치 파도치듯 일어서는 그들을 보며 블라드는 잠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부터 너의 가치는 단순히 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기사 블라드이자 귀족인 아우레오를 보며 상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선장모를 벗어든 하벤까지도.
블라드는 지금 보이는 이 모든 광경을 자신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언제나 무심히 지나쳐왔던 1층의 계단이 오늘처럼 높아 보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
블라드의 고갯짓을 따라 일어서는 하벤과 오타르.
그런 그들을 보며 주위의 상인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소식 빠른 몇몇 상인들은 이미 네드의 주머니에 팁이 아닌 뇌물을 찔러 넣어주는 참이었다.
“이 사람들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거야 고귀하신 귀족이신 블라드 아우레오······.”
“장난하지 말고. 지팡이 뺏어버리기 전에.”
블라드의 방에 올라온 남자들.
하벤은 하는 말은 사나웠지만, 무심히 의자를 끌어주는 블라드를 보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서 있는 위치는 달라졌을지라도 둘의 관계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엘프들이 데어마르에 자리 잡았다는 소문이 이미 북부에 쫙 퍼졌어. 거기에 더해 비츠카야 백작가와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도.”
하벤의 말 대로 요즘 북부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 중 하나는 바로 엘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거래를 트던 비츠카야 백작가와 인연을 끊고 스스로 밖을 향해 뛰쳐나온 엘프들.
그런 그들을 주시하는 상인들의 눈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황이었다.
“마약까지 팔아치웠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뭐 어쨌거나 지금 상인들은 데어마르에 있는 엘프들한테 엄청나게 관심이 많은 참이거든. 그런데 그 엘프들을 네가 데려왔다면서?”
“데려온 건 아닌데······.”
데려온 것은 아니지만 따라온 것은 맞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블라드가 엘프들에 대해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드워프들 있지? 그쪽도 심상치가 않더라고.”
“거기는 또 왜?”
블라드의 질문에 이번에는 하벤이 아닌 오타르가 대답했다.
“이거.”
“도끼가 왜?”
블라드의 옆으로 슥하고 디밀어지는 거무튀튀한 손도끼 하나.
무심코 도끼를 쥐어 든 블라드는 손바닥에 묵직하게 감겨오는 감촉을 느끼고는 잠깐 놀라고 말았다.
“좋지 이거? 기사들도 탐을 내더라.”
장식 하나 없이 오직 실용적인 용도로만 만들어진 수수해 보이는 도끼.
그러나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손안에 착 감겨드는 이 느낌은 오직 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명품의 감촉이었다.
“드워프들이 배를 그냥 끌고 온 게 아니었더라고. 시험 삼아 교역품이라고 몇몇 물품을 풀었는데 그것들의 품질이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야.”
블라드는 하벤이라는 사람이 과장이나 거짓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설명하고 있었으니 교역품이 풀렸을 때 받았을 충격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상인들은 서부가 꽁꽁 싸매던 무기들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품질이라고 그러더라고. 하긴 노예들이 억지로 만드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서부의 기병대가 뛰어났던 것은 가진바 실력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던 뛰어난 무기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이 가져온 무기들은 드워프 노예가 아닌 장인들이 만든 것이었고 둘의 차이는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드워프들도 틈만 나면 술에 취해서 너랑 요제프 님의 이름을 불러 재꼈었지. 솔직히 이 정도면.”
하벤은 오타르가 가져온 지팡이를 슬쩍 받아들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 같아도 여기로 찾아오지. 안 그렇겠어?”
“······.”
하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지금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
크게 퍼질 동심원의 물결 속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을 사람이 바로 블라드라는 남자였다.
“······네가 예전에 나한테 배 넘겨줬을 때 말했었잖아. 이번이 기회일 거라고.”
200골드짜리 배와 함께 칸노르 가문과의 거래를 터 준 블라드는 하벤에게 말했었다.
바로 지금이 너의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일 거라고.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지금 너한테도 그 순간이 온 거 같아.”
이제는 반질반질해진 선장모를 집어든 하벤은 블라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웃었다.
“이거 기회야. 그렇지?”
여태껏 남들이 만든 바람과 파도에 의지해 왔던 블라드.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만들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하벤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그래도 늦지 않게 찾아왔군.”
장미의 미소에서의 일을 대충이나마 끝낸 블라드는 낮에 말했던 것처럼 루트거가 있는 쇼아라의 시장실을 찾아왔다.
“가구들이 많이 변했네요.”
“여기 시장이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바로 그거라더군.”
가지런히 술병이 들어있던 장식장에는 의미 모를 그림들과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요제프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장실을 보며 블라드는 이곳이 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제 마법사는 어디 있죠? 같이 따라가지 않았었나요.”
“그 자식 뻗었어.”
루트거는 책상 옆에 놓인 빈 술병을 흔들고는 장난스럽게 웃어대었다.
“주량이 고작 럼주 반병이더군. 도로테아만도 못한 걸 보니 아무래도 북부 출신은 아닌 모양이야.”
“으음. 그렇군요.”
주량을 통해 북부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예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관습이자 신뢰성 높은 방법이기도 했다.
차가운 기후에 버티기 위해서라도 북부의 사람들은 술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져야만 했고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고 말았을 테니까.
“한잔할까.”
“감사합니다.”
오직 둘만이 있는 방 안, 오늘따라 크고 밝은 달이 창문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주위에 많은 것은 바뀌었어도 지금의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블라드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땅콩 때부터였나.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으음. 네 그랬지요.”
혀끝에 와닿는 술맛만큼이나 쓰게 다가오는 기억이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장남이 내어주는 호의를 단번에 거절해버린 꾀죄죄한 소년.
귀족을 향한 블라드의 실수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했었지. 너를 애써 데려왔다는 요제프가 걱정되기도 했었고.”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는 블라드와는 달리 말을 꺼낸 루트거는 그때의 기억이 즐겁다는 듯 크게 웃고 있었다.
요제프와 닮았으나 그와는 다르게 호쾌하게 지어지는 웃음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용몰이 때도 그랬고 너는 하여튼 재밌는 놈이었어.”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넘어가는 술잔만큼이나 둘의 목소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방금의 말대로 블라드는 루트거와 함께 많은 일을 겪어온 전우와도 같은 사이.
만약 요제프만 아니었다면 둘은 지금보다도 더 긴밀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도 너를 좋게 생각해주니 너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참 웃고 있던 블라드는 이해할 수 없는 루트거의 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지만 정작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온통 새까만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미뤄야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지.”
평소의 성정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돌려 말하기 시작하는 루트거.
블라드는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려 노력했지만 달빛이 만든 그림자는 철저히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만큼은 내가 내어주는 땅콩을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블라드 아우레오.”
그러나 두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블라드는 루트거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당한 계승자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
조만간 다가올 파멸을 이야기하는 루트거는 지금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서 슬프게 웃고 있을 것이다.
아우레오의 가치 (2)
밤새워 뒤척이던 블라드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며 이어졌기 때문이다.
[기사의 미덕은 뭐다?]
“······제발.”
그러나 늦게 잠들었다 할지라도 떠오르는 오늘의 태양은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었다.
[언제나 임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진정한 기사라 할 수 있지. 들이닥칠 사건과 사고는 너를 기다려주지 않아.]
모시암에서의 긴장된 사건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안식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늦잠을 자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문제는 그의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기사 중의 기사인 키하노라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긴장된 모습으로······.]
“잠 좀 자자고요. 제발.”
몰려오는 피곤과 고민에 허덕이던 블라드는 짜증 나는 목소리로 키하노에게 항의했지만, 문제는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키하노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시끄러?”
“응?”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자 블라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실핏줄과 함께 얽힌 피곤은 여전히 블라드의 눈 속에 머물러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맘 편히 눈을 감고 있어서는 안 되는 때였다.
“알았어. 나가줄게. 계속 자.”
“아니······, 잠깐만 제미나.”
튕기듯 몸을 일으킨 블라드는 방을 나서려는 제미나를 붙잡고는 억지로 몸을 돌려세웠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잠깐이라면.”
쾅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제미나는 다급해 보이는 블라드의 표정에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봐라. 사건과 사고는 너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니까.]
끌끌 거리는 키하노의 말을 애써 무시한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새침해 보이는 제미나를 침대 위에 앉히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알리시아 님이랑 너랑 둘만 있었어?”
“빨리도 물어보네.”
침대에 앉아 닿지 않는 발끝을 까닥이던 제미나는 앞에 있는 블라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별말 안 했어.”
“진짜?”
“응. 그냥 알리시아 님이 나보고 너한테서 떨어져 달라고 말한 것 정도야.”
[오우야.]
일어나자마자 듣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었으나 정작 말하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일 예전 장미의 미소에서 자주 봤었잖아. 그런데 그게 나한테까지 올 줄은 몰랐네.”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내가 뭐라고 해.”
블라드를 올려다보는 제미나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내가 너한테 뭐라도 된다고.”
“······.”
들고는 있었으나 정작 쥘 자격은 없다.
은연중에는 통하고 있었지만, 어제처럼 블라드에 대한 자격을 물어본다면 제미나는 무어라 대답할 만한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둘의 사이는 아직 공식적으로 무언가 전해진 것이 없었으니까.
“뭐 마땅히 드릴 말이 없었어.”
블라드는 너무나 무덤덤하게 말하는 제미나를 보며 그동안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미안하다. 내가.”
“뭐가 미안한데.”
“······내가 확실하게 말을 안 해줘서 미안하다고.”
제미나를 앞에 앉힌 블라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히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저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그저 말 한마디면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있었다.
“잘 들어.”
“······!”
제미나는 갑작스레 자신의 양어깨를 붙잡은 블라드를 보며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달라진 방의 분위기에 애써 시선만으로 올려다본 블라드의 두 눈은 지금 온전히 제미나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예전부터 말하려고 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똑똑똑.
“내가 너를······.”
똑- 똑똑똑.
애써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끈덕지게 달라붙는 노크 소리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글렀다 그치?”
“시도는 나쁘지 않았어.”
모든 시도에는 그에 맞는 때라는 것이 있는 법.
실실 웃으며 문을 향해 고갯짓하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오늘이 그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도대체 누구······.”
“안녕하세요. 블라드 경.”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는 제미나의 말에 괜스레 자존심이 상한 블라드는 짜증과 함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나 짜증스러운 기분과는 달리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향해 환히 웃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이었다.
“······알리시아 님.”
“아직 아침을 들지 않았으면 같이 할까 해서요.”
영주의 저택이 있다면 그곳에 머무르면 되겠지만 이곳은 시장이 있을 뿐인 쇼아라.
알리시아는 어수선할 시청보다는 장미의 미소라는 고급여관이 차라리 격에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이곳에 짐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어제 맛보니 이곳 요리사의 실력이 훌륭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침을 먹으면서 같이 할 이야기도 있고.”
막 해가 뜬 아침이었으나 알리시아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공이 많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곱게 땋은 머리와 함께 옅게 풍겨오는 분 냄새는 그녀가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철공의 도시인 바스토폴까지 우리가 가려면······.”
그러나 정돈된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고개는 계속해서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가려면, 가려면······. 어머나······.”
블라드가 서 있는 너머를 보기 위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알리시아.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본 블라드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제가 조금 늦게 찾아올 걸 그랬나 봐요. 눈치도 없이.”
“아니,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다소곳이 앉아 있던 제미나가 지금은 침대 위에 엉망인 모습으로 누워 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머리와 촉촉해져 있는 제미나의 눈빛이 누가 보아도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아침은 저 먼저 먹어야겠네요. 두 분께서는 부디 하던 일마저 하세요.”
고귀한 귀족답지 않게 복도를 쾅쾅 울리는 발소리가 지금 알리시아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블라드는 그런 그녀를 잡아 세우지도 못할 만큼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
과연 키하노의 말이 맞았다.
사건과 사고는 언제나 만반의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었다.
※※※※
영주가 가진 권력조차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 있었다.
신의 뜻이 머물기에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곳. 교회.
이 땅의 주인조차도 허락 없이는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으나 지금 그곳을 마음껏 누비는 사람이 있었다.
“주교님, 저 왔습니다.”
“왔는가? 어서 들어오게.”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작위는 세속의 권력이 보증해주며 이름 뒤에 붙어 있는 성은 신의 뜻이 증명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리 오시게. 마침 차를 준비하던 참이었으니.”
블라드는 손수 차를 내오는 안드레아를 보며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느껴지는 고요함과 평화.
아침에서의 난리에서 겨우 빠져나온 블라드는 신실한 주교가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보니 집무실 자체는 바르나에서부터 별로 변한 것이 없군요.”
“······내가 자네에게 바르나의 방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블라드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안드레아를 보며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것참 싱겁구먼.”
안드레아는 블라드의 허무한 대답에 허탈한 듯 웃음을 지었지만 사실 블라드는 이미 그의 방을 보고 온 참이었다.
주교실이라기에는 너무나 검소해 보이는 그의 방은 쟝의 꿈속에서 본 광경과도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
“모시암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마지막까지 쟝을 보호해주어 참으로 감사하네.”
“받은 은혜를 갚으려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사실 모시암에서의 변고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북부 민심의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강철공의 철저한 통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쉽게 대답할만한 고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사람들만큼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던 사건.
쇼아라의 주교인 안드레아는 블라드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뚫고 자신의 어린 부제를 구해냈는지를 잘 알고 있던 참이었다.
“돌고 도는 베풂 속에서 구원이 있을 거라는 말은 과연 틀린 것이 아니었어. 내 다시 한번 자네를 통해 그분의 깊은 뜻을 깨달았네.”
그 말과 함께 조용히 기도를 읊조리는 안드레아를 보며 블라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세간에는 신실한 기사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정작 성경은 한 번도 들춰본 적 없던 블라드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시암에서의 일은 잘 넘겼다지만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 영 꺼림칙합니다. 주교님.”
“으음. 그 심정 충분히 공감하네.”
어젯밤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고민 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과 자신을 프라우센이라 소개한 남자에 관한 것도 있었다.
유스티아라는 이름으로 깊게 새겨진 기억은 블라드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번의 사태가 저희가 처음 보았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과도 연관이 있습니까?”
“흐음······.”
요제프를 향한 저주였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
그리고 이번에 모시암에서 벌어졌던 사건까지.
직접 겪은 당사자였기에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블라드를 보며 안드레아는 무겁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모두가 길을 걷지만, 그 끝이 어딘지를 알지 못하기에 지치고는 하지.”
안드레아는 침중한 표정으로 깃털 펜을 꺼내와 조심스레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바르나의 사제였을 시절부터 검은 저주를 쫓아 왔던 안드레아.
그리고 교회와 그의 끊임없는 추적은 결국 결실을 맺어 하나의 이름 앞에 그들을 데려다 놓았다.
“신의 뜻은 멀고, 어두운 유혹은 가까이에 있네. 그렇기에 우리의 몸과 영혼은 끊임없이 그분의 성전(聖戰)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지.”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그리는 문양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교회의 문양과 닮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삐뚤어지고 거꾸로 되어 있는 모습.
“이건······.”
안드레아가 그리고 있는 것은 거꾸로 되어 있는 교회의 문양이었다.
신성에 대한 모독으로 가득한 그 문양은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목 없는 신부가 가득 그려놓았던 문양이기도 했다.
“배교자(背敎者)들의 문양일세. 길을 잃고만 어린 양들을 뜻하지.”
보기만 해도 불길한 그 문양을 보며 안드레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번 신을 향한 길을 걸어봤기에 그 어떠한 마(魔)보다 위협적인 자들. 자네가 맞닥뜨린 여인은 그런 사람일세.”
보기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서둘러 손으로 종이를 가린 안드레아.
그렇게 스윽 지나간 그의 손끝에는 어느새 옳게 그려진 교회의 문양이 정립되어 있었다.
“아주 예전, 모든 고아의 어머니라 불린 수녀가 있었네. 그녀는 교황청이 인정한 신의 목소리이자 그 시대의 성녀라 불렸던 사람이었지.”
딱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안드레아가 하려는 말은 교단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한 절대 들을 수 없는 아주 깊숙한 비밀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성가대는 교황청 최초의 성가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따 트라마슈라는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지.”
그러나 성녀라 불렸던 여인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신의 이름 아래서 벌어졌던 그 날의 일은 결국 신실한 수녀에게서 검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이름은 교황청이 가리려 하는 깊숙한 치부 중의 하나일세.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레 블라드의 귓가로 다가간 안드레아.
떠도는 바람조차도 머금지 못할 작은 목소리가 블라드의 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라먀슈트.
“······!”
신실한 주교가 전했음에도 닿았을 때는 악취가 가득한 누군가의 이름.
그 이름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신의 앞에서는 트라마슈였으나 그에게 등 돌렸을 때는 온통 거꾸로 된 이름. 라마슈트.
온통 새까맣게 불에 타 버린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 여인이 있었다.
타고 남은 성냥보다도 바짝 타들어 가고 만 아이들의 시체를 보며 그날 여인은 하늘을 향해 재 섞인 검은 눈물을 흘렸다 했다.
※※※※
오늘은 물안개가 끼는 날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스투르마의 성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개였다.
“쿨럭, 쿨럭. 흠······.”
그리고 이렇게 짙게 안개가 끼는 날은 요제프의 기침이 더 심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폐가 약한 그에게 있어 습기로 무거워진 공기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숨 쉬어야지. 천천히.”
“괜찮아요. 어머니.”
괜찮다고 말하는 요제프였지만 옥사나의 손끝은 끝까지 따라와 그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
차가운 겨울날, 손끝으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온기를 느낀 요제프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패배자이자 실패자인 못난 자신이었지만 어머니가 보내주는 걱정만큼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요제프, 생각해봤니? 저번에 내가 말했던 것 말이야.”
앞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따뜻한 차, 그리고 뒤에는 조심스레 등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길.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요제프의 마음을 몽글하게 풀어주고 있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날카롭게 와닿는 슬픔이라는 것이 있었다.
“네가 영민하다는 건 이미 외할아버지께서도 잘 알고 계시단다. 그러니까······.”
입은 열었으나 차마 말을 끝내기는 어려웠는지 옥사나의 말끝이 흐려지고 있었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옥사나는 자신의 친정인 오스카르 가문으로 요제프를 보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대단한 직위는 아니더라도 너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있을 거야. 거기다 여기보다는 날씨도 따뜻할 거고.”
“어머니.”
요제프는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오랜만에 만져 본 어머니의 손은 기억에 있던 예전보다 훨씬 까칠해져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가까이서 마주 본 옥사나의 얼굴은 옅은 주름들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주름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기침 때문에 새겨졌다는 사실을 요제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꼭 증명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낳은 아들이 이렇게나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아요.”
그렇기에 요제프는 옥사나에게 오직 이 한마디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지는 않겠노라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어요. 치열하게요.”
“······그래. 알았다.”
지금 마주 보는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에게 죄인이었다.
따뜻한 배려로 시작한 말일지라도 서로에게 와닿을 때는 아픈 상처로 번질 것이라는 걸 옥사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게. 힘들 때는 꼭 불러다오.”
“네. 어머니.”
아들의 견고한 결심을 다시 한번 확인한 옥사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요제프의 방을 떠났다.
꾹꾹 참고 있던 슬픔이 흐르기 전에 서둘러 돌아서는 어머니를 보며 요제프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쓸모없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증명할게요.”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어머니의 인생까지.
고개를 떨구고 있던 요제프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온통 새까만 색의 편지 봉투 하나가 있었다.
“······.”
천천히 봉투를 열어보는 요제프.
그의 뒤에 비치는 창밖에는 짙은 물안개가 가득했다.
새까만 편지를 열어보는 오늘은 안개가 가득한 날이었다.
강철공의 도시 (1)
침묵만이 가득한 쇼아라의 시장실.
가만히 시장석에 앉아있던 루트거는 방금의 보고를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 짓고 말았다.
“드워프들을 그냥 보냈다고? 그것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죄송합니다. 루트거 님.”
누가 보아도 호탕한 인상의 루트거였으나 검은 눈동자 안에 깃들어 있는 매서운 기운만큼은 타고난 것이었다.
쇼아라의 시장은 감히 그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 붙잡아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했지만?”
애써 불러온 드워프들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돌려보내고 말았다니.
무능을 넘어 무책임에 가까운 보고이기는 했으나 시장에게도 나름 할 말은 있었다.
“그들이 블라드 경 아니면 요제프 님과의 대화만을 요구하던 터라 도저히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의 기질을 타고나서인지 하나같이 외골수적인 면이 있던 드워프들.
그들은 제발 기다려 달라는 시장의 부탁에도 그 둘이 아니라면 어떠한 대화도 나눌 수 없다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게다가 강의 얼음이 끼기 시작하는 시점이라 더 어떻게 기다려달라 말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루트거 님.”
“······알았다. 나가봐라.”
분명 무능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봤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딱히 질책할 마음도 들지 않았던 루트거는 시장을 내보내고는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있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작님께서는 드워프들을 어떻게든 포섭하고 싶어 하십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마커스는 루트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든 채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었다.
“혹시 블라드 경은 설득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곤란하군요.”
지금 루트거 앞에 앉아 있는 검은 까마귀는 전서구.
그렇기에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전부 가주인 페테르가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블라드 경을 포섭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념하도록 하지.”
마커스의 말을 들은 루트거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에 쇼아라의 풍경을 보기 시작했다.
자신과는 딱히 접점이 없는 도시.
그러나 이 도시에 태어난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알리시아 남작의 일은 어찌 되었지?”
“우리의 작은 아가씨가 용케도 지켜내었던 모양입니다.”
“잘 되었군.”
잘 되었다는 루트거의 말에 마커스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던 루트거는 마커스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제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블라드를 묶기 위해 바예지드의 호의를 내주었던 제미나라는 여자.
“블라드 경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저희가 내어준 호의가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나 그녀는 블라드를 묶는 족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의도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받지도 않았을 거라 말하면서.
“요제프가 손을 댄 곳이라 그런가. 이곳에서는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구만.”
주인 없는 기사 하나 얻어가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정당한 시장도, 차기 가주의 말도 듣지 않는 도시.
루트거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푸르르륵-
단 한 마리의 말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여관의 마구간.
그곳에서 누아르는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제미나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왜 다들 얘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네. 이렇게나 말을 잘 듣는데.”
“······그래?”
블라드와 고트는 제미나의 서툰 솔질에도 불만 하나 보이지 않는 누아르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손길을 음미하듯 꼭 감고 있는 누아르의 두 눈은 여간해서는 쉽게 떠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놈이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궁합이 맞나 보지.”
마구간지기이기도 했던 고트는 차마 설명하기 힘든 광경을 보며 뒷머리를 긁적여댔다.
그나마 누아르를 다룰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고트였지만 제미나 앞에서만큼은 그 자부심도 언제나 작아지고는 했었다.
“어머니는 잘 계시고?”
“엄마뿐만 아니라 동생 내외도 잘 있지. 원래 있던 곳보다는 좀 춥긴 하지만 말이야.”
전쟁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며 피난을 왔던 고트는 지금에 와서는 쇼아라에 확실히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비록 마구간 지기로 고용해주었던 전임 시장은 떠나갔으나 블라드의 이름값 때문인지 고트는 여전히 시청의 마구간 지기로 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드워프들이 대장간의 고로를 빼내 갔다고?”
“응. 아주 귀한 보물 모시듯 가져갔다고 하더라고.”
그러나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다 해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고트의 성정은 크게 변하지를 않았다.
그것은 일터인 시청뿐만 아니라 장미의 미소가 있는 뒷골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마담한테 그 고로를 달라고 떼를 쓰던지. 대장이 와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해도 제발 달라고 빌어대더라고. 그러니 마담이 어쩌겠어? 귀한 손님이라 하니 내줄 수밖에.”
“흠. 그래?”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들을 수 있는 귀로 온갖 소문을 모으고 있던 고트는 그동안 쇼아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요제프 님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나 봐. 지금 백작 부인께서 이리저리 의사들을 수소문하고 있다던데.”
“······.”
고트의 입에서 요제프의 근황이 흘러나오자 블라드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많이 안 좋대?”
“그거야 모르지. 워낙 골골대던 양반이니.”
비록 가주 경쟁에서의 실패로 계약이 끝났다 할지라도 둘이 쌓은 신뢰만큼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도의적으로 만큼은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블라드였기에 요제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고트. 여기 물통 좀 갈아 줘.”
“음? 깨끗해 보이는데?”
“내 눈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거든?”
아쉽다는 듯 잇몸을 드러내는 누아르의 옆으로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고트를 바라보는 제미나가 있었다.
“어쩔래. 내가 갈까?”
“아니야. 마담은 그런 일을 하시면 안 되지.”
제미나라는 존재는 블라드에게는 편한 소꿉친구였을지는 몰라도 고트에게 있어서는 대하기 힘든 뒷골목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제미나에게 있어 물통을 들게 하는 것은 고트에게 있어 여러모로 불안한 일이었다.
“사실 언제쯤이나 나를 불러줄까 기다리고 있었어.”
고트는 제미나의 지시에 전혀 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저 사람 좋게 웃으며 서둘러 움직였을 뿐.
이제는 귀족의 자리까지 올라버린 블라드의 옆에 바짝 붙어 있기 위해서는 제미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트는 왜 내보냈어?”
“너한테만 전할 말이 있으니까.”
고트가 물을 뜨러 가자 이제는 말 한 마리와 사람 두 명만이 남은 마구간 앞.
블라드는 제미나가 일부러 고트를 떼어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무슨 전할 말?”
“드워프들이 전하는 말이야. 네가 워낙 바빠서 전해줄 시간이 있어야지.”
제미나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품속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들고는 블라드에게 건네주었다.
누가 볼까 싶어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이건······.”
“너한테 전해달래.”
비록 쇼아라의 시장에게는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난 드워프들이었으나 제미나에게 만큼은 자신들과 연락할 수 있는 기별 하나를 남기고 갔다.
“나사우에서 보재. 처음 만났던 술집에서 연락할 수 있을 거래.”
“······처음 만났던 술집이라.”
그리고 제미나는 드워프들이 바랬던 대로 블라드에게 그들의 전언을 건네주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동전인데.’
그러나 블라드는 나사우에서 보자는 드워프들의 전언보다는 그들이 건네주었다는 동전에 더 눈길이 가고 있었다.
“응? 그런 게 또 있었어?”
“······네가 봐도 똑같아 보이지?”
드워프들이 전했다는 동전을 확인한 블라드는 그동안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던 두 닢의 동전들을 꺼내 보았다.
하나는 라문드에게 또 하나는 오귀스트에게.
그것들과 드워프들의 동전을 비교해보던 블라드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녹슬어서 볼품없어 보이는 동전들.
받은 곳은 각기 달랐지만, 손바닥 위에 놓인 모습만큼은 세 닢의 동전들이 모두 똑같아 보였다.
※※※※
북부의 모두가 뼈끝까지 스며들어오는 추위에 움츠리고 있었지만, 이곳 데어마르의 영지민들만은 달랐다.
아직도 데어마르 곳곳에는 푸른 잔디가 곳곳에서 보일 정도로 온기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몇몇 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해진 데어마르를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리며 언덕 위에 있는 레몬 나무를 향해 감사를 표하고는 했다.
노인들이 어렸을 적에나 행하고는 했었다는 이 감사는 서슬 퍼런 교황청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을 때는 감히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군.”
레인저들의 대장인 바라디스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하이날의 나무를 올려다보며 맨 위에 있는 가지의 높이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고작 반년도 안됐는데.”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도 두 배는 커진 것 같은 하이날의 나무.
식물에 조예가 깊은 엘프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성장 속도였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단순히 나무의 크기만은 아니었다.
“바라디스 님. 아무래도 정령을 알아보는 아이가 한 명 더 생긴 것 같습니다.”
“4명째인가”
“······네. 어린 정령들을 알아보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로써 4명째였다.
정령들을 알아보는 어린아이의 숫자가.
바라디스는 대원의 보고를 듣고는 조용히 자신의 왼쪽 눈에 오망성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확연히 보이기 시작하는 정령들의 세계가 있었다.
“이게 다 이 정령 때문인가.”
엘프들만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에서는 지금 가지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하얀 뱀이 있었다.
아우슈린의 세계수가 아닌 어머니 세계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오래된 정령.
마치 낮잠이라도 자는 것만 같은 조용한 모습이었으나 지금도 하얀 뱀의 위에는 이리저리 뛰놀아 다니는 어린 정령들의 모습이 보이었다.
“바라디스 님. 지금 아우슈린에서 전서구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서구?”
바라디스는 대원이 어디라고 가리키기도 전에 하늘을 향해 목을 쭉 내뻗는 하얀 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막 잠에서 깬 듯 게슴츠레한 눈이었으나 하얀 뱀이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아우슈린에서만 서식한다는 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참이었다.
“옳지. 착하다.”
꾸르르륵-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날아온 매는 먼 곳에서부터 날아와 지쳤다는 듯 바라디스의 팔목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조심스레 저 먼 고향에서부터 날아온 녀석을 쓰다듬던 바라디스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전서구를 유심히 바라보는 하얀 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같이 좀 보자고 하는 것만 같아 바라디스는 일부러 받아든 전서를 넓게 펼쳐 들었다.
“······계시로군.”
아우슈린에서부터 날아온 전서에는 장로들만이 쓸 수 있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낙인 뒤에는 누가 그렸는지 확실히 알 것만 같은 삐뚤빼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푸른 바다 위······ 은색 용이라.”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만 같은 그림이었으나 그러기에 더욱 확연하게 전해져 오는 느낌이라는 것이 있었다.
마치 바다를 쏟은 것만 같은 새파란 물감 위로 떠돌고 있는 작은 배 한 척.
그리고 그 배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은색 용 한 마리가 보내온 계시에 그려져 있었다.
“······전부 채비를 갖춰라. 당장 움직여야겠다.”
그러나 바라디스는 온통 새파란 그림 가운데서도 이질적인 작은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그 배의 망루에는 마치 점처럼 찍혀져 있는 금색 빛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어디로 움직입니까?”
“우리가 갈 곳은······.”
계시란 받아들이는 자에게 있어서는 직감처럼 다가오는 법.
그저 자그마한 점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바라디스는 그 점을 보고서는 블라드라 확신할 수 있었다.
“북쪽이다.”
블라드가 어디에 있을지 확실히 알지 못했던 바라디스였으나 이윽고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마치 저기라고 알려주는 듯한 하얀 뱀의 고갯짓.
“아마 쇼아라겠군.”
과연 바라디스의 말처럼 하얀 뱀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쇼아라가 있는 방향이었다.
강철공의 도시 (2)
겨울은 어딘가로 이동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다.
날씨는 춥고 길은 딱딱하며 때로는 내리는 눈에 의해 길이 막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사시사철 바쁜 영주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계절이라고는 겨울밖에 없었으니 지금 시기에 북부 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겁나 춥네. 이거.”
블라드는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달라붙는 추위를 느끼며 그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북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강철공의 도시로 향하는 일행.
바예지드의 루트거와 하이날 남작이 함께 움직이는 행렬은 분명 단단하고 강건해 보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다가오는 추위까지는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퍽- 퍽-
그렇게 모두가 내쉬는 숨의 온기조차 아끼며 걷고 있을 때 홀로 주먹으로 무언가를 후려치는 사람이 있었다.
얼음과도 같은 침묵을 깨며 일행의 이목을 주목시킨 사람.
그는 블라드의 자문 마법사인 수인족 니벨룬이었다.
“······뭘 자꾸 그렇게 후려치고 있는 거야.”
“따뜻함 주머니입니다.”
블라드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니벨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니벨룬이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낼 때마다 기이한 신비를 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함 주머니?”
“네. 저 멀리 남쪽에서 가져온 따뜻함입니다. 이 녀석은 워낙 천성이 게을러서 때리질 않으면 일어나질 않거든요.”
“······아. 그래?”
블라드는 니벨룬이 하는 말 중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
이해할 수 없기에 마법사일 테니까.
“아. 이제 일어났네요.”
니벨룬의 말과 함께 얻어맞고 있던 작은 주머니가 희미한 붉은 빛을 뿌리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따스한 이불 속에서 억지로 일어나는 모습처럼 보였다면 착각일까.
“이제 따뜻해지는 거야?”
“반나절 정도는요. 한 번 깨우면 그 정도는 움직여줍니다.”
주머니 안에 정령이라도 들어있나 싶어 왼쪽 눈을 감아본 블라드였으나 보이는 것은 정령이 아닌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아지랑이만이 가득할 뿐.
아직 블라드의 세계가 신비라는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거 하나 더 있어?”
“아뇨. 이거 하나뿐입니다.”
“그래?”
이거 하나라는 니벨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블라드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매섭게 내뻗어지는 블라드의 손.
“어어?”
“그럼 이거 잠깐만 빌리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소매치기의 기술이었다.
니벨룬은 어느새 블라드에게로 넘어가 버린 따뜻함 주머니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혹시 이거 마법입니까?”
“아니. 그냥 당한 거야.”
당해봐야 안다는 점에서는 조금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니벨룬을 뒤로 한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마차를 향해 누아르를 몰아갔다.
“알리시아 님. 저 블라드입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좀 진작에 꺼내 보지.
니벨룬의 주머니를 움켜쥔 블라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알리시아의 마차를 찾아갔다.
“괜찮으십니까? 버틸 만 하신가요?”
블라드는 살짝 열린 마차의 창 너머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걱정했던 대로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북부의 추위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의 영지인 데어마르는 이곳과는 다르게 레몬이 열릴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마음속에 부는 한기보다는 견딜만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러나 추위에 떨고 있었음에도 알리시아의 눈빛에는 여전히 묘한 열기가 가득해 보였다.
끈적한 패배감을 통해 천천히 타오르고 있는 그 열기의 끝에는 분명 블라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받으십시오. 제 마법사가 발휘한 비전입니다.”
이 행렬의 책임자는 루트거지만 레이디 알리시아의 인솔자는 바로 블라드였다.
알리시아는 차가운 공기를 뚫고 넘어오는 블라드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따뜻함 주머니라고 하더군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받아들기 싫었지만 블라드의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따스함은 외면하기 힘든 것이었다.
애써 화난 척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표정조차도 무너뜨리게 만드는 따스함이었다.
“······이렇게 저를 신경 쓰시면 고향에 있을 제미나 양이 걱정하지 않을까요.”
"왜 지금 제미나의 이름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혹시나 거부할까 걱정하고 있던 블라드는 알리시아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안심했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지금의 저는 오직 남작님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군요.”
지금의 자신은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그 말을 들은 알리시아는 차갑게 대꾸하려 노력하였으나 입술 끝에서부터 풀리는 냉랭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필요할 때 서슴없이 다가오는 블라드의 움직임은 남자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거부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 말과 함께 조용히 닫히는 마차의 창.
그저 할 말만을 한 채 다시금 떠나가는 블라드의 기척을 느끼며 알리시아는 가만히 블라드가 건넨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과연 따스함 주머니라고 하더니 말 그대로 전해지는 온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끄응.”
바로 앞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던칸은 그만 앓는 소리 같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너무 면역이 없어. 남자에 대한 면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의 어린 주군을 바라보는 늙은 기사.
아마 알리시아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누구라도 하나 잡아먹을 것만 같은 독한 눈빛이었으나 고작 주머니 하나 받았다고 헤실거리는 알리시아를 보며 던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너무 일찍들 돌아가셨어.’
던칸은 진심으로 지금 자신이 앉은 자리에 전대 가주가 있기를 바랐다.
그분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아비 된 자격으로 저 빤빤한 놈의 면상을 후려갈겼을테니까 말이다.
※※※※
하나의 공작 가문과 하나의 백작 가문.
그리고 다섯의 남작 가문을 합쳐 총 7개의 가문.
이 가문들이 현재 북부를 지탱하고 있는 북부연합의 기둥들이었다.
“마링겐, 로므니에, 포드밀스, 하르키타······.”
누아르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형상들을 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만 문장들.
그것은 바로 염료와 물감으로 표현하는 도로테아의 신비였다.
“보통 다른 기사들은 작위를 받자마자 다른 가문들 문장부터 외우지 않니?”
“저도 배우기는 했었거든요.”
그러나 그녀의 신비는 지금 일개 교보재가 되어 블라드의 눈앞에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왜 몰라.”
“배우기는 했다구요. 안다는 게 아니라.”
배우기는 했는데 몰라.
너무나 당당한 블라드의 변명에 도로테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기사들은 다 알 거 아니야. 막상 거기 가서 너만 다른 가문들 깃발 몰라보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그러니까 이제 배우잖아요. 지금 배워서 쓰면 되지.”
“익······!”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말도 제대로 못 타고 다니던 어린 종자였건만.
그러나 이제는 대놓고 말대꾸까지 하는 블라드를 보며 도로테아는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래. 블라드 말처럼 지금이라도 배워서 쓰면 되지. 다른 놈들처럼 기사입네 하며 겉멋만 들어 다니는 것보다는 낫잖아.”
“······직접 안 가르치신다고 편히 말씀하시네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트거가 실실거리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기서 큰 실수만 안 하면 되지. 북부 회의라는 게 애초에 영주들의 모임이니까.”
장난삼아 말하고는 있었으나 루트거는 정확히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무려 강철공의 초대를 통해 북부 회의에 참가하는 블라드였으나 막상 간다고 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서 인사나 잘하고 오면 되는 거지. 그것만 잘하면 돼.”
북부 회의에서 블라드가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마 인맥 교류 정도 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기는 했으나 애초에 북부 회의가 딱히 사교의 장도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인사나 잘하고 오면 될 일이었다.
“드디어 보이는군. 강철공의 도시.”
“어디요?”
블라드는 루트거의 말에 서둘러 도로테아의 신비를 걷어치웠다.
자신의 신비를 함부로 하는 모습에도로테아가 뭐라 뭐라 떠들기는 했지만 블라드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집중할 뿐이었다.
“우와······.”
눈 내린 하얀 평원 위로 높다란 절벽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차라리 산이라 불러도 될 만큼 웅장하게 솟아오른 절벽은 주위에 평평한 평야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중이었다.
“저기 절벽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성채가 보이지?”
“네.”
한참 절벽의 웅장함에 놀라고 있던 블라드는 루트거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절벽을 이루는 암석들의 특징 때문일까.
가파른 절벽 사이로 보이는 인간들의 성벽은 칙칙한 회백색이었음에도 태양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강철공의 도시인 바스토폴이야. 북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지.”
“······바스토폴.”
그 누구라도 쉽게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성벽
중력을 거부하듯 높게 솟아오른 절벽 위로 거대한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건국 전설에 따르면 저 도시가 바로 용에게 마지막까지 대항했다던 도시거든.”
북부 유일의 공작 가문인 바라노프는 제국 건국 이전에도 존재해왔던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웠다는 도시 바스토폴은 가장 완벽한 용에 대항해 가장 마지막까지 깃발을 세우고 있었던 인류 최후의 방벽이기도 했다.
“······멋지네요.”
저 멀리서 반짝이는 회백색의 절벽을 보며 블라드는 미소 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홀로 솟아오른 절벽의 모양새가 괜스레 블라드의 세계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두근-!
처음 보았기에 설렜지만 왜인지 모르게 나를 부르는 것만 같은 도시.
난생처음 보는 절벽 위의 도시는 분명 블라드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
드드득-
드드드득-
“······으음.”
도시 바스토폴의 있는 강철공의 저택.
그곳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지하실에서 한 노인이 침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때보다 훨씬 심하게 반응하는군.”
강철공의 마법사인 페르낭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두 개의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성을 담은 쇠사슬에 의해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두 개의 함.
하나는 본래 바라노프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금은 멸문해버린 라브노마가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용이 눈을 떴는가?”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을 담아놓은 봉인함(封印函).
그 함을 바라보는 늙은 마법사의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장 빠른 용인 린드부름의 출현 때도 반응했던 함이었으나 지금만큼 강렬하게 진동하지는 않았었다.
아마 이렇게까지 반응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용의 가능성이 짙거나.
으드드드득-
아니면 그만큼 가까워야 할 것이다.
“이건 보고를 드려야겠군.”
봉인함의 진동이 심상치가 않자 페르낭은 조용히 자신의 신비를 펼치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만드는 수인(手印)이 허공에서 하나의 진을 형성하자 그곳에서부터 마치 은하수로 녹인 것만 같은 물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택 아주 깊은 지하에 자리 잡는 거대한 문.
그곳으로 향하는 어두운 복도가 늙은 마법사의 주문을 따라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잡아 늘이기라도 한 듯 점점 좁아지면서도 길게 늘어지는 복도는 자연스레 저 위의 세계와 거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강철공의 도시 (3)
바라노프 공작령의 주도(主都) 바스토폴.
차갑게 솟아오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길은 잘 닦아놨네요. 마차까지 다니게 할 정도니.”
블라드의 말처럼 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경사는 좀 있었으나 분명 잘 닦여진 도로였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건 쉽게 보기 힘든 잘 정비된 도로.
블라드는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지는 반질반질한 바닥의 느낌이 나름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절벽 속에 있어서 길이 험할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공작령이니까. 단순히 규모만 보자면 스투르마보다 훨씬 큰 도시야.”
도시 바스토폴은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에 자리 잡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안전한 도시이기도 했다.
가장 완벽한 용의 시대에부터 지금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북부의 도시는 오래 살아남은 만큼 번영할만한 자격을 갖춘 도시였다.
“그런데 이렇게 도로까지 만들어 놓으면 공격하는 쪽에서도 편할 거 같은데요. 애써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이유가 없어진달까.”
“그래?”
이제는 제법 지휘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블라드였으나 루트거는 그저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지.”
열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경험이 나을 때가 있다.
직접 경험했기에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루트거는 블라드에게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깃발을 꺼내라. 이제 곧 성문이니.”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벗어나자 드디어 저 멀리서부터 바스토폴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쇼아라에서 떠난 지 이제 꼬박 3주일째.
드디어 도착한 강철공의 도시는 멀리서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태양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응?”
“이제야 알아채는군.”
그러나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매끈해 보이는 성벽의 표면을 확인한 블라드는 곧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강철공(鋼鐵公)은 왜 강철공이라 불리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저기에 있지.”
블라드가 여태껏 막연히 돌이라 생각했던 검회색의 돌들은 사실 돌이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가 강철(鋼鐵).
올려보아도 한눈에 담기 힘든 성벽 모두가 강철로 채워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멀리서도 반짝이던 검회색의 성벽.
이제야 그 이유를 알고만 블라드는 자신의 깃발을 꺼낼 생각조차 못 한 채 멍하니 바스토폴의 성벽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상식의 선을 뛰어넘어 다가온 거대한 강철의 도시는 블라드의 세계에 짙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
“이제야 모두 도착했군.”
홀로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서 천천히 술잔을 돌리는 남자가 있었다.
강철공 티무르는 저 멀리에 있는 성문을 넘어 자신의 저택으로 오는 행렬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 알리시아 남작 덕분에 회의의 구색은 맞출 수 있겠어.”
“그렇습니다. 공작님.”
함께 집무실에 있던 마법사 페르낭은 티무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동안 7개 가문으로 구성됐으나 우트만 남작가의 멸문으로 오랜 기둥 하나를 잃어버리고 만 북부 회의.
그러나 불미스럽게 비워진 그 자리를 때마침 하이날이 채워줬으니 티무르로서는 분명 기꺼운 일이었다.
“······여전히 봉인함은 날뛰고 있나?”
“그렇습니다. 공작님.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티무르가 쉽게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린드부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는 용의 조각들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이 경고와도 같은 신호는 지금 이 도시를 향해 진하디진한 용의 가능성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다가오는 용의 가능성이라.”
찰랑이는 술잔에 머물러 있던 티무르의 눈길이 어느새 저택 앞에 다다른 행렬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물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금발의 기사가 있었다.
“하긴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일이 이해될 법도 하지.”
물끄러미 블라드를 지켜보던 티무르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검을 잡은 지 고작 몇 년 만에 기사가 되고, 오러를 부르고.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끄집어내 현실에 덧칠할 수 있는 재능은 티무르가 알기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재능이었다.
“준비해두게.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티무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 늙은 마법사가 연기처럼 흩어져 나갔다.
“······그 나무가 색깔만큼은 영롱했었는데 말이지.”
그러나 흉폭한 용의 잔재라 치부하기에는 모시암에서 보았던 그 나무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순히 타고난 것만으로 칠해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 황금빛은 여전히 티무르의 눈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들고 있던 잔 위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한 모금이 있었다.
찰랑이는 술잔을 들어 괜스레 저 멀리에 있던 블라드를 담아본 티무르는 아쉽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
바스토폴의 성문을 지나 강철공의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이제 각자의 깃발을 따라 갈라져 있었다.
저택 위에서 나부끼고 있던 6개의 깃발 옆으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7번째의 깃발. 하이날.
그렇게 이제는 루트거의 인솔이 아닌 오직 하이날의 깃발 아래서 움직여야 하는 순간,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달라붙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는 움찔하고 말았다.
-데어마르의 하이날 남작님! 바스토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렁찬 환영의 인사와 함께 천천히 열리는 저택의 문.
그 너머로 마차 몇 개는 동시에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널따란 정원길이 있었다.
[지금은 안 된다.]
“······.”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해라. 블라드.]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기사들까지.
겉보기에는 알리시아를 환영하는 무리처럼 보였으나 그 사이사이에는 쉽사리 무시하기 힘든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블라드 경?”
저 앞에서 하이날의 깃발을 든 노기사 던칸이 조용히 블라드를 뒤돌아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순진한 그의 모습.
도열해 있던 몇몇 젊은 기사들은 자신들의 세계조차 느끼지 못하는 늙은 기사를 보며 굳이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검을 들고 있는 자라면 무릇 호승심에 불타기 마련이다. 그러니 저들의 도발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마라.]
검을 들고 있다면 검사.
그러나 들고 있는 검 위에 의무를 지고 있다면 기사일 것이다.
블라드는 자신이 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도발의 눈빛들을 애써 무시하고는 알리시아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도착했습니다. 알리시아 남작님.”
“알겠어요.”
블라드의 신호와 함께 조용히 마차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글거리던 기사들의 눈빛이었으나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풀어헤치듯 나오는 물빛 반짝임에 순간 주위의 모두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까지 호위하느라 수고하셨어요. 블라드 경.”
“아닙니다. 남작님.”
아마 지금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도 눈을 떼지 못하는 알리시아의 반짝임이 오랜 여행길에 지쳐 충분히 제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저를 위해 길을 열어주시겠어요?”
나를 위해 길을 내어달라는 알리시아의 부탁에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레오의 이름이 아닌 하이날의 깃발 아래 서 있던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함이었으니까.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기 위해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남작님.”
초대받기는 아우레오였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하이날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래서 블라드가 알리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면 해도 된다.]
그러나 손색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리시아가 바라는 대로 그녀에게 제대로 된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큭!”
“흐음······.”
하이날의 깃발을 들고 있던 던칸은 갑작스레 비틀거리는 기사들을 보고서는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깃발을 드느라 잔뜩 긴장해 있는 그가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았다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다들 고개를 숙이네요.”
“하이날에 대한 존중의 표시일 겁니다.”
“다행이에요. 혹시 무시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오래된 옛 전통에 맞추어 고귀한 레이디를 위해 자신의 망토를 펼쳐 든 기사.
나의 망토를 통해 혹시라도 그녀에게 닿을 모든 모욕을 차단해버린 블라드는 이제 조용히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가시죠. 알리시아 님.”
블라드의 인도에 맞춰 알리시아는 천천히 강철공의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머리를 조아리는 북부의 기사들.
그들의 환대를 보며 알리시아가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신께 부탁하기를 잘했네요."
지금 이 자리에 하이날의 나무는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 나무의 빛깔은 황금색.
커다랗지는 않았으나 분명 높은 곳을 향해 뻗어있는 나무였다.
※※※※
“야장(冶匠)님! 야장님! 나 좀 봅시다!”
한가로이 갈매기들만 떠다니는 섬 위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 안에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주지!”
“······말했다 이놈아. 화통 삶아 먹은 네 목소리가 다 잡아먹어서 그렇지.”
야장이라 불린 늙은 드워프는 자신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시구르손과 그의 선원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바깥바람 좀 맞고는 성질 좀 죽여올 줄 알았더니 여전하구나.”
“평생을 이러고 살았는데 고작 몇 달 따위로 되겠어요? 그나저나 이것 좀 봐봐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시구르손은 먼저 부족장에게 보고해야만 했지만 정작 그가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야장이라 부르는 늙은 드워프였다.
“고로? 이게 왜?”
“나이가 드시니까 이제는 눈까지 침침해지셨나 보네.”
더는 투덕거리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친 시구르손은 서둘러 자신의 품에 있던 안경을 꺼내고서는 늙은 드워프에게 씌워주었다.
“이제 봐요. 보여요?”
“낡은 고로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평소보다 훨씬 안달이 난 시구르손을 본 늙은 드워프는 테 옆에 붙어있는 나사를 돌리며 안경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
“응?”
그러자 보이는 자그마한 꼬리.
낡은 고로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도마뱀과 눈이 마주친 늙은 드워프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뭐야.”
“얘 맞아요? 아니 우리는 책으로만 봤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늙은 드워프의 외침에 어린 도마뱀이 재빨리 고로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치 머리만 숨기면 된다는 듯 여전히 꼬리는 살랑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시구르손은 점점 평정심을 잃어가는 늙은 드워프를 보며 자신이 제대로 된 것을 가져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맞나 보네. 살라맨더.”
부들부들 손을 떨어대는 늙은 야장을 보며 시구르손이 씨익 웃기 시작했다.
그 옛날, 어떠한 것이라도 녹일 수 있다던 드워프들의 용광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용광로의 열기는 무언가를 태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뜨거움을 간직한 채 태어났기에 무엇이든지 녹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장님. 내가 부족장님한테 보고하러 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확인은 마쳤으니 이제는 보고해야 할 차례.
그러나 어느새 낡은 고로를 감싸 안은 늙은 드워프는 그 안에 있는 어린 도마뱀에 온통 정신이 팔려 버린 참이었다.
“그래. 그래. 어이구 착하지.”
“······혹시 인간들한테 단검 같은 거 만들어 준 적 있는가? 예전에 영감님 서부에서 노예 하던 시절에.”
“그렇지. 그렇지. 해치지 않아요.”
마치 어린 손자라도 보는 듯 우쭈쭈 거리고 있는 야장을 보며 시구르손은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었다.
“수리할 때 보니까 희미하긴 했어도 야장님의 인장 같아서 물어본 건데······. 그냥 나중에 와서 다시 물어볼게요.”
부족장한테 가기 위해 시구르손이 번쩍 고로를 뺏어 들자 늙은 드워프의 눈이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단검······?”
귓가에는 머물고 있었으나 그제야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시구르손의 질문에 늙은 드워프는 아주 오래된 옛 기억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만들어준 적이 있긴 한데.”
어느새 저 멀리 걸어가고 있어 대답해주지는 못했지만 시구르손의 물음대로 늙은 드워프는 인간 기사를 위해 단검 몇 개를 만들어 준 적이 있긴 했었다.
비록 도망치는 와중이었기에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분명 고마움과 감사함을 담아 자신의 인장을 새겨넣은 단검이었다.
언제라도 찾아오면 다시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온통 검회색의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천장에서 비치는 빛으로 인해 오히려 밝은 공간.
중부의 양식과는 달리 온통 검과 방패로 장식된 회의장을 보며 알리시아는 인상적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흠집과 깨어짐으로 가득한 무구들이 단순히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알리시아 남작.”
회의장 저 끝에서부터 강철공 티무르가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날, 여기까지 오는 데 불편함이 많았을 텐데.”
가장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가장 멀리서 왔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우트만 남작가로 인해 비워진 빈자리를 채워준 알리시아였기에 지금 앉아 있는 6명의 영주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부디 내가 마련한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상대방이 배려를 보였다면 예의로 답해야 할 것이다.
알리시아는 비록 영주의 자격으로 도착했지만, 제국에 넷밖에 없는 공작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모여야 할 사람들은 전부 모인 것 같군.”
7개의 깃발. 7개의 의자.
그리고 7명의 영주.
알리시아가 자리에 앉자 이제야 꽉 채워진 회의장을 보며 티무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시작을 알리는 강철공의 손짓에 따라 회의장의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차가운 바람과 함께 떠도는 푸른 눈 알갱이들.
힘껏 내리쳐도 깨지지 않는 새하얀 호수의 얼음.
혹독하다 못해 강렬한 북부의 추위는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한 것.
그러나 그런 추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야생성이야말로 북부인들이 가진 정체성일 것이다.
너무나 견고했기에 끝까지 섞이지 못했던 정체성.
점점 좁혀져 가는 문틈을 바라보며 강철공의 눈빛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제국이 행했던 차별조차도 훈장처럼 삼으며 버텨왔던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
‘웅장하네.’
여태껏 많은 귀족 가의 저택을 방문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길고도 넓은 복도는 처음이었다.
블라드는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회의장의 문을 보며 볼을 긁적이고 말았다.
‘어디 빠져나갈 틈이 없어 보이는데.’
낯선 곳에 들어왔을 때 주위를 살펴보는 것은 블라드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도망칠 길을 알아보는 것은 약자의 본능이라 할 수 있겠으나 블라드는 언제나 자신이 진창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서 지키고 서 있으면 되는 거야.”
“그렇군요.”
블라드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몸을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짓고 있는 루트거와 함께 영주들을 호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6명의 기사들이 있었다.
“물론 너는 지키기보다는 안으로 들어갈 손님에 가깝지만 말이지.”
루트거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선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서 있는 블라드와 호위 기사들 사이에는 나름의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를 무사히 회의장까지 인도한 블라드는 이제 기사가 아닌 초대받은 손님의 자격으로 이곳에 서 있는 참이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영주의 최측근들이란 말이네.’
블라드는 루트거의 말을 들으며 그의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의 면면을 확인해보았다.
바예지드의 루트거, 하이날의 던칸.
그리고 아직 이름을 모르는 기사들 사이에서 낯이 익은 누군가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하게 되었군. 블라드 경.”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볼코프 님.”
기사들 사이에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바라노프에서도 명망 높은 기사인 투창의 볼코프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자연스레 볼코프와 악수를 나누는 블라드를 보며 몇몇 기사들은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모시암에서는 서로가 바빠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없었지.”
“그랬었죠.”
비록 모시암에서는 스쳐 지나갔지만 볼코프는 가장 빠른 용을 향해 달려들던 어린 용몰이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 깨어져 가는 검과 함께 울부짖던 블라드의 모습은 그날의 볼코프에게 있어 선명한 그림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종자에서 기사로, 그리고 이제는 성을 가진 귀족이 된 것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볼코프의 인사를 들은 블라드는 애써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에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서 있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링겐의 기사 랄프요.”
“로므니에의 기예르모.”
“포드밀스에서 온 에른스트입니다.”
“하르키타의 카로이요. 이거 소문이 자자한 사람을 직접 보니 반갑구만!”
볼코프가 대화의 물꼬를 트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후계자, 누군가는 조언자.
또 누군가는 영주의 최측근.
실력의 고하를 떠나 북부인들이라면 한 번쯤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사람들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 엘프들의 땅까지 다녀왔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결혼은 했는가!”
“아직······.”
“저희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하십니다.”
“제가 꼭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블라드를 보며 몇몇 기사들은 마뜩잖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영주들의 최측근이었고 누군가에 대한 시기와 질투보다는 영지의 이득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대련 한번 부탁하고 싶은데.”
그러나 대의를 추구하는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블라드에 대한 호기심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블라드는 불타는 듯한 기예르모의 눈을 마주하며 이곳에 있는 모두가 형태는 달랐을지라도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블라드 님.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화의 열기가 점점 더해가려는 가운데, 집사의 부름을 받은 블라드는 이제 곧 자신이 들어갈 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들과 함께하는 지금은 블라드 경이었지만 회의장 안에 들어설 때는 아우레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잘하고 와라.”
블라드는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루트거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괜스레 뛰고 있는 심장만큼이나 아직 긴장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루트거가 뒤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만 같았다.
※※※※
“······진짜 강철이네. 강철.”
블라드가 영주들의 부름을 받으려 대기하는 사이, 그의 마법사인 니벨룬은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참 사리사욕을 채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강철이 이렇게 쉽게 만들어질 수가 있나?”
들고 있던 배낭에서 돋보기 하나를 꺼내고는 마치 바퀴벌레처럼 성벽에 바짝 붙고는 혼잣말을 해대는 수인족 남성.
누가 봐도 충분히 수상한 모습에 경비병들의 눈이 좁아지고 있었지만 정작 니벨룬은 남들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여기가 철광석 산지라 해도 이게 캔다고 나오는 광물은 아닐 텐데······.”
한참 연구대상에 몰두한 마법사에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한참 집중하고 있던 니벨룬은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지금······!
-하늘에 뭔가가······!
‘근처에 화산이라도 있는 건가?’
본디 강철이란 물건은 무쇠를 녹일 만큼의 강한 열기와 압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용광로 정도 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온갖 불순물들을 태워버려야만 지금 정도 수준의 강철이 나올 텐데 설마 이만한 양의 강철들을 전부 대장간에서 만들었을 리는······.
“엥?”
“뛰라니까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한참 성벽에 집중하고 있던 니벨룬은 어느새 자신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내를 위해 붙여놓은 병사가 다급하게 그를 둘러업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왜긴 왜입니까!”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니벨룬을 보며 병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저기! 하늘을 보세요!”
“하늘?”
병사의 외침에 자연스레 들고 있던 돋보기로 하늘을 바라본 니벨룬은 곧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저게 뭐야?”
과연 병사의 말대로 이곳 바스토폴을 향해 저 멀리서부터 반짝이는 은색 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점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올수록 명확히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습격이다! 습격!
-하늘에서 온다! 다들 화살 들어!
시위를 메기기 시작하는 병사들의 뒤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혼란으로 얼룩진 바스토폴의 길을 따라 저택으로 향하던 니벨룬은 들고 있던 돋보기를 통해 마침내 다다른 습격자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와이번(Wyvern)?”
이제는 잊혀 가는 오랜 전설에 따르면 바스토폴의 성벽은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철광석으로 쌓아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 평범하던 철광석이 지금의 단단한 강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벽으로 와닿은 강렬하고도 뜨거운 무언가의 숨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들이 불을 뿜는다!
-다들 피해!
가장 완벽한 용의 숨결(Breath).
오직 순수한 것만을 남기고자 하는 용의 분노가 바스토폴의 성벽을 강철로 녹여버렸다고 했다.
“······길을 열어라. 북부의 기사들아.”
하늘에서 시작된 용의 숨결과 함께 땅에 내린 남자가 있었다.
“나는 정당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지금 이곳에 왔다.”
그는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
그리고 목이 그어진 용의 깃발과 함께 온 남자였다.
“이 땅의 주인에게 용살기사단의 미르셰아가 왔다고 알려라.”
아무리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해도 저 위에 있는 하늘보다 높지는 못할 터.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어난 용의 날갯짓에 바스토폴에 매달려 있던 7개의 깃발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봐라.]
기사들을 뒤에 둔 채 문 앞에 서 있던 블라드는 그동안 품고 있던 의문 하나를 물어보기로 했다.
저 높은 귀족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 아직 내가 진창 위에 서 있던 소년이었을 때를 기억하며 묻는 질문이었다.
‘왜 하필 나였어요?’
[음?]
‘왜 하필 나한테 왔냐구요.’
블라드가 진창 위를 구르던 뒷골목의 소년이었을 시절, 키하노는 검은 벼락과 함께 찾아왔다.
처음에는 불운한 우연이라 생각했었지만 키하노가 누군지 알게 된 지금, 블라드는 그가 고작 허튼 우연 따위로 다가올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왜 하필 너였냐고.]
블라드의 질문에 키하노의 목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만약 블라드가 지금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면 새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지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는 키하노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블라드 아우레오 님. 입장하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보고 있었을 때.]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회의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그 뒤에 있던 문이 열리고.
겹겹이 블라드를 가로막고 있던 문들이 열리자 저 먼 곳에 앉아 있는 영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땅으로 흩어진 조각 중에서 네가 제일 반짝였거든.]
키하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진창에서 태어났으나 이제 향하는 곳은 귀족의 세계.
그러나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북부의 영주들보다도 자신의 안에 있는 키하노의 인정이 더 기꺼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회의장에 있을 그 누구라 할지라도 내 안에 있는 키하노보다 빛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길고도 넓은 복도.
저 멀리서부터 샛노란 황혼을 밟으며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지금 남자가 걷고 있는 복도는 오직 고귀한 귀족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으며 그 길의 끝에는 북부 최고 권력인 영주들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
강철공 티무르는 회의장을 향해 걸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찬란한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귀족적으로 생긴 외모까지.
‘의식해서 보니······. 확실히 닮았군.’
지는 해를 따라 걸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강철공 티무르는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렬했기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상의 소유자.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공작.
왜 이제야 알아봤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블라드의 모습은 기억하고 있던 용혈공의 인상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공작님.”
블라드를 보며 고민하고 있던 티무르는 페르낭의 나지막한 부름에 살짝 시선을 돌려 보았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음.”
늙은 마법사가 들고 있는 천칭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쪽은 용의 모습을 새겨넣은 화려한 브로치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검의 문양을 새겨넣은 낡은 동전이 올려져 있는 자그마한 천칭이었다.
“어느 쪽인가.”
“조금은 더 다가와야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과연 잘 모르겠다는 페르낭의 말대로 그가 들고 있는 낡은 천칭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블라드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요란해지는 중이었다.
“······그 녀석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군.”
티무르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는 천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가올수록 짙어지는 노을의 그림자.
그것이 지금 이곳으로 걸어오는 블라드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물어가는 노을의 끝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용인가, 기사인가.
그러나 티무르는 블라드가 아무리 가까이 다가온다 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
끼이이익-
천천히 문틈 사이로 사라져 가는 블라드의 뒷모습.
지켜야 하기에 남아있던 7명의 기사는 복도에 남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라드 경이 들어가는 걸 보니 회의가 얼추 마무리됐나 보군요.”
“아무래도 그런가 봅니다.”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만큼은 좋게 끝내는 것이 좋겠지요.”
남아있던 기사들은 블라드의 입장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회의는 이제 끝났고 남은 것은 하나를 위한 선언과 결의뿐.
그런 자리에 있어 필요한 것이라 한다면 아마 흥을 돋울 수 있는 축하주 정도일 것이다.
“이제 겨우 20살이라고 했던가?”
“과연 어지러운 시기에는 인재가 탄생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명분 없는 황제가 즉위하고, 중부의 전쟁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이제는 사특한 존재까지 북부를 노리고 있었다.
온통 우울한 소식뿐인 지금의 상황에서 블라드라는 존재는 분명 북부가 위안 삼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징일 것이다.
“음?”
기사들이 모여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루트거는 갑작스레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고는 목덜미를 붙잡고 말았다.
‘뭐지.’
마치 새파란 검날이 목에 닿은 것만 같은 느낌.
본능이 먼저 알아챈 그 서늘한 경고가 목덜미를 타고 오르며 점점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
“······.”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던 루트거는 순간 자신과 눈을 마주친 볼코프를 볼 수 있었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볼코프도 알아차린 감각.
둘은 서로를 통해 지금의 서늘함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가 옵니다!”
“흡!”
쐐애애엑-!
어두운 복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거리.
그러나 보이지는 않았어도 느낄 수 있는 그곳을 향해 볼코프는 망설임 없이 투창을 날렸다.
경고를 알리는 루트거의 외침보다도 훨씬 빠른 몸놀림이었다.
“으으!”
“이게 도대체 무슨······.”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던칸과 에른스트가 귀를 막아버리고 말았다.
“······!”
복도 끝을 노려보는 볼코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닿고도 남을 시간.
그러나 기다렸던 투창의 피격음은 들리지 않았고 어두운 복도는 여전히 고요할 뿐이었다.
“······이런!”
파아악-!
새까만 복도를 노려보던 볼코프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날려 보낸 만큼이나 강맹한 기세로 되돌아오는 투창을 보았기 때문에.
‘그걸 잡아챘단 말인가!’
가장 빠른 용인 린드부름조차도 피하기에 급급했던 투창이건만.
그러나 상대는 피하지도 쳐내지도 않은 채 그저 손으로 잡아낸 모양이었다.
따아앙-!
“크흡!”
다급하게 후려친 창과 창 사이로 요란한 불꽃이 튀어 나갔다.
그 불꽃과 함께 퍼져나가는 날카로운 충격파만으로도 세계를 갖추지 못한 기사들은 크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습격인가!”
“······아무래도 뚫린 모양이군.”
튀어 오르는 불꽃을 보며 사태를 파악한 카로이와 기예르모는 재빨리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뚫려서는 안 되는 도시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지금 저 앞에 있는 습격자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분한 듯 바드득거리며 갈리는 잇소리와 함께 카로이의 감은 왼쪽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았다던 바스토폴.
비록 카로이가 바라노프의 기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도시 바스토폴은 북부 기사들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숨어 있지만 말고 나와 봐라!”
기선을 제압하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기사 카로이는 치켜든 도끼로 방호태세를 굳히기 시작했다.
중부에 아른슈타인의 파블로가 있다면 북부에는 하르키타의 카로이가 있다.
마치 성벽과도 그들의 태세는 그 누구를 상대하라더라도 쉽게 뚫리지 않는 단단한 것이었다.
콰아아앙-!
분명 그랬어야만 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카로이의 방호태세는.
“크흡!”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
그러나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다가와 버린 습격자는 카로이를 향해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건······!’
도끼와 검이 맞부딪히자 마치 태풍과도 같은 출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살결에 와닿는 바람만 느껴보아도 방금의 일격에 얼마만큼의 힘이 터져 나왔는지 알 수 있는 그런 충격이었다.
“컥!”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벽면으로 처박혀 버린 카로이.
단단한 성벽과도 같았던 그의 방호태세는 그저 단 한 번의 일격만으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카로이!”
“예사 놈이 아니군!”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카로이를 보며 기예르모와 랄프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노을이 아닌 달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복도.
그곳에서 오직 홀로 서 있는 금발 하나가 매섭게 달려드는 북부의 기사들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용살 기사단?”
쏟아지는 달빛을 담으며 세차게 검을 휘두르던 기예르모는 물끄러미 빛나는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을 죽이는 용들.
드라굴리아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 위로 사내의 새파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두근-!
“뻔히 보이는군.”
“뭐?”
그 어떤 기사라 할지라도 현혹할 수 있다는 로므니에의 검.
그러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단 한 번의 찌르기만으로도 기예르모의 변화무쌍함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의도가 너무 얕다는 말이야.”
“······!”
기예르모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미르셰아를 보며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의 웃음과 함께 차갑게 파고드는 검의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크아악!”
“네 이놈!”
고통스러워하는 기예르모의 옆에서부터 세차게 뛰어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검을 찌르고 있었기에 빌 수밖에 없는 공간.
경험 많은 기사인 마링겐의 랄프는 기예르모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다.
‘여기라면!’
오른손으로 기예르모를 찌르고 있었기에 이 공격만큼은 쉽게 반응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반응한다고 할지라도 그저 약간의 회피 동작······.
파아앙-!
“쿨럭!”
그러나 랄프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복부의 압박을 느끼며 형편없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랄프가 다가오는 곳으로 발차기가 뻗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랄프를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상대가 이미 자신보다 몇 수는 더 내다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뒤로 물러나시오!”
“크흡!”
어깨가 꿰뚫려 있던 기예르모는 볼코프의 지원이 있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몸놀림과 함께 새빨간 핏줄기가 복도에 흩뿌려졌다.
“북부가 자랑한다는 기사들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이것 참 실망이로군.”
“······.”
기예르모를 끄집어낸 볼코프는 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투창을 치켜들었다.
어설피 떠 있던 달이 완연히 무르익자 보이는 풍경.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세 명의 기사들이 지금 볼코프의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절대로 가볍지 않은 그런 기사들이었다.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오랜만입니다. 볼코프 경.”
그리고 그런 기사들을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 만에 해치워 버린 남자가 있었다.
제국에 있는 수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최고를 다툰다는 용살 기사단.
“강철공을 뵈러 왔습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사단의 단장인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제 동생 라두를 아껴주신 은혜도 갚을 겸 해서 말입니다.”
그가 지금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도시 위에서 웃고 있었다.
※※※※
“······!”
몇 발자국만 걸으면 회의장으로 들어설 수 있는 거리.
저 앞에 있는 페테르와 알리시아의 얼굴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블라드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두근-!
도시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던 기이한 심장 박동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거 뭐야.”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리고 티무르에게 가까워질수록 쿵쾅거렸던 심장은 이제 블라드의 의지를 넘어 제멋대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아닌 본능에 의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심장.
이와 같은 때를 느껴본 적 있던 블라드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고는 멈춰서기 시작했다.
“······공작님.”
“말해라.”
앉아 있던 영주들도 블라드의 이상함을 느꼈는지 티무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영주들이 시선 속에서도 그저 블라드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자연스레 늘어뜨린 티무르의 오른손은 옆에 있는 칙서도, 혹은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집을 수도 있는 위치에 가 있었다.
“무엇이냐.”
저물어가는 태양을 뚫고 드디어 나의 앞에 당도한 남자.
티무르의 물음에 흔들리던 천칭이 마침내 크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용입니다.”
진실을 알려주는 낡은 천칭이 가리키고 있는 추.
그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용 모양의 브로치가 있는 곳이었다.
채앵-!
“······!”
티무르는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서둘러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왼쪽 눈을 감은 채 검을 빼 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블라드······!’
영주들을 향해 검을 빼든 블라드.
너무나도 불경한 태도에 페테르는 흠칫거렸고 알리시아는 평소보다 훨씬 새파래진 블라드의 눈동자를 보고는 속으로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행동이지. 블라드 아우레오?”
“······.”
블라드의 돌발 행동에 검을 다룰 줄 아는 영주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부의 영주는 오직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만 될 수 있는 법.
지금 일어서고 있는 영주들은 모두가 페테르나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전(前) 시대를 대표했던 기사들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너의 검을 뽑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블라드 아우레오.”
고작 한 발자국의 차이로 회의장과 복도가 나뉘는 거리.
그 경계에 서 있던 블라드는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숙인 채 가만히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뚫고 올라오는 키하노의 목소리가 블라드의 세계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밑을 바라보지 마라. 그곳에 있는 것은 너의 것이 아니야.]
타고난 피가 가리키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도시 바스토폴의 가장 밑에 자리 잡은 곳이었으며 노련한 마법사의 신비로도 완벽히 가릴 수 없는 강렬함이 있는 곳이었다.
[네가 항상 바라보던 곳은 어디였지? 고딘이라는 푸른 달은 어디에 매달려 있었나?]
그러나 이제는 블라드도 알 수 있었다.
이 도시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완벽한 조각이 있다는 것을.
그 조각은 그저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진창에서 태어난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조각이었다.
[네가 갖고 싶어 했던 장식 없는 검은 어디에 매달려 있었는지 기억해봐라.]
마치 키하노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블라드의 심장 박동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귓가를 가득 메우는 조각의 부름에 블라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키하노. 나 용이었어요?’
어머니는 뒷골목의 창녀였고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는 게 흔하디흔한 고아.
그러나 저 밑에 있는 조각이 속삭여주는 나의 핏줄에 블라드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어서 나에게로 와라. 어린 용아.
여기 가둬져 있는 나를 찾아라.
나는 쥐기만 해도 너를 존귀하게 만들어 줄 존재이니.
나와 함께 하면 너는 영원할 완벽함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오직 용으로 태어난 존재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 지금도 계속해서 블라드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도저히 지나치기 힘든 매혹적인 울림이었다.
새로이 품은 별의 이름
용이란 본래 완벽한 것이다.
거대하고, 빠르며, 날카롭고, 단단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하늘에 가까운 존재.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이란 말인가.
두근-! 두근-!
지금 저 깊숙한 밑에서 블라드를 유혹하는 조각들이 있었다.
완벽해지고자 하는 용의 조각들.
가장 빛나는 가능성을 알아보는 존재는 오직 키하노 뿐만이 아니었다.
“으······ 아아아아!”
쾅! 쾅!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지금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도무지 멈추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쿵쾅거림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분노와 광기.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용의 본능에 블라드는 바닥을 내려치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밑을 보지 마라! 위를 봐라! 블라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키하노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가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공격하던 데스웜.
야만인들을 잡아먹던 린드부름.
그리고 세계수의 어린 정령들을 삼키려던 니드호그까지.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가져가려 했던 용들. 나에게도 그것들과 같은 피가 내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블라드는 분노하고 말았다.
“그럼 내가 지금껏 한 건 뭔데!”
시간이 갈수록 눈동자는 새파래지고 이빨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점점 피의 본능에 굴복해가는 블라드를 보며 북부의 영주들이 검을 뽑기 치켜들기 시작했다.
“블라드! 블라드 경!”
그 모습을 보며 애타게 외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마저도 희미해지는 가운데 블라드의 의식은 천천히 용의 조각이 있는 곳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있던 린드부름조차도 응답하고 말았던 조각들의 유혹은 지금 막 용의 피를 자각한 블라드로써는 감히 거부하기 힘든 부름이었다.
“······.”
하얀색에서 초록색으로.
초록색에서 푸른색, 황금색을 거쳐 이제는 불길한 핏빛 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블라드의 세계를 보며 티무르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용으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용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거다!]
거친 심장 박동 소리에 점점 가려져 가는 키하노의 목소리.
그러나 키하노가 전해주고자 하는 마지막 말 만큼은 블라드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박혀 내려올 수 있었다.
태어난 대로 살아가지 마라.
부디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
용으로 태어났지만, 별을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조각들이 부르는 대로 천천히 가라앉아 가던 블라드는 키하노의 마지막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깊게 침잠했기에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던 별 하나가 떠 있었다.
※※※※
“크흑!”
볼코프는 저릿저릿한 손아귀를 움켜쥐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무기의 상성이 있다고 해도 투창의 볼코프는 북부를 상징하는 기사 중 하나.
그러나 지금의 그는 진땀을 흘리며 미르셰아의 공격을 받아내기 급급할 뿐이었다.
‘······이렇게나 강했었나!’
빠르고, 날카롭고, 단단하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는 자세는 그야말로 완벽(完璧).
심지어 세우고 있는 오러는 앞으로 걸어올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듣던 대로 북부는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앞으로 다가올수록 미르셰아의 기세는 거세져만 갔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볼코프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준비할 뿐이었다.
“먼 곳을 날아왔는데 고작 이것뿐이라니.”
미르셰아의 기만에 쓰러져 있던 기사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마 일어설 수 없는 것은 그가 새겨넣은 일격이 너무나 뼈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뿐이라면 정말 실망인데.”
북부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미르셰아를 보며 볼코프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볼코프의 투창에 오러가 가득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 정도는 내어주셔야지.”
보이는 기세는 분명 매서웠으나 정작 그것을 보고 있는 미르셰아는 기꺼운 듯 웃고 있을 뿐.
미르셰아는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이한 고양감을 느끼며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완벽해지는 나라는 존재에 취하면서 말이다.
“······대접이 섭해서야 쓰나.”
그러나 거침없이 나아가려는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여태껏 미르셰아를 붙잡고 있던 볼코프의 뒤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티이이잉-
쇠가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손가락으로 검면을 튕긴 루트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고 있는 그의 왼쪽 눈에서부터 짙고 끈적한 붉은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상대해드리지.”
용암과도 같은 끈적하고도 뜨거운 오러가 루트거의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화산과도 같은 세계.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아직도 뜨겁게 타오르는 상처와 분노가 가득했다.
“나 대신 쓰러져 준 기사들의 몫까지 말이야.”
기사들이 벌어준 시간을 틈타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꺼내온 루트거의 세계.
“······!”
그동안 참고 있던 루트거의 분노가 마치 활화산처럼 터져나와 미르셰아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마침내 휘두른 일검 하나에 복도의 창들이 깨어지고 바닥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깨어져 나가는 파편들 속에서 뛰쳐나가는 붉게 물든 선 하나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잘난 면상에 한 방 먹일 수 있겠군!”
“루트거······. 바예지드!”
검과 검 사이에서 바짝 마주한 푸른 눈동자와 붉은 세계.
더는 거칠 것 없는 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회의장.
그 입구에 서 있던 블라드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가슴팍을 부여잡은 모양새가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진짜, 진짜 그래도 돼요?”
“뭐?”
블라드를 보고 있던 티무르는 갑작스레 묻는 블라드의 질문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혼잣말인 줄은 알겠지만, 그저 정신 나간 질문처럼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원하는 대로······.”
새파래진 블라드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홀린 듯한 눈이었으나 형형한 안광만은 여전히 터질 듯 빛나.
“공작님.”
티무르는 옆에서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페르낭의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
바뀌지 않기에 진실.
그러나 진실을 알려준다는 천칭은 지금 부르르 떨리며 천천히 반대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판단한 진실을 번복하는 지금의 상황은 페르낭에게도 티무르에게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린 용아. 그곳이 아니다! 나를 봐라!
-갖기 어려운 것을 동경하지 마라. 지금 네 주위만 해도 쓸어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조각들이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지만 지금 블라드는 들었으되 보지는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고개를 든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티무르를 바라보았고.
이제는 그를 넘어 저 천장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진짜 해도 돼요?”
장식 없는 검을 넘어, 푸른 달을 지나, 마침내 마주할 수 있는 하늘 저 너머에 별 하나.
여태껏 마주한 그 어떤 존재보다 찬란히 빛나는 그 별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르르르르-
“공작님!”
“이게 무슨!”
“꺄아악!”
갑작스레 땅 아래서부터 퍼지는 거친 울림에 북부 영주들이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시를 뒤흔들고 있는 그 울림은 이대로 어린 용을 놓지 못하겠다는 조각들의 고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은 맞나 보군!’
맹약의 수호자인 강철공 티무르는 지금의 진동이 용의 조각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블라드는 분명 용이 맞을 터인데.
“······하지만 기울었어.”
그러나 부들거리던 낡은 천칭은 어느새 완전히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기울어져 있는 쪽에 올려져 있는 낡은 동전은 그 옛날 소드마스터가 자신의 검에서 떼어내었다던 명예로운 금속으로 만든 동전이었다.
“너는 누구냐.”
용의 조각도 진실의 천칭도 모두 자신이 맞다고 하는 상황.
베어야 하는 맹약의 의무와 지켜야 하는 기사의 의무 사이에서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던 티무르는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는 앞에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
눈을 감자 보이는 세계.
땅의 울림도 영주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세계에서 티무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블라드를 가린 채 서 있는 그 남자는 지금도 두 손을 들어 어린 용의 귀를 막아주고 있었다.
※※※※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다들 별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었다.
그리고 아무리 쥐어보아도 닿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어른이 되었다.
“애송아. 이런 곳에서 괜히 꿈을 가지면 너만 고달파져.”
늙은 대장장이도 말했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곳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 보면 괴로워지는 것은 너뿐이라고.
결국,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아이들의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너는 용으로 태어났지.]
그래도 나는 믿었다.
이렇게 진창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나만의 빛을 가지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꼭 용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거다.]
저 하늘에 닿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별일 것이다.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언젠가, 분명히 나를 알아봐 주는 빛이 있다.
“······맙소사.”
맹약의 수호자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의 뒷모습.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세계에 닿은 티무르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광경을 보고 있는지 깨닫고는 경악할 뿐이었다.
별을 보고 있던 블라드의 등 뒤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나무의 빛깔은 황금색이었으며 곧고 바르게 자라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무를 이루는 한쪽 면은 쇼아라의 블라드.
다른 한쪽 면은 블라드 아우레오.
그리고 남은 한쪽 면은 가지고 태어났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드라굴리아.
부정적인 면조차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블라드는 이제 진정한 자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
[앞으로도 어린아이들의 가능성을 위해 검을 들테냐.]
“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너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을 테냐.]
“네.”
맹약의 수호자를 증인 삼아 소년과 기사가 치르는 서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 밑에서 울려 퍼지는 용의 울음소리 따위는 닿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키하노는 블라드의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떼고는 기억 속에서 검 하나를 꺼내 블라드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찬란히 빛나는 은색의 기사는 어린 세계수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커다랬으며 또한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명예로워야 하는 너를 위해 정당한 대가만을 받을 수 있겠느냐.]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빼앗지 말고 오직 정당한 나의 대가만.
언젠가 푸른 달이 알려준 적 있던 기사의 규율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제야 앞에 있는 키하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네.”
용으로 태어났으나 별처럼 살아가겠다 맹세하는 블라드를 보며 소드마스터는 천천히 물러났다.
[모든 의무를 지키겠다 맹세한 너는 오늘부터 너 자신의 주인이다.]
키하노의 선언과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 사이로 용의 피가 아닌 별빛 하나가 머물기 시작했다.
태어난 대로가 아닌 원하는 나의 모습.
그렇게 블라드는 자신의 심장 안에 깃든 별 하나를 바라보았다.
장식 없는 검은 깨어졌고, 푸른 달에는 결국 닿지 못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새로이 꿈꿀 수 있는 별 하나를 가슴 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별은 여태껏 가장 가까이서 소년을 비춰주고 있던 빛이었으며.
소리 내어 부를 때는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별이었다.
용이 울부짖는 도시 (1)
수도 브리간테스에 있는 드라굴리아의 저택.
용혈공 사르누스는 창가에 서서 저 멀리에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그의 얼굴은 목덜미에 두르고 있는 하얀 붕대 때문인지 부쩍 수척해 보였다.
‘······소드마스터의 검이 뽑혔다.’
갑작스레 맹약이 발동되던 그 날 사르누스는 확신하고 말았다.
지금 제국 어디에선가 소드마스터의 검이 뽑혔음을.
아주 잠시였지만 발동되었던 소드마스터와의 맹약은 핏줄 아니면 의지로만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강철공인가? 아니면 바예지드?’
이미 죽은 프라우센에게 갑작스레 후계자가 생겨날 리도 없었으니 남은 가능성은 오직 소드마스터의 검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안개 가득한 모시암에서 도시를 가르던 하얀 번개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만 찾아 없애면 나는 자유다.’
태어나기를 빼앗는 자로 태어났으나 맹약에 묶여 지키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르누스는 지금 진정한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꾸는 꿈의 끝에는 용의 피가 바라마지 않는 완벽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
그러나 아주 잠깐.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었으나 사르누스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따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느낀 감각과는 어딘가 달랐으나 분명 익숙한 고통이기도 했다.
“······피?”
마치 착각과도 같았던 찰나의 감각.
손가락을 들어 붕대를 어루만지던 사르누스는 손끝에 번진 붉은 액체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검은 이미 뽑혔을 텐데?”
뽑힐 수는 있겠으나 정당히 의지를 이은 자가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은색의 기사.
그러나 지금 사르누스가 두르고 있는 하얀 붕대에는 새빨간 핏방울 하나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흔적이긴 했으나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
내 앞에 있는 자는 용인가 기사인가.
검을 빼든 북부의 영주들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칠게 포효했던 금발의 기사는 분명 용의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베어야 합니다.”
“······잠시만.”
“페테르 백작. 아쉬운 것은 알겠지만 이것은 대의를 위한 일이요.”
“······.”
옆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페테르는 그만 입술을 꽉 다물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 북부에게 있어 드라굴리아의 피는 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잠시만 기다려봅시다.”
그러나 페테르는 쉽사리 검을 움직이지 못했다.
쇼아라에서 태어나 바예지드가 찾아낸 어린 기사.
페테르는 스투르마의 성벽 아래서 수없이 검을 휘두르던 어린 종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자를 데려오면서 환하게 웃던 내 아들의 미소 또한.
“움직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블라드.
그가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하자 영주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몇몇은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오러를 불러일으키는 중이었다.
“블라드 경······.”
영주들의 뒤에서 있던 알리시아는 여전히 침묵하고만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땅을 울리는 이유 모를 진동은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계속해서 흔드는 중이었다.
드드드득-
천장에서부터 돌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돌아보라 외치는 조각들의 외침 속에서 블라드는 조용히 눈을 떴다.
뜨고 있는 블라드의 눈은 여전히 새파랬으나 초점만큼은 확연히 잡혀 있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무거운 침묵 속, 회의장 가장 높은 자리에서부터 강철공 티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누르려 했지만 떨릴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티무르의 말끝을 흐리게 했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해봐라. 너는 누구냐.”
보았고 느꼈으나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티무르의 세계 안에 있었다.
다른 영주들은 몰랐겠으나 맹약의 수호자인 티무르는 빛나는 나무 아래서 기사로서 인정받은 어린 용의 모습을 보았었다.
“저는 블라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블라드는 오늘에야말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비롯된 뿌리를 찾았고 평생을 통해 되고 싶은 목표를 찾았기 때문에.
“나 자신의 주인. 블라드.”
그 말과 함께 블라드는 귀족이 될 수 있는 경계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남이 주는 나의 이름은 더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두근-!
애써 쥐고 있던 가슴팍에는 여전히 빛나는 별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블라드는 그 별을 모아 조용히 세계수의 검으로 옮겨 담았다.
용의 심장을 따라 옮겨 온 빛을 보며 세계수의 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오겠습니다.”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걸어왔던 문들을 향해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지금껏 들어오고자 노력했던 문들이었으나 돌아선 블라드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용의 조각이 외치는 울부짖음을 따라 하늘 위의 와이번들이 포효하고 있었다.
조각들이 울부짖을수록 강인해지는 와이번들의 비늘은 이제 더는 화살에도 굴하지 않았고 지금도 끊임없이 내뱉는 숨결을 통해 바스토폴의 기사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조각에 가까워질수록 완벽해지고 마는 용들의 모습에 북부의 기사들은 이를 악문 채 항전할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냐. 루트거 바예지드!”
“······!”
까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혔으나 들리는 것은 마치 무언가가 터지는 것만 같은 소리.
복도 가득 퍼져나가는 열풍을 따라 미르셰아가 내뱉는 포효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금의 기세등등함이 아까울 정도로군!”
바짝 들이댄 검 사이로 사납게 웃고 있는 미르셰아가 보였다.
마치 그을리기라도 한 듯 그의 금발은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으나 광기 어린 푸른 눈동자만큼은 여전했다.
“그 건방진 일격. 다시 한번 해보시던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끼기긱 거리며 울고 있는 검 너머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있었다.
지닌 위치도, 주위의 상황도 전부 내던진 채 마주 보고 있는 둘은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해주마!”
거칠게 검을 후려친 루트거는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한번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깊은 세계에서부터 끌어올려 분노라는 분화구를 통해 터트리고 마는 루트거의 세계.
검 끝에 맺힌 뜨거운 오러는 마치 화산에서 터져 나오는 용암을 방불케 했다.
‘보인다!’
그러나 루트거의 검을 바라보는 미르셰아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조각에게 다가갈수록 완벽해지고 마는 미르셰아의 감각.
저 멀리에 있는 존재도 꿰뚫어 보는 용의 시선이 루트거가 내려칠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러에 녹다 만 돌가루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트거의 검 끝에 닿은 것은 그저 허무한 공기뿐.
“······!”
“아까도 말했잖나.”
루트거는 자신의 귓가로 와닿은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스치듯 와닿았으나 날카롭게 파고드는 목소리.
루트거는 판단보다 빠른 본능으로 재빨리 복도를 구르기 시작했다.
“너무 느리다니까!”
드드드드득-!
미르셰아의 일격에 루트거가 있던 자리가 찢겨나가고 있었다.
휘두르는 힘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베어지다 못해 아예 밀려나 버리고 마는 복도의 벽.
인간의 규격을 뛰어넘는 아득한 완력을 보며 루트거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이거였구나.”
희뿌연 돌 먼지가 가득한 복도를 보며 미르셰아는 웃음 짓고 있었다.
직접 보아도 믿을 수 없는 나의 일격.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짜릿한 감각이 손을 타고 들어와 뇌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용이었구나.”
상처받은 상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나라는 존재.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볼코프와 북부의 기사들, 그리고 풍압에 밀려 널브러진 루트거의 모습을 보며 미르셰아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용이었다.
이런 비루한 자들 따위가 막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존재.
“이제 끝내자. 더는 너에게 볼일이 없으니.”
방금까지만 해도 똑바로 맞닿은 루트거였으나 용의 시선으로 본 그는 어느새 저 아래의 존재가 되어있었다.
내 아래에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짓밟고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본래 용이 가진 본능.
미르셰아는 강철공이라는 더 높은 세계를 만나기 위해 루트거의 시체를 밟고 오르기로 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미르셰아를 보며 루트거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미르셰아가 내뿜는 기세가 범접할 수 없는 강물이 되기 전에 루트거는 그것을 끊어내야만 했다.
“······,”
감은 눈을 통해 보이는 미르셰아의 세계는 빛나는 보석과도 같았다.
누군가에 의해 다듬어진 그의 세계는 자그마한 흠도 용납하지 않는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세계였다.
두근-!
그러나 미르셰아는 저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세계를 불러내지 못했다.
루트거의 등 뒤에서부터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누군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누구냐!”
용의 눈으로도 차마 따라잡기 힘든 속도.
그러나 달려드는 그 빛만큼은 황금색으로 이루어져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까아아앙-!
가장 빠른 용보다도 빠르게.
가장 날카로운 용보다도 날카롭게.
“쇼아라의 블라드다!”
드디어 마주친 세계와 세계.
그렇게 맞닥뜨린 둘은 꼭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
드드드드득-
용과 용이 만나자 밑에 있는 조각들이 크게 포효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불러 본 용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존재들.
그 찬란한 가능성을 알아본 조각들은 어서 나를 잡으라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가 이럴 사이가 아닌데 말이지.”
“그럼 무슨 사이인데.”
맞닿았기에 요란하게 울리는 검과 검.
나아가려는 자와 막아내려는 자 사이에는 조금의 빈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너도 알지 않나. 네가 누구인지.”
끼기기긱-!
맞닿고 있던 검의 균형이 블라드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용이기에 가질 수 있는 완력이 블라드를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있었으니까.
“끄으으으······.”
[어서 빠져나가라! 저 녀석을 인간의 규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블라드가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사정없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던 대리석이었으나 내리누르는 힘을 견디지 못해 처참히 부서지는 중이었다.
“우리에게로 와라. 동생아. 지금의 너라면 자격은 차고 넘치지.”
아버지가 흩뿌려놓은 씨앗 중 가장 밝게 빛나는 녀석.
드라굴리아로 오라는 미르셰아의 말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드라굴리아라는 가문은 그렇게 유지되는 가문이었으니까.
“지랄하고······ 있네!”
“······!”
그러나 블라드는 드라굴리아로 오라는 미르셰아의 말에 오히려 크게 분노하고 말았다.
“그 말은 우리 엄마가 죽기 전에 했었어야지.”
“······!”
그렇게나 잘난 너희들이었다면 진작 와서 손을 뻗어줬어야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때는 너무나 추웠고 어렸기에 무덤 하나 만들어주지 못했었는데.
끄드드드득-!
블라드의 분노와 함께 다시금 균형을 맞추기 시작하는 세계수의 검.
완력을 밀어내는 완력이 블라드의 근육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없던 네가 어떻게 내 형이 될 수 있겠어.”
콰앙-!
네가 용이라면 나 또한 용.
블라드는 쓰디쓴 기억과 함께 드라굴리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내 안에 흐르는 피가 비록 싫고 거부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크윽!”
휘두를 줄은 알았으나 받아본 적은 처음인 용의 힘.
그 강렬한 힘을 처음 느껴본 미르셰아는 복도 끝을 향해 주욱 밀려나고 말았다.
“루트거 님!”
“그래.”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시선을 마주한 둘은 익숙한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시간을 벌어다오!”
콰악-!
검을 바닥에 꽂아 넣은 루트거는 서둘러 왼쪽 눈을 감은 채 다시금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방금보다 더 깊게, 나라는 세계에 바짝 닿을 때까지.
바예지드 최고의 용몰이꾼이 벌어주는 시간을 이용해서.
“블라드! 블라드 드라굴리아!”
“드라굴리아라고 부르지 마라!”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미르셰아를 향해 블라드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 피를 타고난 것은 인정하지만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참을 수 없노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너희들이 붙인 나의 이름일 뿐이니까.
“난 너희들같이 살지 않을 거니까!”
블라드, 블라드, 블라드.
내가 얻어 낸 이름을 똑바로 세운 블라드는 그 이름들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세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블라드가 만들어낸 황금빛의 나무는 스승들이 내어준 흙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니까.
“나는 용이 아닌 기사로 살아갈 거다!”
한 걸음 내디디는 걸음은 자야르에게서.
갑옷을 비트는 기술은 유스티아에게.
달려들고자 하는 최적의 길은 오귀스트에게서.
온몸을 감싸는 단단한 기운은 라문드에게.
그리고 지금부터 내뻗는 일격필살의 묘리는 기사 중의 기사. 소드마스터에게서.
“흐아아아아!”
블라드가 내지르는 커다란 포효와 함께 세계수의 검이 세차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별과 함께 뛰는 심장을 따라 가져온 나의 깊은 세계였다.
똑똑히 봐라. 용아. 내가 누군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닌 이제 스스로의 이름으로 빛날 수 있는 나를.
용이 울부짖는 도시 (2)
가장 완벽한 용을 갈라 만들었다는 용의 조각.
강철공 티무르는 순례자들에게 라브노마의 조각을 받았을 때부터 이런 무리가 뒤따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용은 불멸이며 완벽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모이려 하는 존재였으니까.
“바예지드 백작.”
“······공작님.”
검을 움켜쥔 페테르는 복도 끝, 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루트거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오는 용을 밀어내려 하는 나의 아들과 기사.
그런 그들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페테르에게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그곳이 아닐세.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곳에 있네.”
모든 시대는 각자가 짊어진 의무가 있다.
지금 시대의 기사들이 저 앞에서 싸워야 하는 것처럼 전 시대의 기사들 또한 자신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해야만 해.”
티무르가 페르낭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곧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러나기 시작하는 비밀스러운 통로.
공간을 속이는 마법사가 애써 숨겨놓았던 복도가 페테르의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라브노마의 조각을 맡아주게.”
“······.”
맹약의 수호 가문인 서부의 라브노마가 무너졌을 때부터 지금의 사태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이 붙어있기에 조각들은 더욱 완벽해지고 있었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라브노마를 대신해 조각을 보관해 줄 새로운 가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문은 오직 바예지드 뿐이었다.
“바예지드로 충분하겠습니까. 공작님.”
“자네가 내 옆에 서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어.”
티무르의 말을 들은 페테르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도시 위로 울부짖는 용들의 소리.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각들의 진동이 세질수록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힘이 있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법.
어둡고 깜깜한 복도 앞에 선 페테르는 그리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른 한 조각의 수호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바예지드를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나의 아들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 페테르는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마땅히 치르기로 했다.
※※※※
“으아아아아!”
넓은 복도가 좁아 보일 정도로 현란했다.
바닥, 천장, 벽면 할 것 없이 복잡하게 얽혀가는 황금색의 잔상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선(線)의 향연 속에서 미르셰아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부터.
그리고 그 묘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스승은 바로 같은 검술을 공유하고 있던 오귀스트일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드라굴리아냐!”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의 길이 보여주는 진로는 복잡다단하게 구축되어 용의 시선조차 속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아가는 길은 복잡했음에도 원하는 바는 명료했으니.
단 한 번의 일격을 통해 승부를 내고 마는 결투사의 검술이 블라드의 검 끝을 통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황실의 검!”
용으로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증오해 마지않을 남자의 검.
그 검을 알아본 미르셰아의 눈이 흉악하게 일그러졌으나 보았을 때는 늦었고 알아챘을 때는 이미 닿아 있었다.
“나는 드라굴리아가 아니라!”
텅-! 텅-! 텅텅텅!
기어이 오래된 복도를 부수며 뻗어나가는 황금색의 잔상.
미르셰아를 밀어내며 블라드가 밟아나가는 발자국마다 자야르가 새겨넣은 파문이 출렁이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다!”
앞을 가로막는 벽을 뚫고, 뚫고, 뚫어나가며 자욱한 돌먼지 속에서 엉켜가는 두 명의 기사.
온몸을 검으로만 세운 것만 같은 블라드의 일격을 받아내며 미르셰아는 억눌린 잇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녀석도 조각의 영향을 받고 있군!’
오직 용이기에 가질 수 있는 힘과 속도.
인간의 규격을 뛰어넘은 그 물리력에 미르셰아는 또다시 용의 조각들에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계속해서 전장을 통제해야 한다! 예전에 자야르가 뭐라고 했었지!]
애꾸눈의 기사 자야르는 말했었다.
물처럼 이어지는 공격만이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노라고.
그 말은 즉, 언제나 다음 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내는 블라드의 돌진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미르셰아의 검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색 창연한 오러와 함께 공격의 맥(脈)을 끊는 미르셰아.
선으로 이어지는 블라드의 전진을 깔끔하게 끊어내는 그의 세계는 과연 스스로를 완벽이라 칭해도 될 정도였다.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벽이라 하는 것은 흠결이 없다는 것.
상대에게서 그 흠이 없다면 블라드는 스스로가 완벽 속에 새겨질 흠이 되어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벌어질 진흙탕 싸움은 블라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방식이기도 했으니까.
우드드득-
“······!”
검이 닿은 견갑이 우그러지고 흉갑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전진.
그저 몸뚱이 하나로 공격을 받아내는 블라드를 보며 미르셰아의 눈이 크게 떠지고 말았다.
“이게 바로 뒷골목 방식이다! 자식아!”
갑옷의 각도를 이용해 검을 빗겨내고 그에 따른 충격은 강체술로 버텨낸다.
그야말로 무식하기 그지없는 막무가내식 돌격.
그러나 지금을 버텨내지 못한다면 내일을 꿈꿀 수 없는 곳이 바로 쇼아라의 뒷골목이었다.
“크흑!”
블라드의 이마가 번쩍인다 싶더니 곧 미르셰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퍼억-!
번쩍임 끝에 다가오는 강렬한 통증.
미르셰아는 오늘, 그야말로 태어나 처음으로 박치기라는 것을 당해보았다.
“이런 같잖은!”
“으아아아아!”
요제프는 말했었다.
전쟁에서의 기본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원하는 전장, 원하는 시간, 그리고 원하는 방법.
저 아래 진창에서부터 시작한 블라드의 공격은 미르셰아에게 있어 단 하나도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 다시 한번 말해봐!”
용으로 태어났기에 흉악하고 뒷골목에서 자라났기에 거칠다.
그러나 휘두르고 있는 것은 고귀한 황실의 검.
뿌리부터 시작해 맺은 열매까지, 하나도 맞지 않는 의외성이 블라드라는 이름으로 크게 포효하고 있었다.
“말해봐라! 미르셰아!”
블라드의 세계는 다면(多面)의 세계.
보는 자에 따라 달라지고 마는 블라드의 이름은 오직 스스로만이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
마링겐의 기사들은 내 앞으로!
하르키타! 방진을 쌓아라!
포드밀스와 로므니에는 부상자들을 호위하라!
회의장에서 뛰쳐나온 영주들이 서둘러 가문의 기사들을 소집하고 있었다.
여전히 저 하늘 위에서 바스토폴을 유린하는 용살 기사단과 와이번들.
그러나 영주들을 위시한 기사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는 듯 재빨리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푸슉-!
끼에에에엑!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섬뜩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가는 와이번 한 마리.
그저 당하기만 하고 있던 땅에서부터 곧게 뻗어나간 빛 하나가 있었다.
화살보다 빠르며 검보다 날카로운 누군가의 창이었다.
“볼코프 경이다!”
“투창의 볼코프!”
바라노프의 기사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와이번을 보며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가서 내 창들 다 가져와.”
애써 내뱉은 명령이 떨릴 정도로 볼코프는 지쳐있었다.
먼지로 더럽혀진 피는 이마를 따라 손목까지 닿았고 입고 잇는 갑옷은 이곳저곳 깨져 있었으나 볼코프의 눈만큼은 아직 죽지 않았다.
“저기 날아다니는 파리 새끼들 숫자에 맞춰서.”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투창의 볼코프에게 있어서는 미르셰아라는 용을 상대하는 것보다 저 위에 날아다니는 와이번을 맞추는 것이 더 맞는 자리였다.
※※※※
두드드드득-!
지금도 계속해서 흔들리는 복도.
신비로 이어진 복도였으나 용의 조각은 그 통로마저 흔들릴 정도로 날뛰는 중이었다.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강철로 만든 도시 안 가장 깊은 곳.
마법사 페르낭의 인도 아래,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온 티무르와 페테르는 드디어 용의 조각들이 보관된 봉인함 앞에 설 수 있었다.
두드드드득-!
더더드드더덕-!
용의 조각을 담은 봉인함들.
힘껏 용들을 부르고 있던 봉인함들은 티무르와 페테르의 존재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더욱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흐으으으읍!”
감은 왼쪽 눈을 따라 흐르는 티무르의 세계.
바라노프이기에 통과할 수 있는 자물쇠를 지나 기사의 검이 용의 조각에 닿았다.
끄아아아아아아!
“크흣!”
“······!”
짐승과 사람이 하나로 섞여 비명을 지르면 이런 소리가 나올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비명에 경험 많은 티무르와 페테르조차도 잠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조용해졌군요.”
“잠시 기절한 걸세.”
찔러넣은 검에서부터 희미한 핏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조용해진 바라노프의 함을 보며 티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지금 밖에서 날뛰고 있는 용들은 이 조각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용에게서 떨어져 나온 잔재들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용들을 불러올 재앙들.
아주 잠시라도 이것들을 멈추지 않는 이상 용의 피를 타고난 것들은 끊임없이 바스토폴을 짓밟고 말 것이다.
“자르겠소.”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백작님.”
더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라브노마의 자물쇠를 보며 페테르가 왼쪽 눈을 감았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페테르의 세계는 굳건히 버티고 있는 스투르마의 성벽을 닮아 있었다.
“흐읍!”
스윽-!
한껏 금이 가버린 몰락한 라브노마의 자물쇠를 잘라버린 페테르.
그러자 봉인함을 빠져나오려 하는 용의 조각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어서 소드마스터의 함 앞에 맹세하십시오!”
그 순간에 맞춰 신비를 불러낸 페르낭은 무겁고도 거대한 공간을 소환해 봉인함의 위를 막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비틀린 시야를 통해 살짝 보이는 페르낭의 공간은 아주 작게 압축된 산(山)과도 같아 보였다.
산 하나를 머리에 이었음에도 여전히 땅이 흔들리는 것은 그만큼 용의 조각이 지금 필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앞으로도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콰악-!
페르낭의 도움을 통해 자물쇠가 있던 자리에 검을 찔러 넣은 페테르.
그의 검 끝에서부터 아까와 같은 기이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책임 있기에 정당한 대가를 치를 이름은 바예지드.”
맹세를 읆조리는 페테르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티무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꽂아 넣은 검을 따라 그의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이 이름이 다하는 순간까지 바예지드는 당신의 과업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아무나 지금의 맹세를 말할 순 없다.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힘 있는 자의 보증뿐.
오랜 시간 동안 북부의 기둥이자 하나 남은 라브노마의 후원자.
그리고 서부의 가이다르를 꺾고 새로이 한 발자국 올라선 바예지드만이 지금의 맹세에 효력을 갖출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의 봉인함 또한 페테르의 맹세가 적법하며 온당하다고 판단했다.
“끄으으읍!”
검을 따라 빠져나간 페테르의 피가 한데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뭉치기 시작한 장소는 방금까지만 해도 라브노마의 자물쇠가 있던 곳.
몰락했기에 의무를 다할 수 없는 라브노마의 자물쇠 대신 페테르의 피로 만들어진 새로운 자물쇠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
용들이 울부짖는 도시, 바스토폴.
그러나 방금까지 위태로이 흔들리던 도시는 지금 천천히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
“······!”
사납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푸른 눈동자들 또한 같이.
저 위에서 날뛰던 와이번들도 갑작스레 느껴지는 무력감에 무거워진 날개를 허덕이고 있었다.
‘으으으.’
[검을 놓지 마라! 이제야 돌아온 것뿐이야.]
끊임없는 고양감에 흥분해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무거워진 몸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당황감을 느낀 것은 블라드만은 아니었다.
‘멈췄다? 용의 조각이?’
다가갈수록 강해지고 완벽해지는 부름이 있었다.
그 부름을 따라 임무를 완수하려 했던 미르셰아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아버지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바라노프라면 몰라도 라브노마의 함까지?’
적법한 주인이 있는 바라노프의 함이라면 몰라도 이미 크게 몰락해버린 라브노마의 함을 잠재울 수는 없을 터.
티무르나 페르낭의 생각과는 달리 자격을 잃어버린 그 봉인함만큼은 그 누가 와도 잠재울 수 없는 것이었다.
[준비됐나 보다! 블라드!]
오직 소드마스터의 인정이 있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는 힘이란 그저 수호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일 뿐.
키하노의 앞에서 블라드라는 어린 가능성을 보호해주었고 키워주었으며 믿어준 바예지드였기에 페테르는 새로이 맹약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블라드는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열기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몰이꾼의 임무는 사냥꾼의 앞에 사냥감을 가져다 놓는 것.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하는 대상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검을 꽉 움켜잡았다.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내 아버지라는 작자한테 전해.”
“······뭐?”
지금 무너져 내린 저택에서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른 화산 하나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화산의 이름은 루트거 바예지드.
“언젠가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용살자 루트거 바예지드였다.
“미르세아-!”
가장 깊은 세계까지 다다라 터트려 온 화산 하나가 현실을 향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루트거가 칠하는 세계의 빛깔은 온통 빨간색.
“이걸로 끝을 내자!”
새하얀 설원 위에서 태어났으나 그 누구보다 뜨거운 루트거의 세계가 날개를 잃어버린 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정확히 용몰이꾼이 몰아붙인 자리를 향해서.
콰아아아앙-!
차마 받아내기 힘든 열기가 미르셰아의 손끝을 지져내기 시작했다.
조각들의 부름이 사라진 지금, 미르셰아가 두르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의 육체였을 뿐이었다.
“크으으으윽!”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끊임없이 흐를 용의 부름을 따라 나는 이곳에서 조각을 가져갔어야만 했는데.
그렇다면 아버지가 느꼈다던 소드마스터의 기운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
순간 미르셰아의 머릿속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도시 모시암, 소드마스터, 황실의 검.
이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지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못다 한 의무를 향해 (1)
지난밤은 아주 힘든 날이었다.
발밑에 땅은 흔들리고 하늘 위에서는 와이번들이 울부짖어댔으니까.
그러나 악몽과도 같은 밤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의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기 마련.
저 멀리 새하얀 평원에서부터 동이 터오자, 바스토폴의 주민들은 이제야 고요해진 도시를 향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기 시작했다.
“······그때 확실히 죽여버렸어야 되는 거였는데.”
“그러게요.”
“네가 제대로 못 몰아서 그래.”
“그래요. 그렇다 쳐요.”
떠오르는 아침 해가 어둠을 걷어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엉망이 된 성벽과 도시.
그중에서도 제일 어지러이 무너진 곳에 루트거와 블라드가 널브러져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둘에게 오늘의 태양이 와닿고 있었다.
“그래도 그놈한테 한 방 먹이니까 기분은 좋더라.”
“······.”
루트거의 말을 듣던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성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깊고도 거대하게 패여 있는 균열.
저택에서부터 시작한 그 균열은 정확히 바스토폴의 성벽까지 닿아있었다.
“좋긴 좋았겠네요.”
블라드는 시원하게 내질러 낸 루트거의 검로(劍路)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정도까지 분노를 터트려내었다면 누구라도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스투르마로 갈 거냐.”
“네.”
“요제프를 보러?”
“······네.”
이제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일어선 기사.
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블라드였지만 그렇기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떠나기로 했다.
나를 처음으로 알아봐 준 사람을 위해 아직 못다 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어제 합이 괜찮았어. 그렇지?”
“아까는 제대로 못 몰았다면서요.”
루트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블라드는 괜스레 근처에 있던 돌을 발로 툭 건드려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지금 루트거는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몸조심하고.”
“같이 안 가요?”
스투르마로 같이 가지 않을 거냐는 블라드의 말에 루트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거기 있는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거든.”
“······.”
“너나 나나 기댈 가족이 참 없다.”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루트거는 장난스레 블라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루트거의 세계는 화산과도 같은 세계.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어째서 그의 영혼 안에 깃든 분노가 그리 거셌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새하얀 설원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협곡.
그곳에 모여있는 무리들은 고개를 떨군 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피해는?”
“작전 중 격추된 와이번은 총 4기입니다.”
“기사들은?”
“······.”
절벽에 기대어 서 있던 미르셰아는 부관의 침묵을 이해했다.
얼핏 보아도 절반은 보이지 않는 기사들.
고르고 골라 만든 정예들을 잃었다는 씁쓸함에 미르셰아는 쓴 침을 넘기고 말았다.
“차라리 데스웜을 데려올 걸 그랬군.”
와이번 10기에 정예 기사 50명.
북부의 기사들은 닿을 수 없는 하늘을 이용한 기습이었으며 조각에 가까워질수록 완벽해지는 용을 이용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용혈공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도시 내부의 간자까지 이용해 벌인 일이었음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은 처참한 실패였을 뿐.
“어린 라브노마는 여전히 쇼아라에 있다던가?”
“지금 막 스투르마로 출발했다는 전보가 있긴 했습니다만······.”
모든 계획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미르셰아는 그런 변수들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건만 전혀 다른 곳에 문제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어린 라브노마가 없음에도 맹약이 옮겨갔다라······.”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 드라굴리아는 조각들을 담을 봉인함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소드마스터의 허락이 없이는 맹약의 수호자가 변경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맹약은 라브노마에게서 바예지드로 옮겨가고 말았고 결국 지금에 실패에 이르고 말았다.
처음 계획대로 라브노마의 함만 날뛰어줬어도 이렇게 쉽게 물러날 미르셰아와 와이번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검이 아니었어.’
미르셰아는 이번의 실패를 복기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북쪽에서 느꼈다던 소드마스터의 기운은 그저 검에 의한 흔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북부의 어디에선가는 그의 핏줄 혹은 의지를 이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궁정공조차 애타게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으나 핏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를 이은 전인이라는 뜻일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미르셰아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가능성을 상상하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무엇이 말이 안 됩니까. 단장님?”
“아니다.”
설마 아니겠지.
용으로 태어나서 소드마스터의 뜻을 이은 기사라니.
이 세상에 그런 모순적인 존재가 있을 리가 없겠지.
“부상자들을 추슬러라. 돌아가겠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명령을 내린 미르셰아는 새까맣게 타 버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완벽이라는 단어 위에 남겨진 새까만 흉터.
두 손을 꽉 움켜쥔 미르셰아는 그 흉터와 함께 잊어서는 안 될 이름 하나를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
엉망이 되어버린 저택 안에서 티무르와 페테르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고귀한 공작과 백작이 마주하는 자리였으나 분위기는 너무나 평안했고 또한 익숙해 보였다.
“죄다 무너져서 대접할 술이 없더군. 그나마 차도 겨우 찾은걸세.”
“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찻잔을 든 페테르는 티무르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래된 인연인 강철공의 앞에 있어서일까.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풀려 보이는 그는 웃을 때는 루트거를 닮았고 차를 마실 때는 요제프를 닮았다.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야. 이번 일을 통해 확고히 뭉칠 수 있을 테니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북부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외부의 위협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저 앞에 보이는군.”
저기 좀 보라는 듯 티무르가 턱 끝을 끄덕였다.
차를 마시던 페테르는 반쯤은 깨어진 창을 통해 성문을 나서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회의를 마치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는 영주들의 무리였다.
“목적지는 같은데 왜 같이 떠나지 않나?”
“굳이 용의 피를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페테르는 그 무리에 섞여 떠나가는 금발의 기사를 알아보았다.
검은 말을 탄 채 떠나가는 그 기사는 아마 자신의 영지인 스투르마로 향하는 중일 것이다.
“이제부터 스투르마에는 용의 조각이 봉인 될 테니까 말입니다.”
용으로 태어났으나 용에게 대적하는 것을 선택한 기사.
저 멀리 성문을 지나는 작은 깃발을 보며 페테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말 뒤에 매달려 있는 저 깃발은 분명 나의 아내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나저나 자네의 둘째 아들은 어떠한가. 차기 가주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아는데.”
페테르는 티무르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비어있는 찻잔을 기울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것이 있답니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겠지만 특히나 아픈 손가락은 있을 것이다.
페테르에게 있어 그 손가락은 바로 요제프였으며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불태워보고 싶다는 그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녀석도 이제 조금은 쉬어도 될 텐데도 말입니다.”
그저 지금 도시를 떠나 너에게 닿을 금발의 기사가 위안이 되길.
페테르가 기울인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은 그렇게나 썼다.
※※※※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을 한 사내와 약속했다.
가장 완벽한 용을 몰아내기 위해 하나의 깃발 아래 서자고.
그때의 약속은 진실된 것이었으며 또한 명예로운 것이었기에 북부의 영주인 우리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제국은 어떠한가.
하나가 되자던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가.
마지막까지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던 도시를 기억하는가.
지금의 황제는 정녕 건국왕의 약속을 이을 자격이 있는 자인가.
그렇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결의한다.
차별과 멸시로 북부와의 약속을 져버린 제국의 명을 더는 따르지 않겠노라고.
지금부터 우리는 거짓된 피로 이어진 황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건국왕이자 위대한 소드마스터.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키하노 프라우센의 정당한 후계자가 나올 때까지 북부는 오직 북부의 이름으로 오롯이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북부의 일곱 영주가 제국에게 보내는 결의이다.
※※※※
동부에 있는 깊은 숲.
그곳에는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깊고도 넓은 숲이 있었다.
어린 세계수가 있으며 그 세계수가 품어낸 어린 정령들이 있는 숲, 아우슈린.
그러나 지금 그 숲은 마치 칼날이 닿은 것만 같은 긴장감으로 인해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물러, 물러나라. 어서 다들 물러나.”
어린 세계수 앞으로 마을의 모든 엘프들이 모여있었다.
엘프들이 뿜어내는 살기로 인해 뭐라도 베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
이번만큼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세계수를 지키겠다는 엘프들의 의지가 선명했다.
“하지만 장로님.”
“계시일세.”
지금 세계수의 앞에는 새까맣게 깔린 사특한 존재들이 있었다.
인간, 몬스터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목 없는 그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저 존재만으로도 엘프들의 숲을 더럽히고 있었다.
“아무리 신녀의 계시라 해도 정녕 소드마스터의 검을 내어주실 겁니까? 저 불길한 인간에게?”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엘프들이었으나 장로 제로니모는 그들의 충돌을 한사코 제지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까.’
수백 년도 더 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남자였으나 제로니모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형편없이 낡았으며 지닌 머리색은 빛바랜 회색.
비치는 눈빛마저도 마치 시체처럼 오래되고 만 그였다.
위대한 자였으나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며 제로니모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을 느끼고 말았다.
“······모두 비켜주세요.”
순간, 한껏 웅성거리던 엘프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모두에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세계수의 의지를 따라 흐르는 것이었다.
“신녀님!”
“안 됩니다! 그 검만은!”
겨울이었으나 얇디얇은 천만을 걸친 세계수의 신녀.
꿈으로 보았던 지금의 광경을 바라보며 신녀의 두 눈동자는 지금이라도 흘러내릴 듯 출렁이고 있었다.
“길을 비켜주세요. 여러분.”
길을 비키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렇게 꿈에서 보았고 그럴 것이라 세계수가 경고했으니까.
지금도 세계수를 올려다보고 있는 불길한 여자는 그곳에서 뛰노는 어린 정령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져가세요. 본래 주인이시니까.”
“······.”
두 손으로 곱게 은색의 기사를 받쳐 든 세계수의 신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신녀가 운다는 것은 곧 세계수가 운다는 것.
한겨울이었음에도 여전히 푸르른 세계수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고 있었다.
“들리시나요? 지금 당신의 모습에 검이 울고 있어요.”
신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도 남자는 그저 무표정한 모습으로 소드마스터의 검을 집어 들 뿐이었다.
마치 오래된 장치처럼 삐걱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신녀의 말처럼 못다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의 주인을 보며 은색의 기사는 슬피 울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검을 쥐어든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심할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용을 죽여야 하니까.”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위대한 용살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키하노 프라우센.
그러나 지금 온통 메말라버린 그는 앞에 있는 이름은 잊어버린 채 오직 의무만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못다 한 의무를 향해 (2)
해가 짧은 북부였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집무실이 있었다.
옥사나 백작 부인이 특별히 마련해 준 곳이었으나 지금은 창을 통해 넘어오는 햇빛이 부끄러울 만큼 곳곳이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요제프 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놓고 가라.”
“조금은 쉬시면서 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직접 따뜻한 차를 들고 온 보르단은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집무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하게 박혀있는 것보다는 낫긴 한데······.’
처음에 스투르마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요제프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태껏 쌓여있던 피로와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박탈감이 결국 그의 육체를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피까지 토할 정도로 쇠약했었다고 하니 지금의 열정적인 모습은 차라리 반가운 것일 수도 있었다.
“놓고 가라니까.”
그러나 지금 보이는 저 번뜩이는 눈빛만큼은 오랫동안 요제프를 모셔왔던 보르단으로서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요제프의 눈빛은 그의 짙은 눈그늘과 어울려 더욱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으니까.
“······이따 저녁에 옥사나 님께서 같이 저녁을 들자고 하셨습니다.”
“알았다.”
정말 알았는지 말았는지 그저 손을 휘적거리며 보르단을 쫓아내는 요제프.
그런 요제프를 보며 보르단은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과 함께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
보르단이 나가자 이제는 다시 혼자만 남아있게 된 집무실.
하염없이 식어가는 찻잔이 요제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만든 거지?’
널따란 벽면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지도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지도에는 새롭게 그려진 선과 글자들이 가득했으니 지금 요제프는 그것들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단순히 권력을 탐한다면 이렇게까지 찢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나?’
비록 가주 경쟁에서 탈락했지만, 요제프가 모든 것을 놔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 발자국 물러섰기에 보이는 정세라는 것이 있었고 멀리서 본 시야로 정리해 본 제국의 모습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중부는 용혈공 파와 궁정공 파로 나눠서 싸우고 있고.’
지금도 크고 작게 일어나고 있는 중부 가문들의 영지전은 결국 용혈공과 궁정공을 대신하여 치르는 대리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중앙의 권력에 기대기 위해 줄을 대었던 영주들은 이제 각자가 속한 세력을 따라 멈출 수 없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부는 엘프들의 숲을 향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지도의 동쪽에 표시된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그곳을 향한 화살표들이 굵고도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요제프가 그려 넣은 화살표들 하나하나가 전부 동부의 영지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갑작스레 숨통이 막혔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엘프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교역이 중단되어 버리고 만 동부의 영주들은 지금 비츠카야 백작가를 중심으로 군사들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동부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막히고 만 교역의 숨통을 트게 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우슈린의 문을 열어젖혀야만 하는 것이었다.
‘서부는 잠잠해졌다지만 여기서 멈출 리가 없다.’
바예지드와의 결전으로 큰 타격을 입고만 가이다르는 황량한 협곡 너머 몸을 숨겼지만 아마 지금도 재기와 복수를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는 중일 것이다.
애초에 강철공 티무르가 협곡을 틀어막는 관문 요새를 설치한 것도 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북부는 독립했고, 중부는 여전히 어지러운 상황.
동부는 엘프들을 향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고 서부는 여전히 북부를 향한 이빨을 세우는 중이었다.
아직 정보망이 제대로 깔려 있지 않은 남부는 모르겠으나 그쪽도 지금 같은 어지러운 상황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제국을 이렇게 갈가리 찢어서 어쩌려는 거지?”
오래된 제국의 역사만큼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갈등의 더미가 있었다.
인종으로, 지역으로, 그리고 가지고 있는 종교로도.
그리고 그 갈등의 더미에 불을 붙인 것은 바로 드라굴리아.
결국, 지도에 새겨진 화살표들을 역순으로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드라굴리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상대의 의도를 알아야만 내미는 수에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드라굴리아가 보이는 행태는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으니, 지도를 바라보는 요제프의 눈그늘은 더욱더 짙어질 뿐이었다.
※※※※
떠나는 시간은 같았지만 가야 하는 방향은 달랐다.
누구는 서쪽으로, 누구는 남쪽으로.
강철공의 도시 바스토폴을 벗어난 영주들은 이제 각자의 영지를 향해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희가 마지막이네요.”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서 블라드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서 뻗어진 새하얀 손을 보며 블라드는 혹시라도 차가워질까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데어마르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데리고 온 기사들도 있으니까.”
블라드에 비하면 손색은 있겠으나 알리시아의 말처럼 데어마르로 움직이는 대 부족한 인력은 아니었다.
“항상 저는 블라드 경에게 고마워했어요. 부모님의 묘지에서부터 지금까지요.”
알리시아의 눈길이 누아르가 지고 있는 짐에 가 닿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검은 말이 지고 있는 짐에는 북부의 영주들이 떠나가면서 블라드에게 건네준 소소한 선물들이 담겨 있었다.
별것 아닌 선물들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 모두가 나름의 인정을 담은 징표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을 아직 다 못 해 드린 지금, 적어도 나아가는 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네요.”
그것들을 보며 이제는 알리시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날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블라드를 잡아두기에는 너무나 작은 이름이라는 것을.
북부의 일곱 영주를 뒤로 한 채 복도를 걸어 나가던 블라드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커 보였고 또한 자유로웠던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가세요. 스투르마로 가셔야 한다고 들었어요.”
“······.”
블라드는 가라고 말하며 애써 웃음 짓는 알리시아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쇼아라에 있을 제미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서 너에게 방해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알리시아의 표정이 꼭 예전의 제미나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꼭 한 번······.”
“반드시 찾아뵈러 가겠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했더라.
이별을 아쉬워했던 제미나를 달래기 위해 했던 말이.
“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꼭 데어마르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은 떠나가지만 반드시 너를 보러 돌아오겠다.
아마 이렇게 말했더니 제미나가 웃어주었던 것 같다.
“보세요. 이제는 따로 보관하고 있거든요.”
블라드는 품 안에서 자그마한 천 주머니를 하나 꺼내고는 알리시아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 안을 열어 보이자 보이는 것은 곱게 접혀 있는 손수건 하나.
이제는 다른 레이디의 것과 섞이지 않게 고이 보관해둔 자신의 손수건을 보며 알리시아는 울적한 마음에도 그만 웃고 말았다.
둥지가 작아지면 새는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올 곳은 역시 둥지뿐.
장미의 미소뿐만 아니라 데어마르 또한 둥지로 생각하는 블라드를 보며 알리시아는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 앞에서도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
바람은 없었으나 항구로 밀려오는 파도는 거칠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거대한 몸짓이 만들어내는 물결이었다.
용살 기사단의 집사장인 데비어스는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커다란 배를 보며 망토의 깃을 세웠다.
-무슨 배가 저렇게······.
항구로 다가오는 배를 보며 몇몇 병사들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두 눈을 치켜떠도 감당하기 힘든 크기.
지면으로 다가올수록 높아져만 가는 배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닻을 내려라!
-건널 판자 밖으로 내려!
병사들의 숨죽인 비명들을 가르며 항구에 도착한 배.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붉은색 돛이 접히자 배에서부터 기다란 건널 판자가 지면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하! 이거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구만!”
호탕한 웃음과 함께 항구로 내려오는 사내.
껄렁한 듯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인 뱃사람의 모습이었으나 입고 있는 옷만큼은 비싼 비단으로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저번에 내 땅에서 보았을 때보다는 훨씬 얼굴이 좋아졌군!”
“어서 오십시오. 바르보사 공작님.”
둘이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판자였으나 그 간격을 모두 차지할 정도로 건장한 체격.
그리고 남부 특유의 붉은 빛 섞인 머리까지.
사내가 짓고 있는 호탕한 웃음에는 오직 전성기의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과 관록이 담겨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야 무슨. 매일 이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데.”
데비어스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는 바르보사 공작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다가온 남자에게서는 짠 바닷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거 오랜만에 땅을 밟아서 멀미가 올라오는구만.”
바르보사 공작이라 불린 남자는 이런 때야말로 술을 마셔야 하는 때라면서 품속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늦었지만 드라굴리아 공작님께서 남부 군도의 제패를 축하드린다고 전하셨습니다.”
“뭐, 그 이야기야 황도(皇都)로 가서 직접 들으면 될 일이고.”
바르보사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였지만, 그가 이뤄낸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라브노마나 바라노프처럼 기존의 강자들로 이미 확고한 질서체계가 있었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남부 군도는 제국 역사를 통틀어도 단 한 번도 하나의 가문이 지배해 본 적이 없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요즘 골칫거리가 생겼다면서?”
“그렇습니다.”
데비어스는 공손히 대답하면서도 배에서부터 내려오는 함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선원들이 무겁다는 듯 낑낑대며 땅으로 내리는 함은 아주 귀한 물건이 들어있었는지 은색 쇠사슬로 엄중히 봉인되어 있었다.
“결국, 북부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아무래도 서부에서의 압박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흠. 나라 꼴 아주 잘 돌아가는구만.”
들고 있던 술병을 들이킨 바르보사 공작은 혀끝에 맴도는 알싸함이 독했는지 한쪽 눈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이다르 백작은 안된다고 말했었잖나.”
크게 패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서부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가이다르 백작.
그러나 바르보사라 불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를 하대하고 있었다.
“큰일은 큰 사람이랑 해야 한다고 용혈공에게 그렇게 말해왔건만.”
다 마신 술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바르보사 공작.
선장모를 벗어든 그의 등 뒤에서부터 새까만 물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 푸른 바다에서부터 달려오는 그것들은 바르보사 공작이 자랑해 마지않는 사략(私掠) 함대였다.
“그러니 나와 함께하는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실걸세.”
찡긋거리는 공작의 눈은 장난스러워 보였으나 그가 가져온 물결만큼은 전혀 가볍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남부의 유일한 공작인 황금공 바르보사 공작이었으니까.
제국에 넷밖에 없다는 고귀한 공작들.
북부의 강철공(鋼鐵公).
중앙의 용혈공(龍血公).
황실의 궁정공(宮廷公).
그리고 이제는 남부의 황금공(黃金公)까지.
이제는 유명무실한 황제만이 남아있는 제국에서 4명의 군주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름값만으로도 나라 하나는 족히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의 미소 (1)
하얗게 얼어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수많은 행렬과 함께했던 블라드와 니벨룬이었지만 이제는 둘만 남아 스투르마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으으······. 춥습니다. 추워요.”
하루가 다르게 매서워지는 겨울의 바람이 니벨룬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노상이었기에 그 바람을 피할 방법조차 없던 니벨룬은 그저 옷깃을 움켜잡으며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이게 뭐가 춥다 그래. 북부의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싫다······. 북부가 싫다.”
“그런데 수인족들은 기본적으로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나?”
“귀랑 꼬리만 빼면 블라드 님과 같은 평범한 가죽입니다만.”
“그래? 내가 뭐 본 적이 있어야지.”
추위에 정신이 나간 듯한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만난 것은 북부였으나 북부에 살던 녀석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어디 출신이야? 이렇게 추위를 타는 걸 보면 북부인은 아닌 것 같은데.”
“흐······.”
니벨룬은 블라드가 건네는 술병을 받고는 재빨리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퍼져오는 진한 나무 향기가 아주 조금은 떨리는 몸을 잡아주는 것만 같았다.
잔뜩 얼어붙은 코를 어루만져주는 그런 따스한 향기였다.
“남부, 남부 출신입니다.”
“아하. 그래서 이렇게 추위를 타는구만.”
“정확히는 남부에서도 아래에 있는 군도 출신이거든요. 이곳과는 달리 엄청 따뜻한 곳입니다.”
“군도(群島)? 섬들이 모여있는데 말인가?”
아무도 없이 오직 둘만이 걷는 길 위에서 오고 가는 술병 하나.
추위에 취해버린 마법사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바다 출신이면 수영은 좀 하겠네.”
“크으······.”
니벨룬은 블라드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려 했으나 입술 밖의 공기는 너무 차가웠고 목구멍으로 넘긴 술은 너무 셌다.
식도를 따라 넘어가는 위스키가 내장의 형태를 낱낱이 알려주자 니벨룬은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크흠! 모르셨나 보군요.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물을 싫어합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왜 물을 싫어하는데?”
북부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본래 사람이란 살면서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살면서도 물을 싫어한다는 수인족들의 특성은 블라드의 의구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거야······. 본래 저희가 뿌리 내린 땅이 섬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음?”
술을 한 모금 마신 니벨룬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귀를 쫑긋 올리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어딘가 가라앉고 만 그의 눈빛은 이제는 너무 멀어진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옛날, 저희의 선조들이 남부에 자리 잡았을 때는 섬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은 왜 군도가 됐대.”
먼 옛날에는 대륙에 속해있었으나 지금은 바다 위에 점들이 되어버린 땅.
옆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질문에 니벨룬은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그거야······.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이 저희의 터전을 가라앉혔기 때문이죠.”
“······.”
가장 완벽한 용.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블라드는 괜스레 가슴이 덜컥거리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는 그저 전설 속의 존재라 치부하며 멀게만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피 속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용이 내뿜는 숨결에 의해 무성했던 정글은 불태워지고 단단했던 땅은 가라앉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뭐 아주 오래된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죠.”
다시 건네는 술병을 받아든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니벨룬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세로로 좁혀진 니벨룬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계속해서 대륙을 떠돌고 있는 겁니다. 그때 용을 피해 도망쳤던 신비들을 찾기 위해서요.”
살던 터전은 잃었고, 믿던 신비는 산산이 흩어지고만 수인족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처 없는 방랑을 지속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의 뿌리가 얽혀있는 사연을 들은 블라드는 괜스레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오오. 저기 도시가 보입니다.”
“음?”
그러나 고민 속에서도 계속해서 걸어 나갔던 발걸음은 결국 블라드를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다.
저 멀리 보이는 눈으로 덮인 새하얀 도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스투르마가 블라드와 니벨룬을 반겨주고 있었다.
누아르의 뒤에 매달려 있던 자그마한 깃발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알아봤는지 힘차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
바예지드의 주도(主都) 스투르마.
그곳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정연한 자세로 경례하고 있었다.
“말도 안 꺼냈는데 다들 알아보네요.”
“여기서는 좀 오래 지냈었으니까.”
블라드는 여전히 환대에 익숙하지 않은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는 니벨룬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 당장 그거 안 집어넣어?’
말 위에서 으르렁대는 자야르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때의 자신은 들떠있었다.
사제 안드레아가 내어주었던 신분패를 드디어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요제프를 앞장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경비병들에게 굳이 신분패를 들이밀었던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투르마로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블라드 님!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앞에는 요제프가 없었고, 손에는 신분패를 쥐고 있지 않았지만 스투르마는 알아봐 주고 있었다.
이제는 남이 준 무언가를 내밀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는 성문을 보며 블라드는 볼을 긁적여대었다.
“오오······. 이곳이 스투르마.”
바스토폴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도시인 스투르마를 보며 니벨룬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세계로는 볼 수 없었지만 니벨룬의 세계에서는 도시 곳곳에 떠다니는 신비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눈팔지 마. 여기는 너 뒤치다꺼리 해 줄 사람 없어.”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군요. 그나저나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말은 했지만, 니벨룬은 딱히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호기심이 강한 것은 수인족 특유의 성정이 아닌가 싶어 블라드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바예지드의 저택으로.”
니벨룬의 물음에 대답하는 블라드의 시선이 도시에서도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바예지드의 저택. 종자가 되어 기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딘 곳.
아직도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환한 빛이 가득하던 요제프의 집무실이 선명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그레고리 님.”
저택에 들어선 블라드를 가장 먼저 맞이해 준 사람은 기사 그레고리였다.
“온다면 온다고 기별을 해줬어야지!”
“마땅히 기별할 여유가 없었어요.”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블라드를 이끌어주었던 선임 기사 그레고리는 예전보다 조금은 더 큰 것만 같은 블라드의 키를 가늠하여 사람 좋게 웃어대었다.
“포틀리 녀석은 날이 갈수록 옆으로 퍼져가던데 너는 그래도 위로 올라가는구나.”
“포틀리는 잘 지내나요?”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보고 가지 그래.”
쇼아라에서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 스투르마에서도 나름 반가운 인연들이 있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블라드 인생에서 가장 큰 완성을 이룬 도시가 바로 이곳 스투르마였으니까.
“그나저나 그 일은 어찌 된 거야. 바스토폴이 중앙 놈들한테 침공당했다던데.”
“그것은······.”
그레고리의 질문에 답하려던 블라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기척을 알아보았다.
멀리서, 가까이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들 평소처럼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블라드 님. 혹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백작 부인을 먼저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페테르와 루트거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저택의 주인인 옥사나 바예지드일 것이다.
끝없이 나돌아야만 하는 가주와 아들들을 대신해 저택과 스투르마를 지켰던 사람.
기사들 사이에서 난처해하는 집사를 보며 블라드는 옥사나가 얼마나 지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안내해주시죠. 집사님.”
“감사합니다. 블라드 님.”
등 뒤에 니벨룬이란 꼬리를 단 블라드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익숙한 복도를 걸어갔다.
짧게 비치는 겨울의 햇빛이었으나 노란색이 물씬 담겨있는 복도는 분명 예전의 기억과 같은 것이었다.
“······나 단정해 보이냐?”
“네?”
“어디 뭐 찢어지거나 너덜대는 곳 없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옷차림을 물어보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은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북부의 공작인 강철공을 만날 때보다 더 긴장되어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단정하지요. 충분히요.”
니벨룬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는 듯 블라드의 표정이 펴지기 시작했다.
“준비되셨습니까? 기별을 드려도 될까요.”
“네.”
응접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한 블라드는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집사가 두들기는 문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아무리 단단해지려 노력해봐도 저 문 뒤에 있을 여인에게는 지금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블라드.”
집사가 문을 열자 풍겨오는 향기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맡지 못했던 향기였지만 기억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있던 향기였다.
“아니, 이제는 블라드 경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그 향기와 함께 웃고 있는 귀부인을 보며 블라드는 준비했던 답을 놓친 채 그만 입술을 오물거리고 말았다.
저 밖 세상으로 나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음에도 지금 앞에 있는 여인만큼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 한 잔 줄까?”
“괜찮습니다.”
“라문드 경의 장원에서 이번에 새로이 차 농사를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
괜찮다고 말했으나 어차피 내어질 차였던 모양이다.
오늘따라 추워진 날씨를 지나온 블라드를 위해 옥사나가 직접 찻물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시니?”
“니벨룬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제 자문 마법사입니다.”
옥사나의 눈짓에 고개를 꾸벅 숙인 니벨룬은 평소와는 달리 딱히 입을 열지 않은 채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창가에 고이 놓여있던 여러 찻잎이 그의 관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지금 막 바스토폴에서 왔다고 들었다. 그곳에 있는 가주님과 루트거는 어떠하니?”
용살 기사단에게 침공당했다던 바스토폴의 소식은 옥사나로서도 신경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옥사나의 조용한 물음에 최대한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답하는 와중에도 위험했던 장면을 최대한 자제한 것은 오롯이 옥사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랬구나. 고생이 많았겠어.”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몰라본다면 바예지드의 안 주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옥사나는 블라드가 겪었던 일을 알아서 짐작하며 애써 웃어주었다.
“그나저나 먹히고 입힌 보람이 있구나. 처음 봤을 때보다도 살이 더 올랐어.”
“그렇습니까?”
거칠기만 한 바람을 타고 왔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옥사나를 보며 괜히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제미나도, 알리시아도 자신을 보며 웃고는 했지만, 옥사나는 그녀들과는 전혀 다른 미소로 블라드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뼈에 가죽만 붙어 있던 것만 같더니.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보기 좋구나.”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은 옥사나는 블라드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와닿는 자리가 간지러웠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살짝 옥사나와 눈을 마주쳐보았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이런 말은 또 처음 듣는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블라드를 보며 옥사나의 두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온통 가시만 세울 줄 알았던 소년이 이제는 둥글어질 줄도 알았다는 사실이 옥사나는 기꺼웠던 모양이다.
“······.”
그러나 블라드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어도 눈으로는 웃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옥사나의 얼굴에 이제는 지우기 힘든 걱정들이 깊게 새겨져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제프도 네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할 거야.”
“그렇습니까.”
차가운 겨울을 녹여주었던 그녀의 미소가 조금은 희미해진 것만 같아 블라드는 그만 울적해지고 말았다.
아들을 걱정하는 만큼, 어머니는 그보다 더 빨리 늙고 말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옥사나의 주름들.
그럼에도 애써 그 걱정들을 감춘 채 웃어주는 옥사나를 보며 블라드도 그저 미소만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미소 (2)
요제프의 집무실은 3층 복도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진 곳이지만 조용하고 그렇기에 얼마든지 혼자만의 생각을 풀어갈 수 있는 곳.
바예지드의 저택 안에서도 가장 오래 햇빛이 머무는 그곳을 블라드는 좋아했었다.
“요제프 님. 저 왔습니다.”
익숙한 문을 두드린 블라드는 잠시 기다리는 동안 복도에 있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비치는 오후의 햇살은 종자였던 시절, 그때 보았던 색깔과 여전히 같았다.
“들어와라.”
그리고 문이 열리며 보이는 광경 또한 또한 그랬다.
언제나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자야르와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보르단까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블라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집무실의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마음속 한 부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요제프 님.”
건넬 수 있는 많은 인사말이 있었겠으나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다녀왔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걸어 나갈 때마다 정신없이 바뀌는 주변 풍경이었지만 이곳의 모습만큼은 처음 보았던 그때 그대로였으니까.
“그래. 수고했다.”
다만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곳에서 하나쯤은 변해버린 광경이 있었다.
저 앞에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햇빛을 등진 채 앉아 있는 남자.
그러나 헤어질 때 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버린 요제프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짓고 있는 웃음 끝에 서글픔 하나를 매달 수밖에 없었다.
※※※※
찬장에서 차를 꺼내려던 요제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옆에 있던 위스키 병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블라드가 이 위스키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벌써 마법사까지 데리고 다니다니. 나보다 낫군.”
“니벨룬이라고 합니다. 요제프 님.”
술병을 들고 온 요제프는 앞에 앉아 있던 니벨룬에게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애초에 코를 킁킁거리며 앉아 있는 모양새가 시선을 끌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부 출신인가? 마법사인데 파란색 털과 호박색 눈동자라······.”
니벨룬을 바라보던 요제프의 눈동자가 가늘어져 갔다.
비록 수척해지긴 했으나 그만큼 밝아진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였다.
“아마 본(本) 섬에서 온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아니, 그냥 적당히 찍어봤는데 맞았나 보군.”
신비를 다루지는 않았으나 보이는 정보와 직관으로 추리할 줄 알았던 요제프.
한 계절을 같이 보냈음에도 이제야 겨우 니벨룬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던 블라드는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요제프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동안의 활약은 잘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바스토폴에서 한 건 했다지.”
“별로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블라드 또한 요제프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둘은 서로가 부족했던 부분은 가지고 있었기에 한 조각처럼 꼭 들어맞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드라굴리아의 미르셰아를 쫓아낸 것이 별것 아니라니. 이건 겸손의 영역을 넘었어.”
“그런가요?”
웃고 있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자야르와 시선을 마주쳐 보았다.
이것 좀 봐달라는 듯 조금은 우쭐거리는 모양새에서 아직은 소년이었던 시절의 테가 나는것만 같았다.
“뭘 봐?”
“······아니에요.”
예전 같았으면 블라드의 정강이를 한 번 후려갈겼을 자야르였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보다 고귀해졌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다 컸다고 믿고 싶겠지만 어른이 보기에는 여전히 어설픈 것 투성이었다.
“그래. 내가 있는 곳까지 다시 찾아와주어 고맙다.”
블라드에게 술을 따라준 요제프는 그 깊은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가 안부 인사였다면 지금부터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헤어질 때 다시 보자 말하기는 했었지만, 굳이 다시 올 필요는 없었겠지. 지금 보이는 모습을 보니 더 그랬을 것 같다.”
클 거라 생각하고 데려왔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요제프는 이제 더는 자신이 다룰 수 없는 금발의 기사를 보며 씁쓸한 듯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계약은 이미 끝났다. 나는 너에게 더는 내어줄 것이 없고 너도 나에게 더는 받아 갈 것이 없을 거다.”
예전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요제프의 말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충성의 맹세가 아닌 신의를 통해 이루어졌던 둘의 계약은 요제프가 가주 경쟁에서 탈락함으로써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다.
다만, 이렇게 본인이 먼저 계약이 끝났음을 말해주는 것은 블라드를 위한 요제프의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나는 조만간 도시 나사우로 떠날 예정이다. 이제 기대볼 만한 곳은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밖에 없으니.”
스투르마에서 다시 나사우까지.
이제 더는 바예지드에게 기댈 수 없는 요제프는 자신만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땅이 아닌 바다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분명 요제프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조용히 접시가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라드에게 조용히 다과를 내미는 보르단.
퉁퉁한 모습의 기사가 무언가 애타는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이제 홀로 서 볼 생각입니다.”
블라드는 단 것이 잔뜩 담겨 있는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요제프 님께서 알아봐 주셨고 바예지드가 거둬주었지만 이제 저는 제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요제프의 기사였으나 그와의 계약은 끝났고, 바예지드의 기사였으나 아우레오의 성을 받은 순간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요제프와 페테르의 동의 하에 이뤄진 정당한 자유였다.
“하지만······. 허락하신다면 이번만큼은 요제프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블라드의 손이 보르단이 내민 접시를 향해 다가갔다.
블라드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제미나에게 주기 위해 몰래 챙겼던 각설탕들을 보르단이 일부러 모른 척해주었다는 사실을.
“계약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아직 갚아야 할 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의 이름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떳떳함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내 안에 있는 양심일 것이다.
“그래.”
요제프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향하겠다는 블라드.
자신의 인생을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에 요제프는 이제야말로 확실히 블라드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럼 준비해볼까. 나사우로 향하는 길을.”
이제는 완전히 나에게서 떠나가 버린 블라드를 보며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럼에도 요제프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일 테니까.
“이번에는 바다로군.”
마지막까지 기다렸던 사람이 올라찬 것을 확인한 요제프는 들고 있던 술잔을 높게 들었다.
태어난 땅에서는 기회를 찾을 수 없었기에 바다로.
마지막까지 불태워보기로 한 요제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를 위해 바다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
스투르마에 도착한 지 이제 3일째.
그러나 떠나기로 했음에도 바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한겨울에 떠나는 만큼 확실한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요제프가 떠나는 행렬을 위해 쌓인 짐들이 마당에 한가득이었다.
“니다벨리르라······. 니다벨리르. 니다벨리르.”
“그래. 니다벨리르라고.”
니벨룬은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블라드는 니벨룬과는 달리 불편한 심정이 가득했다.
“······저 건방진 자식들이.”
“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던 블라드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밖을 향해 나서기 시작했다.
시근거리는 발자국이 잔뜩 화가 난 블라드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저래서 화가 나셨구만.”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본 니벨룬은 저 아래 있는 광경을 보며 블라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르단의 호통에도 성의 없는 태도를 보이는 하인들의 모습.
바예지드의 핏줄이자 백작 부인의 아들인 요제프였지만 이젠 그 말도 옛말이라는 듯 하인들의 태도는 무심할 뿐이었다.
“이거 나르면 돼?”
“네?”
“이거 나르면 되냐고.”
한껏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하인 중 하나가 자신의 앞에서 으르렁 대는 블라드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아니야. 다들 힘든 모양인데 좀 쉬고 있으라고.”
고귀한 기사이자 귀족.
그러나 차고 있는 검을 뒤로 둘러맨 채 손수 짐을 나르는 블라드를 보며 하인들이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거 끝나고 아주 쉬게 해줄 테니까.”
“죄송합니다. 블라드 님!”
짐을 하나하나 옮길 때마다 스산해지는 블라드의 눈빛은 스투르마의 성벽을 넘어오는 눈보라보다도 더욱 차가운 것이었다.
저 멀리서 짐을 나르고 있는 블라드를 본 보르단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애써 감춰보려 했던 초라한 모습을 들켜버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냥 빨리해버리자고요. 요제프 님이 보기 전에.”
지금의 상황을 들켜 민망해하는 보르단이었지만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짐을 지는 수고보다도 지금의 광경을 요제프가 볼까 싶어 그저 서두를 뿐이었다.
“그냥 쉬고 있으라니까 새끼들아!”
“성격은 여전하네. 블라드.”
자신의 짐을 옮겨 들려 하는 하인에게 역정을 내던 블라드였으나 정작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포틀리?”
“흐흐. 그동안 잘 지냈어?”
스투르마에서 얻은 유일한 친구이자 물주.
칸노르 가문의 막내인 포틀리가 더욱 통통해진 볼을 떨며 짐을 옮겨 들고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네가 왔다고 해서 와 봤는데······. 끄응!”
그러나 정작 옮겨 들었어도 힘에는 부쳤는지 금세 상자를 내려놓고만 포틀리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지.”
오랜만에 만난 포틀리를 보며 굳은 표정을 핀 블라드였지만 눈빛에 새겨둔 스산함 만큼은 놓지 않았다.
짐을 옮기기 위해 우물쭈물 다가오는 하인들이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만큼은 여전했다.
“······언제부터 이랬어?”
“좀 됐지 뭐. 사실 요제프 님이 여기에 도착하시자마자 한 번 크게 앓으셨거든.”
가주 경쟁에서의 탈락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오자마자 크게 앓고만 요제프였다.
아마 바예지드의 가신들 중 몇몇은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것을 바라던 사람도 몇몇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제님들도 오시고 나름 큰일이었었나 봐. 지금이야 기력을 찾으신 것 같긴 한데.”
“그래?”
힘이 들 텐데도 용케 짐을 나르며 대답하는 포틀리였지만 그 말을 듣는 블라드의 심정은 그저 착잡할 뿐이었다.
내 앞을 가려주던 나무와도 같던 사람이 점점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누구라도 보기 힘든 광경임은 틀림없었다.
“나도 이번 여정에 따라갈 거야. 아마 그때까지는 같이 요제프 님을 모시게 될 것 같아.”
“왜?”
“이번에 나사우에 새롭게 지점이 생겼거든. 이제 거기서 일하게 될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포틀리는 품 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고는 블라드 앞에서 흔들어대었다.
“그거 뭐야. 소시지야?”
“비슷한 거야.”
종이로 된 포장을 풀자 드러나는 것은 새빨간 소시지가 아니라 노란색으로 뭉쳐진 색다른 모양의 고기덩어리였다.
“어육으로 만든 소시지 같은 거야. 이제 바예지드는 바다를 접하고 있잖아? 분명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오.”
한번 먹어보라며 건네는 포틀리의 손짓에 블라드는 주저 없이 한 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퍼지는 짭짤한 맛은 과연 여태껏 먹어본 소시지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서부 해안에는 오징어라는 게 있다는 거야. 그걸 이용해보면 잘 될 것도 같아.”
“오징어? 나도 그거 한 번 본 적이 있지.”
새로운 소시지를 우겨넣던 블라드는 포틀리의 말을 들으며 나사우를 탈출할 때, 밤바다를 따라 배를 쫓아오던 기이한 생물들을 기억해냈다.
생긴 모양새는 기이했지만, 맛은 좋다고 말했던 하벤의 말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이거 더 있어? 있으면 이따 내 방에 가서 조금 더 먹자.”
이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보며 블라드는 근처 상자에서 낯익은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그게 뭔데?”
칙칙한 갈색빛이 가득한 술병 하나가 블라드의 손 위에서 반짝였다.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것 같은 술병의 모습에 포틀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같이 기분 더러운 날에는 이런 술이 어울리지.”
아마 요제프는 캡틴Q를 마음에 들어했던 드워프들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땅으로 떠나기 위해 특별히 챙겨온 술병을 보며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빨리 끝내고 가자.”
“계속하게? 하인들이 있잖아.”
“이것들이 나 떠난 다음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홀로 남을 보르단을 염려한 블라드는 하던 일은 마저 마치고 가기로 했다.
이미 짐을 옮기던 사이사이에 손 봐줄 몇 명을 봐두었던 모양이었다.
“······.”
블라드가 만드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재개된 작업.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짐을 옮기는 하인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요제프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려놓는 짐 하나하나마다 정성을 쏟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보르단이 이제야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었다.
“······너무 고맙구나.”
그렇게 짐을 옮기는 블라드를 저 위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녹색 머리를 가진 귀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직접 짐을 옮기는 기사를 보며 그저 하염없이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모두가 떠나가는 와중에도 아들에게 돌아와 준 기사.
내어준 것은 그저 몇 벌의 옷과 갑옷뿐이었을지라도 그때의 관심이 블라드에게는 그렇게나 따뜻했던 모양이었다.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 (1)
모두가 잠든 새벽, 아무도 없는 대련장 위에서 블라드와 자야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살기 가득한 전장은 아니었으나 둘 사이에 생긴 긴장된 공기만큼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와 봐라.”
준비되었다는 자야르의 말에 블라드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예전부터 수도 없이 해봤던 자야르와의 대련이었지만 오늘은 더 특별히 긴장되는 이유가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자야르는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유형의 검사다. 상대방의 유도를 조심해라.]
‘알겠어요.’
검을 아래로 내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은 빈틈투성이.
그러나 그 안에는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로운 번뜩임이 있다는 사실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왜? 먼저 들어가 주랴?”
“······.”
꼭 검이 부딪혀야만 전투의 시작은 아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결정되는 변수가 있고 자야르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놔야 한다고 블라드에게 가르쳤었다.
지금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블라드를 도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먼저 들어가야죠. 나이가 있으셔서 관절도 성치 않으실 텐데.”
“······건방진 놈.”
“이게 다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싹수가 노랬어.”
나아가려는 발끝의 위치, 치켜든 검의 각도, 그리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선과 몸짓까지.
검을 맞대지는 않았으나 지금도 블라드와 자야르는 서로가 서로를 현혹하는 속임수로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전초전의 끝에서 마침내 블라드의 검이 달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럼 갑니다!”
“······!”
블라드의 뒤에서 튕겨 나온 흙더미가 요란하게 밤하늘 위로 튀어 올랐다.
예측할 수 없었던 속도.
오러를 쓰지 않았음에도 폭발하듯 튀어 나가는 블라드의 돌진력은 자야르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뭔 놈의!’
까아앙-!
요란한 검명과 함께 얼어붙은 땅이 패이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주욱 밀려나고만 자야르가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나름 깜찍한 수를 배워왔군!”
“이건 그냥 뛴 거거든요!”
자야르는 부르르 떨리는 검을 통해서 블라드의 눈동자를 엿볼 수 있었다.
소년이었을 때보다 더 푸르러진 눈동자는 어렸을 적의 사나움을 지나 이제는 흉폭함의 영역에 다다라 있었다.
‘용의 피를 물려받았다더니!’
오러가 없었음에도 느낄 수 있는 블라드의 세계.
블라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고 드라굴리아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자야르가 만들어 준 종자 블라드만이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 낸 수많은 블라드가 지금의 푸른 눈동자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공격. 멈추지 말라고 했죠.”
“그래. 상대에게 흐름을 내주지 마라.”
자야르는 점점 푸르러져 가는 블라드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격에 실패했다면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만 기회가 나올 테니까.
“흐으아아압!”
그리하여 지금 자야르의 시선을 가득 메우는 것은 어린 용이 내지르는 포효.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격 속에서 자야르의 안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군!’
찔러내는 일격은 번개같이 사나웠으나 뻗어가는 방향은 마치 물처럼 부드러웠다.
자야르는 자신의 발걸음 위에 전혀 다른 이의 검술을 녹여낸 블라드를 보며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주 잡탕을 만들어놨군!”
“어때요. 쓸만하죠?”
욕이었지만 칭찬임을 아는 블라드가 환히 웃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성장해버린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 또한 사납게 웃어주었다.
“건방진 놈!”
그러나 그 웃음은 온전히 기쁨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상대에게서 빈틈을 찾아냈기에 저절로 흘러나온 포식자의 웃음 같은 것이었다.
텅! 터엉!
자야르의 검 끝에서 오직 원조만이 내지를 수 있는 고매한 반격기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흐름을 가져오기 위한 자야르의 유려한 반격에 블라드의 검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중심이 흔들리잖냐. 애송아.”
“······끄으으.”
가진바 세계는 강렬했을지 몰라도 휘두르는 검술에는 아직 빈틈이 보인다.
여태껏 일격필살이라는 검술을 통해 그 단점을 상쇄하던 블라드였지만 상대를 진득이 감싸는 자야르에게 만큼은 그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거면 내가 섭섭하지. 안 그래?”
“그러면······. 안 되는데!”
휘두르는 망토를 통해 시선을 가린 블라드는 재빨리 거리를 벌려 자야르의 간격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기세가 기울어졌음에도 블라드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예전과는 전혀 달라진 자신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정강이 안 맞았어요. 그죠?”
“하. 밖에 나가서 시건방만 늘어왔군.”
나라는 사람은 지금 처음보다 어느 정도나 성장했는가.
블라드가 궁금해하는 그 질문에 온전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지금 앞에 있는 자야르 뿐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키를 재듯 새겨놓았던 예전의 흔적들은 지금도 자야르라는 세계 안에 남아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주 정강이를 쪼개주마.”
“그렇게 말해놓고 하단 말고 상단 노리려고 하는 거죠?”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으나 웃고 있는 두 기사는 실로 기꺼운 마음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내가 이만큼 컸고, 내가 이만큼 키웠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남아있을 나의 흔적을 보며 자야르는 안대를 어루만졌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 혹시 이겼어?”
“······뭐가.”
이제는 스투르마를 떠나야 하는 아침. 블라드는 마지막 짐을 마차에 옮겨 싣고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누아르를 잡아당겼다.
“어제 자야르 님이랑 대련한 거 아니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
포틀리는 추위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볼을 포동거리며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둘이서 맞붙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는데. 내가 알아차렸을 정도니까 아마 저택에 있는 기사나 종자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걸?”
“······그래?”
포틀리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포틀리의 말대로 근처에 서성거리는 기사들이 한가득이었다.
“다들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응 포틀리?”
“흐······.”
상자의 숫자를 세던 포틀리의 손가락이 사나워진 블라드의 목소리에 다시 처음 셌던 위치로 되돌아갔다.
절로 움츠린 어깨 덕분에 안 그래도 동그랗던 체형이 더 동그래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궁금하니까······.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내가 이겼어.”
“진짜?”
이겼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포틀리였지만 이윽고 절뚝거리는 블라드의 발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자야르 님은 멀쩡해 보이는데?”
“그거야 반칙을 했으니까 그러지.”
저 멀리 행렬의 앞에 서 있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가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오러 안 쓰기로 해놓고.’
자야르의 세계는 밤하늘의 오로라처럼 녹색으로 출렁이는 세계.
어제 블라드가 정강이를 얻어맞기 전 보았던 색깔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이쿠! 나도 모르게 그만.’
이겼는데 진 것 같은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젯밤, 고통에 겨워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던 자야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한 것만 같았다.
“블라드, 블라드.”
“왜.”
“저기. 백작 부인께서 너 찾으셔.”
“응?”
자야르에게 집중하고 있어 미처 몰랐으나 저택의 현관 앞에서 블라드를 부르는 손짓이 있었다.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옥사나가 부르는 손짓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블라드.”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옥사나의 눈 한쪽에는 작게 맺혀 있는 눈물방울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애써 웃어 보이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블라드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온다고 기별을 해주었다면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
블라드는 옥사나의 하녀들이 가지고 나오는 짐보따리들을 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옷들이 담겨 있는 보따리들이었다.
“여름에는 여름에 맞는 옷을 입고,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거야. 이제는 귀족도 되었으니 지금처럼 막 입고 그러면 안 되는 거란다.”
“죄송합니다.”
옥사나는 삐죽 튀어나온 블라드의 옷깃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급진 옷감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계절에 맞지 않게 얇아 보이는 옷은 블라드가 종자였던 시절, 옥사나 내주었던 여름옷이었다.
“예전보다는 좀 더 크게 재단했으니 아마 맞을 거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시선을 마주치기 힘든 여인.
그렇기에 괜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블라드였으나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무거운 감촉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주었던 망토는 어디다 팔아먹었니?”
“······아.”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털의 촉감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쓸어 만져보았다.
샤를에게 넘겨주었던 망토보다 훨씬 두꺼워진 망토는 한겨울의 추위도 잊게 할 만큼 따스한 것이었다.
“담비 털로 만든 망토란다.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말고.”
입고 있던 망토를 푸르고 손수 새로운 망토의 끈을 여며주는 옥사나를 보며 블라드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부디 이번 여정 동안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블라드, 아니 블라드 경.”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옥사나의 눈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다른 이의 어머니였지만 그럼에도 번져오는 그녀의 따스함은 담비 털로 만든 망토보다 훨씬 깊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간지러워지는 마음에 깊게 고개를 숙인 블라드는 서둘러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등 뒤에서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옥사나의 눈빛을 눈치챘지만 두 모자가 작별할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그 망토.”
“망토 뭐?”
평소 타고 다니던 나귀 대신 이번에는 마차 지붕 위에 올라타 있던 니벨룬이 새롭게 받아온 블라드의 망토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망토 한 번만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
“마침 따뜻함 주머니가 비어있거든요. 제가 너무 때려서 도망갔나 봐요.”
니벨룬은 예전에 썼던 따뜻함 주머니를 흔들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홀쭉해져 버린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건 안 돼.”
“아이고 그러지 마시고.”
니벨룬의 구애에도 블라드는 망토 깃을 여밀 뿐 그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다른 거 찾아봐. 이건 안 돼.”
단호한 블라드의 태도를 보며 글렀다는 것을 알았는지 니벨룬의 귀가 축늘어지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는데요.”
“뭐?”
“저기 맨 앞에 있는 애꾸눈의 기사님에게 조금만 늦게 출발해달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말해봤는데 씨알도 안 먹혔습니다.”
“늦게 출발하자고? 왜?”
이런 겨울에는 동이 트기 전 출발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늦게 떠나자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는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거야······. 아직 도착 못 한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죠.”
마차 위에 올라탄 마법사는 저 멀리에 있는 성문을 보며 깊은 입김을 내뿜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올 것 같습니다.”
“······나는 가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의 이해 못 할 조언이었지만 블라드는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직접 접해 본 세계였기에 그가 허투루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이제 가볼게요.”
“그래. 그래.”
블라드가 자야르에게 다가가는 사이, 요제프와 옥사나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말로는 가보라 말하는 옥사나였으나 두 손은 여전히 요제프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를 알기에 그녀의 손은 스르륵 풀어지고 말았다.
“나는 항상 이곳에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돌아오렴.”
“네. 어머니.”
이제야 눈물짓는 어머니를 보며 요제프는 애써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성벽을 넘어 비쳐오는 아침의 햇살이 내가 태어났던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돌아올게요.”
말과는 다르게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는 저택이었지만 요제프는 애써 돌아오겠다고 말하기로 했다.
※※※※
어스름한 동이 터오는 아침, 스투르마의 성문 앞으로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두꺼운 두건을 머리끝까지 올려 쓴 남자들은 북부의 추위가 익숙하지 않은지 연신 새하얀 입김을 내뱉고 있었다.
“이곳이 스투르마······.”
무리 중에서도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깊은 눈빛으로 스투르마의 성벽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높고도 단단한 성벽의 위용은 과연 누가 보아도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정지! 앞에 있는 자는 신분을 밝혀라!”
아직 성문이 열릴 시간이 아님에도 우두커니 서서 신기한 듯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들.
그들을 보며 스투르마의 경비병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한마디에 들고 있던 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두건을 내리자 보이는 사내들의 뾰족한 귀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우슈린에서 왔소.”
이제는 익숙한 인간들의 요구를 들으며 레인저들의 대장인 바라디스는 품속을 뒤지며 서류 하나를 들어 보였다.
곱게 봉인된 그 서류의 겉면에는 하이날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엘프?”
“이건 알리시아 하이날 남작이 써 준 보증서고.”
평생을 통틀어도 한 번을 보기 힘들다는 엘프들이 앞에 있자 경비병들은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스투르마는 엘프는커녕 온 대륙을 떠돌아다닌다는 수인족들도 도통 보기 힘든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혹시 이 도시에 기사 블라드 경이 있다면 우리가 왔다고 기별을 좀 전해줬으면 하는데.”
알리시아 하이날 남작이 증명해준 보증서를 들고 기사 블라드를 찾는 엘프들.
멀리 보는 마법사가 기다렸던 사람들이 지금 스투르마의 성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